우리가 신을 믿는 이유

신과 믿음에 대해서

by 심하

들어가며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종교를 믿거나 신을 믿고는 한다. 누구는 그저 어릴 때부터 종교시설을 다녀 신을 믿을 수도 있고 나중에 믿게 된 것이 수 도 있다. 오늘은 그러한 우리가 신을 믿게 되는 이유와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신을 믿는 이유


우리는 신을 왜 믿을까? 물론 믿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믿는 사람들에게 의문을 던지겠다. 더러는 그냥 어릴 때부터 교회나 그런 종교시설을 다녀서 당연하게 믿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중에 신을 믿는 이는 왜 믿는 것일까? 그 믿음이 어찌 생기게 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믿고 싶어서이다. 당연한 소리 하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게 다다.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다. 그러면 왜 믿고 싶어 졌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사람들이 신을 믿고 싶은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의탁이다. 또 의지이다. 우리는 신을 언제 믿는가? 힘들 때 믿는다. 우리는 누구나 힘들 때마다 마음속으로 신을 부르짖는다. 삶이 너무 괴롭고 고통스럽고 날 미워하는 것 같아 우리에겐 안식이 필요하고 평안이 필요하고 해답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을 믿는다. 안식과 삶의 해답을 위해서 말이다.


혹시 그런 경험이 있던가? 힘들 때 마음속에서 부모님이라든가 또는 나의 롤모델이라든가 또는 내가 평소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때 나에게 뭐라고 말을 건네고 뭐라고 할지 말이다. 또는 마음속의 이성이 소리칠 때 말이다. 우리는 이처럼 힘들 때 마음속으로 해답과 안녕을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만들어 낸다. 내 마음속의 무언가를 말이다. 내가 삶이란 파도에 휩쓸릴 때 길을 잃고 쓰러지지 않을 별을 우리는 바란다. 그래서 만들어내고 지어내고 가정한다. 만일 그 사람이라면 만일 현인이라면 만일 신이라면 하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만일 우리 마음속 무언가를 믿는다면 그것은 신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면 모든 사람은 실수투성이이기에 자칫하면 그것은 되려 자기도 완벽하지도 않으면서 남에게 감히 말하는 걸로 들리거나 또는 두렵기에, 실망시키기에 만일 그 사람이라면 내 모습을 보고 실망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실수가 없이 온전하고 완전하시고 그러면서도 우리의 모든 죄악을 품어주실 그런 분이 필연적으로 필요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신이 된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품는 마음속에 계시는 우리가 만들어낸 우리의 신이다. 우리의 이성이라 불리는 목소리는 대체제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품을 만큼 아량이 넓지 못한다. 우리의 죄악을 품을 만큼 강인하지 않다. 그래서 누구나 마음속에 별이 필요하고 또 있다. 왜냐면 우리의 감정은 바다와 같이 이리 변하고 저리 변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변화하는 바다 위에서도 고정된 무언가 지표로 삼을 무언가가 필요하다. 순간의 파도에 흔들리지 않는 선인이나 현인 또는 나의 마음속의 이성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하는 것이다. 이성적인 누군가를 떠올리고 이성적인 나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미달한다.


그리고 그에 부합하는 유일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그러하시다. 신은 철저한 이성으로 우리를 품는다. 마냥 따듯한 어머니는 아니시다. 잘못했다면 꾸짖고 좌절한다면 일으켜 세우시는 우리의 별이다. 사람들의 별이다. 사람들이 제 위치를 가늠하고 찾을 수 있게 하시는 이성의 별이시다. 하나님은 박제될 수밖에 없다. 오로지 순수한 개념으로만 구성되어 어떠한 불완전함이랑 미숙함도 없고 오로지 따듯하고 자애로우시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품는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분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나아가 길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것은 나이다. 내가 만들어낸 신이자. 나의 마음이다. 내가 감당할 수 없고 버텨낼 수 없어 떼어낸 나의 이성이자 나의 도리이자 나의 양심이자 나의 모든 순수성이요 선함이다.


하나님은 이성의 별로써 저 하늘에 계신다.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고 사후의 구원을 보장받아 현세의 구원을 얻는다. 사후에 어찌 되던 현세는 현세이지만 사후의 구원이 현세의 구원으로 기쁨으로써 다가온다. 나에게서 온갖 불안을 가져가 주시고 안식을 가져다주신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고 내가 보기에 좋더라. 나는 당연 하나님의 종이다. 나는 하나님을 따른다. 나는 나의 마음을 따른다. 나는 나의 의지를 따른다.


우리는 미지를 두려워해 언제나 미지를 가두려고 한다. 설령 미지를 가둔다고 해서 아무것도 바뀌진 않아도 어느 정도까지가 미지인지 알았다는 데에서 더 이상의 안 밝힌 곳이 없다는 곳에서 안심한다. 그로 인해 바뀐 것이 없어도 말이다.



