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김씨표류기'
마음에 맞는 영화를 만나는 것은 그런 사람을 찾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취양과 더불어, 그 만남이 시작되는 시대, 최근의 사건, 그날의 기분,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 등 여러 요소들이 잘 맞아떨어질 때야 그야말로 맘에 쏙 들어오고 맛깔스런 영화를 만나게 되죠. 그런 만남들이 한 번, 두 번 늘어나다 보니 그중에서 더 친밀하게 혹은 강렬하게 다가왔던 영화도 조금씩 바뀌는 것 같습니다.
마음에 맞았던 영화를 소개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누구나 인생의 영화들이 있지만, "이 영화 정말 쩔어!"라고 하고 싶은 영화는 그때마다 다르달까요? ㅎ
오늘은 저의 TOP10 바구니에 숨어있던 영화, '김씨표류기'를 꺼내볼까 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김씨입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어떤 형태의 실패를 경험한다면 이런 모습을 하게 될까요.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을 겪었을 때, 자신만의 공간으로 숨어드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나의 작은 방, 친구와의 끝이 없는 술자리, 애인의 품, 그 모든 것들이 때로는 '현실을 피해 숨어드는 공간'이 되니까요. 그 공간은 더 나은 도약을 위한 충전의 장이 되는가 하면, 더 깊고 좁은 공간으로 가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도망칠 수 있는 가장 좁고 깊은 공간은 어디일까요. 바로 ‘죽음’입니다. 자살. 그 간편하고도 어리석은 선택.
어느 대교의 난간, 깊고 차가워 보이는 강의 표면을 바라보는 이가 있습니다.
김씨(정재영), 그 역시 ‘자살’이라는 깊고 깊은 움츠림을 시도하나 보군요. 하지만 의아하게도 이는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리고 그는 죽음만큼이나 외롭고 격리된 공간 속에서 눈을 뜨게 됩니다. ‘움츠림’을 위한 완벽한 환경. 무인도, 그것도 도심 속의 무인도인 ‘밤섬’이었죠.
그가 이미 시도했던 죽음에 비해 그 공간은 턱없이 넓었습니다. 김씨는 또다시 자살이라는 한층 더 협소한 공간으로의 시도를 합니다. 그가 매고 있던 넥타이를 나무에 걸어서 말이죠. 하지만 하늘의 뜻일까요?^^ 아랫배를 뒤흔드는 갑작스러운 신호는, 그에게 또 한 번의 기우를 경험하게 합니다.
볼일(?)을 끝낸 김씨,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빨간 사루비아 꽃이 한 아름 피어있습니다. 장시간 허기로 인해 메마른 그의 입속으로 달콤한 꿀이 들어옵니다.
꿀의 향이 입안 곳곳을 맴돌며 자극합니다. “달콤합니다.” 한 개, 두 개, 꽃을 따는 그의 손은 점차 빨라지고, 허겁지겁 꽃을 입속으로 밀어 넣던 그는, 알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왜일까요.
김씨는 왜 갑자기 눈물을 흘린 것일까요.
사회적인 낙오, 등 돌린 애인, 자살마저 실패한 그는 도심 속의 작은 섬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바지를 무릎까지 내린 채 꽃의 꿀을 빨아먹고 있습니다. 한심하기 그지없는 자신. 하지만 끊임없이 입속으로 꽃을 밀어 넣는 손이 한 가지를 깨닫게 합니다. ‘나는 아직 살고 싶구나.’ 김씨는 동작을 멈춘 채 한동안 목 놓아 울고 맙니다.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자살을 위해- 걸어 두었던 넥타이를 다시 바라보며 독백합니다.
“죽는 것은 언제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이제 자살은 보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일단 자살의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 그 세계(밤섬)에서는 말이죠. 그렇게 사회적 허물을 벗어 던진 그는 상당히 원초적인 욕구들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처음 느낀 욕구가 ‘목마름’이었을까요. 한강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의식적인 혼잣말을 합니다.
“먹을 만하네...뭐....... 마..맛있네!!! ... 물 맛 좋다!!!”
