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차

책장을 접지 않는 이유

by 글쓰는 달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만의 독서 습관이 있을 것 같다. 그중에서도 크게 호불호가 갈리는 습관 중 하나는 ‘책에 표시를 하는가’ 여부이지 않을까.

마음에 와 닿는 부분에 밑줄을 긋거나 다양한 북마크로 책에 표시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나중에 그 책을 다시 펼쳐보았을 때 중요한 곳을 쉽게 찾을 수 있고 읽는 동안에도 머릿속에 인상 깊었던 부분을 더 잘 기억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리가 전혀 안 되는 집과 별개로 책은 정말 깨끗하게 본다. 다 읽고 나서도 마치 서점에서 새로 사 온 것처럼 보존(?)하며 읽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내 책을 빌려주는 일은 나도 상대방에게도 서로 부담되는 일이 되어서 최근에는 책을 빌려주지 않고 아예 선물하는 쪽을 택하고 있다.


특히 책장을 접거나 침을 묻혀 넘기는 방법은 아주 싫어하는 독서 습관이다. 내 손이 책장에 베여 피가 나더라도 나는 책장에 티 하나 남기지 않고 넘기려고 애쓴다. 특히 책장을 접는 것은 내가 아주아주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되돌릴 수 없어서 이다. 지금은 내게 소중한 부분이라 접어두었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더 이상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접혀 있는 책장을 다시 편다고 해도 맨 처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그리고 이렇게 접힌 부분이 쌓일수록 책이 비대칭적으로 일부만 두꺼워져서 겉면이 안 예뻐 보이는 것도 참을 수가 없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강한 멘탈의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에 웬만하면 싫어하는 사람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쓴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그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은 바로 눈에 띌 만큼 티가 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고차원적 멘탈을 지녀야 가능함을 알기 때문에 상대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아주아주 애쓴다. 요즘 사람들이 싫어하는 쿨하지 못하고 질척거리는 인간관계를 추구하는 타입인 것 같다. 정말 질릴 대로 질려서 미련없이 정을 뗀 경험도 있긴 하다. 처음엔 내가 이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먼저 끝내자고 하는 게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두려웠지만 막상 정리하고 나니 서로에게 더 나은 길이 펼쳐졌던 것 같다.


진짜 문제는 계속 유지해야 하는 관계에서 발생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예 끊어버리면 끝인 사이라면 그래도 쉽겠지만 나와 가까울수록, 내 삶에서 쉽게 찢어버릴 수 없는 책장 같은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한 번 접힌 마음의 자국은 다시 펴도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고, 펴보겠다고 반대쪽으로 접어버리는 날에는 자국 부분이 얇아져서 더 쉽게 찢어지게 된다. 학교에서 수학여행 참가 여부 묻는 종이에 절취선을 따라 앞으로 한 번 뒤로 한 번 접고 나면 얼마나 깔끔하게 찢을 수 있었는지 기억이 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웬만해서는 타인을 깊이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마음에 자국이 생기고, 가로로 접혔던 마음을 겨우 펼쳐서 두꺼운 책으로 누르며 최대한 처음처럼 만들어도 다시 세로로 마음이 접히고 시간이 지나면 여러 방향으로 접힌 자국에 마음의 책장이 꼬깃꼬깃 너덜너덜해진다. 예쁘게 접힌 종이학과 그것을 펴 놓은 색종이의 모습은 다른 것처럼 아무리 난 쿨하다, 상처 받지 않았다, 극복했다 등등으로 내 마음을 포장해도 결국 다 무장해제시키면 남는 건 손자국이 남은 모습일 뿐. 접힌 자국을 따라서 다시 종이학을 접는다고 해도 처음 접혔을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완성되지 않던가.


미워하는 것도 용서하는 것도 내겐 아직도 어려운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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