믿음에 관해


신을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인가? 아니면 교리를 따른다는 것인가? 신의 존재는 믿지 않아도 교리를 따른 다면은 그것은 믿는 것인가? 아닌 것인가? 신을 믿지 않더라도 교회를 가는 이들은 많고 그런 교회가 주는 여러 가지 이점들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신을 믿는 것인가? 아닌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가치를 따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을 따른 다는 것은 그 겉이 아닌 본질을 따르는 것 아닌가? 물론 겉을 따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자는 것이 변한다면 떠나버릴 것이다. 그러나 겉이 아닌 알맹이를 따르는 이라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담기는 그릇보다도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을 더 중히 여기고 그것을 따를 것이다.


우리가 일상 속을 살아가면서 신이 진짜로 있는지 증명할 수는 없다. 했어도 했는지 증명할 수도 안 했어도 안 했는지 증명할 수 없다. 그러니 신의 존재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불가할지라도 그가 내세운 가치에 대한 증명과 따름이 충분히 가능하다. 하나님이 내세운 가치를, 사랑이라는 가치에 대해서 따지고 그것을 따르는 것은 실로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 자체는 증명할 수 없어도 하나님이 내세우시는 가치는 가능하다. 증명도 가능하다. 각자가 삶을 살아가면서 그러한 사랑에 대한 가치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따른다는 것은 그저 맹목적으로 그 사람을 따르는 것일까? 아니면 그 사람의 가치를 따르는 것일까? 알맹이 인가? 겉인가? 알맹이가 바뀌면 우린 다른 사람이 되었다 생각한다. 본질이 겉에 있는가? 알맹이에 있는 가? 신이란 존재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내세운 가치를 증명할 수 있지 않던가? 존재에 반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가치에 반문하던가? 그 사랑이라는 가치를 따르라 하는 것에 말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이 교리를 따른다는 것인지, 그 존재를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말이다. 진정 신앙이란 무엇이라 생각되는가?


믿음이란 감정이다. 신을 믿고 싶어 하는 것이다. 믿음은 곧 바람이자 기대이다. 강한 믿음은 강한 바람과 동일하다. 믿음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곧 불신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고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레 나오는 결과라면 우리는 생각이라 표현할 것이다. 그런데 그냥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진 듯 하기에 나의 사고과정으로써 증명불가하지만 맞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은 믿음이 되는 것이다. 불신이 믿게 하고 믿음이 불신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모두는 신을 믿을 때 불신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애초 믿음이 아니다. 그건 사고다. 근거 없이 그저 그런 강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사람은 바꾼다. 신에 맞게 모든 논리구조를 바꾸어버린 다면은 그것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니고 그저 사실일 따름이다. 모든 것이 신에 대한 증거니깐 말이다. 불신을 믿음으로, 신에 맞게 모든 것을 완전히 바꾼다면 이제 그것은 사실로써 작동하는 것이다. 불신스러운,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에 나의 마음은 믿음이라는 감정이 되는 것이다. 믿고 싶기에 믿는 것이다. 도움받고 구원을 받고 평안을 원해서 신앙심이 깊어진다. 바람이 깊어진다. 기대가 깊어진다. 그러다가 그러한 감정이 증폭된다. 우연한 결과를 또는 들어맞는 결과만 보고 신을 믿고 그 존재를 확실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 강한 바람의 요구가 꺾이게 된다면 그것은 강한 배신이 된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거기선 증오가 피어난다.