그리고 김씨의 남다른 표류가 시작됩니다.
이 영화의 숨은 반전이 있다면, 표류중인 김씨가 한 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무인도도 한 개가 아니지요. 굳이 정확한 제목으로 나열한다면 <두 김씨의 두 가지 표류기>가 맞습니다.^^;
여자 김씨, 편의상 ‘김양’으로 칭하겠습니다. 그녀는 이 영화의 또 다른 김씨이자, ‘남자 김씨’와 마찬가지로 도심 속의 표류자입니다. 그녀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방 밖을 나선 적이 없습니다. 장롱 속이 그녀의 안식처이며, 일과시간(?) 동안은 방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엄연히 존재하는- 자신의 작은 규칙들을 유지합니다. 그 규칙은 깨질 수도 깨져서도 안 되는 것들이지요. 규칙이 곧 그녀의 존재가치인 듯 보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정해 놓은 규칙들을 실현함으로써, 그 좁은 방 안의 삶에도, 그 삶 속의 자신에게도 나름의 가치가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김양은 일과 중에 사회활동을 합니다. 블로그 관리. 그녀는 그 가상의 공간, 하지만 실존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그 공간에서 자신의 외적인 삶을 관리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물건이나 사진을 저장하여 자신의 일부로 포장하며, 자신을 만들어내고 있죠. 블로그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녀가 어두운 방 안에서 만들어내던 그 모습은, 우리 역시 대인관계 속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모습 일부를 대변하는 게 아닐까요.
취미 활동 중, 그녀의 렌즈 안으로 평소 보지 못했던 풍경이 들어섭니다. 분명 무인도에 갇혀있지만 갇혀 있는 게 아닌, 허물을 벗어 던진 앵글 속 그 남자의 모습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죠. ‘외계 생명체’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니까요.^^ 그리고 그 ‘짧은 찰나’를 계기로 그녀의 삶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일단 그녀의 ‘작은 규칙’들에 균열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던 그것들이 말이죠. 달 사진은 더 이상 찍지 않습니다. 사진들이 걸려있던 공간에는 그 ‘외계인’의 사진들이 걸리기 시작합니다. 1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만 -민방위 훈련으로 거리가 한적해지는 그 시점에만- 허락되던 ‘대낮의 외부 관찰’도 더 이상 그 시기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녀는 무분별하게 창문을 열고 외부를(그 남자를)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블로그 속의 사회 활동도 잠정 휴업입니다. 안식처인 장롱 속을 벗어나, 달빛이 드는 방 한가운데서 잠을 청하기도 하지요. 3년 동안 단 한 번도 없던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김양은, (외계인과의 접선을 위해) ‘온 세상’이나 마찬가지인 방을 벗어나, 야심한 밤거리를 누비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외출 당시 그녀의 머리를 씌워진 헬멧은, 우주여행을 떠나는 비행사들의 그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와인병에 담긴 메모를 통해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대화가 시작됩니다.
영화 중간중간 보여지는 김씨의 에피소드는 참 기발하고 귀엽습니다. 특히 ‘짜파게티’를 먹기 위한 그의 대장정(?)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사람이 얼마나 열정적일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심지어 그는 -오만가지 욕을 하며 배달 온- 자장면, 그 쉬운 선택을 거부할 정도의 진지함을 보여줍니다. 그 배달부를 통해 김양에게 전달한 메시지가 참 인상 깊었죠.
무인도 생활에 적응하던 김씨, 그에게 밤섬은 ‘자살’을 보류시키는 새로운 세상이자 꿈입니다. 동시에 그녀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지요. 그곳에는 오뚜기 친구와 오리배가 있습니다. 영화 중반 자살을 위해 걸어 두었던 넥타이를 바라보던 김씨는, 넥타이를 비롯한 그의 양복 모두를 허수아비에게 입힙니다. ‘사회 속의 자신’, 김씨가 허수아비에게 전가한 것은 그것이지요. 허수아비는 깡통을 뒤집어쓰며 그의 친구인 ‘오뚜기’가 됩니다. 그렇게 탄생한 오뚜기는, 새로운 세상의 친구인 동시에 본래의 현실 세계로 가는 중간자인 셈이지요.
오리배는 새로운 세계의 보금자리이자 안식처입니다. 그는 주요 활동을 제외한 시간에는 이곳에 누워서 잠을 자거나 생각을 하지요. 오리배에 안식처를 마련함으로서, 새로운 세계에도 ‘돌아갈 집’이 생겨난 것입니다.
오리배를 떠나보낼 때 김씨의 그 애달픈 표정, 어디서 본 적이 있지 않으신가요? 영화 <케스트어웨이>에서 유일한 친구인 ‘윌슨’을 떠나보낼 때 주인공에게서도 볼 수 있었던 표정입니다. 이들은 배구공에, 허수아비에, 오리배에, 왜 이 같은 단순 사물에 의지하고 또한 슬퍼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잠깐, 심리학 이야기 (어려운 분은 넘어가셔도 돼요^^)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말 들어보셨죠? 왜 그럴까요. 보통,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그리고 자라나는 일정 시간 동안은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상관계이론>을 통해서 살짝 살펴볼까요? ‘대상관계이론’에서는 모든 대인관계에 그 표상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누구나 대인관계의 뼈대가 되는 원형이 내면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여러 형태의 대인관계에는,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내적 대상관계’의 반복이라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표상은 태어난 이후 가장 중요한 존재를 통해서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보통은 ‘엄마’가 그 역할을 하지만, 화제가 되었던 ‘늑대소녀’의 경우 ‘늑대’가 가장 중요한 존재이겠지요. 그렇게 ‘자기 표상’과 ‘대상 표상’이 형성됩니다. 자기 표상은 ‘나’이며, 대상 표상은 ‘나를 제외한 것들’입니다. 사람이 될 수도 사물이 될 수도 있죠. 그렇게 형성된 ‘내적 관계’가 내가 세상을 해석하고 그에 적응하는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릴 적부터 형성시켜온 내적 대상관계가 일반적으로 타자(다른 사람)로 인해 형성되기 때문에, 혼자가 될 경우 상당한 불안과 혼동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면의 ‘뼈대’에 해당하는 ‘대상 표상’이 없기 때문이죠.
자, 이제 무인도로 다시 돌아와서!!
이들 역시 내면에 있는 ‘대상관계’를 꺼내어 놓음으로써 혼자라는 불안에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살면서 지속해왔던 내면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다면 이때 형성되는 ‘윌슨’이나 ‘오뚜기’의 경우, 가장 원형의 가까운 대상일 수 있습니다. 원형에 가깝다는 것은 ‘자기 표상’에 가장 가까움을 의미하고, 이는 곧 그 대상과 하는 대화가 ‘나 자신’과 하는 대화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대화 방식을 살펴보면 “그래, 나도 알아. 이게 쉽지 않다는 걸”,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내 생각에는….”라며 혼잣말을 하듯이 말을 하고는 합니다.
외부로 ‘친구’화 된 나의 정체성. 그가 떠내려갑니다. 나 자신을 잃는 것만큼 슬픈 일이 또 있을까요?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강한 빗줄기 속에서도 깊게 빛나던 김씨의 눈은, 그 슬픔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의문의 남성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실패한 그녀는, 늘 그랬던 것처럼 도망을 칩니다. 자신의 장롱으로, 미니홈피의 세계로 다시 숨어들려 합니다. 그녀가 숨어있던 본래의 세계, 나름의 규칙과 가상공간이 존재하는 삶. 하지만 생각지 못한 사건이 일어나죠. 그 세계가 더 이상 그녀의 거짓 모습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탄로 나고 맙니다. 미니홈피에는 그녀에 대한 비방이 가득 차 있죠. “넌 누구냐,” 그들 역시 같은 질문을 던져 그녀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결국 자기 자신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김씨의 세계에 내렸던 그 비가 그녀의 방안으로도 휘몰아칩니다. 방의 모든 것들이 물에 젖어가고, 그녀는 허무하게 바라봅니다. 자신의 세계에 존재했던 무의한 것들이 희미해져 가는 모습을 말이죠.