우리는 내 안에 신이 기거할 자리를 만들고 나를 떼어낸 뒤 그와 대화를 하고 친밀감을 갖는다. 마치 어린 시절의 상상친구와 같이 말이다. 스스로가 감당 못할 것들을 분리시켜서 또 다른 나를 신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리한 뒤 나의 신의 바깥의 신과 합쳐 그 신과의 서사와 합일시키고 그에 맞게 논리를 바꾸어 나가면서 만들어지는 나의 신이다. 하나님이다. 내부의 신과 외부의 신과 합일이 된다. 나중에 종교를 믿는 자는 언제나 내부의 신이 먼저 나올 뿐이다. 제 몸을 맡기고 의탁할 존재가 필요해서 말이다. 나의 모든 죄악을 따듯이 품으면서도 나에게 길을 알려줄 이가 필요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다. 용서고 사랑이다. 그가 바뀌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 죄악이 있더라도 물론 그에 대한 것을 깊이 반성하고 갚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 해야 되겠지만 영원한 죄악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용서고 사랑이 아니던가? 부모의 사랑은 그저 자식에게 잘 대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그를 위하는 것이고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면 따끔하게 혼내는 것이고 좌절했다면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다. 자식이 죄를 저질렀다면 그 죗값을 치르되 다시 품어주는 것이다. 사랑은 무작정 죄를 용인해 주고 용납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반성하고 뉘우치고자 한다면 용서해 주는 것이다. 그 사람의 의지가 있다면 영원한 죄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이 아닌 것은 상대가 뉘우치거나 말거나 관계없이 복수하는 것이고 영원한 죄악속에 빠뜨리는 것이다. 남을 위하지도 않고 이끌지도 않고 지적하지도 않고 바로 잡지도 않는 것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남이 시궁창 속으로 들어가든 악한 길에 빠지든 상관하지 않는 것이고 붙잡지도 않는 것이다. 명백한 악을 그저 가만히 두는 것이다. 혼내지 않고 바로잡지 않고 꾸짖는 않는 것이다. 남이 어떻게 되든 상관치 않고 스스로만 생각하고 스스로만을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곳은 지옥일 수밖에 없다. 모두가 제 갈길만 가고 남을 보살피지는 않으되 서로 치고 박으며 나아가려 하니 지옥구덩이 속에서 서로를 밀치며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목이 전부 사슬로 묶여있어 그런 식으로는 되려 나오기는커녕 지옥구덩이 속으로 처박히고 말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서로가 서로를 위한다면, 사랑한다면 적어도 지옥만은 아닐 것이 분명하다. 천국은 아닐지라도 지옥만은 아닐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해치지 않고 같이 나아간다면 말이다. 물론 어려울 것이다. 어찌 내게 죄악을 저지른 이를 내가 쉬이 용서할 수 있겠는가? 나도 그리 생각지 않는다. 다만 용서할 수 있는 부분만 용서하라 그 사람을 꼭 반드시 참아가며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다. 여유가 있다면 용서하라. 그대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더라도 다른 자는 그 자를 용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도 아니고, 용서할 수 있다면 그리 해라. 힘에 부치다면 하지 말고 옆사람에게 맡겨도 된다. 그러다 마음이 추슬러져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면 그때 해라.



글을 마치며


나는 딱히 교회를 가봤다거나 그런 종교시설을 가서 무언갈 한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의문은 많았다. 신에 대해서라든지 믿음에 대해서라든지 말이다. 내가 생각이 많은 성격이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평소에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졌고 이번에 그에 관한 나의 생각을 풀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리 생각한다.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어렵게 생각한다고 말이다. 물론 사랑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가 엄청나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사랑이라는 게 거의 나의 모든 것을 바친 헌신이어야만 하는 것만은 또 아니다. 그저 약간의 호의일 뿐이다. 그저 손먼저 내밀고 가벼운 말 한마디 건네는 것도 충분히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표현이 무겁다면 작은 호의라고도 작은 선의라고도 거뜬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자그마한 호의와 선의, 그리고 배려가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라 말할 수가 있을까? 그것은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불가한 것이다.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 작지만 그것은 선명하게 마음속을 지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모 아니면 도식으로 생각하는걸 안타까이 생각한다. 흔히 착해 봤자 아무 소용없어하고 항상 극을 달리는 것을 안타까이 바라볼 수밖에 없다. 사랑은 도구가 아니다, 수단도 아니다, 도전도 아니다, 시련도 아니다. 당연 내가 그에 대한 대가를 받을 필요도 보상받을 필요도 없고 칭송받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는 사랑이라는 것이 강요되는 것이 싫다. 마치 당연히 사랑해야만 하고 크나큰 사랑을 베풀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만이 진짜 사랑이라 평가받는 것을 말이다. 사랑은 보상받을 일도 아니다. 모든 사랑은 동일하게 따듯하다. 크나큰 사랑이라 불리어진다고 더 뜨거운 것도 아니다. 누군가가 작은 사랑으로 생각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크나큰 불씨이다.


사랑을 베푸는 이유는 바로 사랑이 나의 마음을 지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남을 위하는 것이나 근본적으로 나를 위하는 것이다. 구석 한편에서 강한 바람과 추위에 움츠러들었어도 여전히 밝고 선명하게 불타오르는 작지만 강한 나의 불씨를 지펴, 그 불을 남이 받아 지피기까지 한다면, 그곳에 어찌 어둠이 있으랴, 가득 빛으로 충만하여 따스할 것이다. 추위에 몸부림치고 괴로워하는 이들 또한 그 불을 나눠 받는다면 시린 추위도 눈 녹듯 녹아 사라지고 그곳에 작지만 강한 불이 자리할 것이다.


그러니 한번 지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당신 마음속에 작지만, 확실히 자리해 있는 그 불씨를 말이다.


keyword
팔로워 2
작가의 이전글외규와 내규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