두 ‘김씨’의 세상은,
같은 시점에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참 드라마틱 하죠?^^;)
다음 날 그녀의 렌즈 안으로 놀라운 광경이 잡힙니다. 관리인들에게 끌려 육지로 돌아가게 되는 모습, 그는 더 이상 밤섬에서 지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말은 더는 그와의 관계를 유지 할 수 없다는 뜻. 자신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현재, 그녀를 존재하게 하는 유일한 대상은, 그 ‘의문의 남성’ 밖에 없습니다. 불안합니다, 마음이 급해요. 그 남자를 만나지 않으면, 정말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릴 것만 같습니다.
자신의 방문 앞에 서는 김양, 3년 동안 단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 없는 공간으로 가는 문입니다. 고민은 오래 걸리지 앚았죠. 어느덧 문을 열어 뛰기 시작합니다.
그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느린 화면으로 긴 머리칼을 흩날리며 뛰는 김양, 려원의 가느다란 팔이 그 신비로움을 더해 주는 장면이죠.
지난밤의 비와 함께 모두 떠내려가 버린 그의 삶. 새로운 세상에서의 소박한 행복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하늘을 원망하던 김씨는, 그조차의 여유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낯선 침입자들이 그의 세계에 서 있습니다. 폭우로 인해 밤섬으로 올라선 쓰레기를 정리하기 위해, 관리인들이 온 것이죠. 김씨는 절규하며 도망쳐 보지만 잡히고 맙니다.
“여기 있게 해주세요...아무 짓도 안할게요...답장도 받아야 된단 말이에요..”
그는 바닥에 누워 중얼거립니다. 애절함. 하지만 그의 드라마는 그만의 것일 뿐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들어온 외부인이 이해할리 없죠. 결국 김씨는 처음 이곳에 입고 왔던 ‘현실의 옷’을 다시 입고, 밤섬을 벗어나게 됩니다.
밤섬이 그의 ‘죽음’을 보류시킨 새로운 세상이자 꿈이라는 말, 기억하시나요?
그는 이제 본래의 세계로 돌아왔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그의 눈앞에 -강 건너편으로만 보이던- 드높은 건물들과 바삐 오가는 인파 그리고 차량의 행렬이 보입니다. 이제 (꿈을 꾸는 동안) 보류해 두었던 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그곳을 향하는 버스를 탑니다. 카드를 찍습니다. 몇 개월 만이지만 찍히는군요. 그는 아직 이 사회의 흐름 속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제 곧 사라집니다. 그의 눈물이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민방위 훈련의 사이렌 소리.
버스가 멈춰 섭니다. 다급하게 버스의 앞문을 두드리는 가녀린 팔. 휘둥그레진 버스 기사의 눈을 지나치며 한 여인이 들어섭니다. 두리번거리던 여인의 시선이 그에게 멈추고, 그녀가 천천히 다가옵니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고르고, 남은 숨을 모아서 얘기하죠.
“마이.. 네임.. 이즈.. 김정연... 후아유”
독특한 소재와 발생하기 힘든 기연을 흥미롭게 묘사함으로써, 상영 내내 눈과 마음을 붙잡았던 영화 <김씨 표류기>. 접하기 힘든 캐릭터에게서도 우리의 현실적인 내면을 반영하며, 그사이에 애틋한 로맨스까지 들어있는 멋진 영화입니다. 김씨 역을 맡은 영화배우 정재영 씨가, “대본을 읽어보며 ‘내가 이 작품을 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완성도 높은 영화입니다.
두 개의 무인도, 두 남녀의 색다른 표류. 영화가 시작하는 처음부터, 그들은 물러설 곳도 달리 바라볼 수 있는 곳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 둘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밖에 없던 것이 아닐까요? 둘 만의 비밀스러운 소꿉놀이는, 김씨가 밤섬의 내음을 맡으며 눈을 뜨던 순간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