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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Jan 02. 2016

천재 살인자의 자아

영화 '향수'

책을 영화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글을 통해 머릿속에 그려지던 무한한 이미지를 네모 반듯한 영상 속으로 구겨 넣어야 하니까요. 때문에 책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중 꽤 많은 것들이 기존 독자들의 뭇매를 맞고는 합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향수' 또한 그 매질을 피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만 '향기'라는 소재, 글이 아니고서야 표현하기 힘든 그것을 영상에 잘 녹여낸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재밌게 보았습니다. 더불어, 매스컴 및 세간의 관심을 끊고 운둔생활 중인 원작 작가를 상대로 영화를 끝까지 완성시켰다는 점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



영화의 주인공인 '그루누이'는 (원작의 묘사에 비해서는 심하게 잘 생겼지만)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보지 못했던 음산함과 집요함 그리고 순수함이 있는데요. 나열된 수식어만으로도 뭔가 부적절하죠? ㅎ 오늘은 이 독특한 아이의 생애를 '정신분석'적 측면에서 접근해보려고 합니다.





인간의 내면


심리학 역사 속의 중추적 학자 중 한 명인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을 연구하였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내면은 자아(ego), 초자아(superego), 원초아(id) 이렇게 세 친구의  끊임없는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자아는 내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초아는 더도 덜도 없는 순수 본능입니다.

초자아는 이런 내부의 일들을 외부의 흐름과 어울리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원초아를 '본능'으로 풀이했다고 해서 흔히 생각하는 ‘욕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순수 그 자체의 덩어리로서 개인의 일생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죠. 쉽게 말해서 “마~~~ 냥” 원하는 존재입니다.


마냥 원한다고 해서 다 되지는 않겠지요? (그렇다면야 좋겠지만...) 그래서 자아가 있습니다. 이 녀석이 참 기특합니다. 자아는 무한정 원하기만 하는 원초아를 잘 타이르며 외부 조건과의 타협점을 찾습니다.


그렇다면 자아는 외부의 정보를 어떻게 사회적 또는 문화적 규범과 연결시킬까요? 그것을 정리해 주는 녀석이 바로 초자아입니다. 이 녀석은 항상 외부와의 관계성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기 때문에 그 바닥에서는 제법 잔뼈가 굵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초자아가 자아에게 충고합니다.  “지금 저 사람의 웃는 얼굴에 이유 없이 침을 뱉는다면 우린 저 사람과 멀어질 거야. 게다가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라는 옛말까지 무색해지지. 그 뿐이 아냐. 누군가가 그 모습을 볼 경우에는 이 집단에서 외톨이가 될 수도  있어.”라고 말이죠. (이처럼 세심한 조언자가 또 있을까요.)


자아는 이러한 충고들을 수렴하여, ‘나는 이유 없이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는 않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조건을 자신의 정체성에 추가시킵니다. 동시에 원초아에게 가서 토닥이며 말합니다. “혹시 침이 뱉고 싶다면 나를 봐서라도 좀 참아줘. 네가 침을 뱉으면 우리 모두 문제를 겪게 되거든. 참을 수 있지~?”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원초아가 “만약 지금 이 욕구마저 무시한다면 넌 상당한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할 거야.”라며 자아에게 경고하죠. 이처럼 자아는 내/외부의 조건, 즉 원초아와 초자아의 외침 사이에서 내면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끊임없이 완성시키는 지휘통제의 역할을 합니다.




‘그루누이’는 누구인가.


천재적인 후각을 갖고 태어난 사생아


'천재적인 후각'으로 가능해지는 것들은 우리가 언뜻 떠올리는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어린 시절 그루누이는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고아원을 나갈 수 없었지만 그 외부를 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연못 깊숙이 들어가 보지 않아도 그 안의 모든 것들(이끼, 바위, 큰 바위, 개구리알 등)의 위치와 형태를 알 수 있었죠.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담장 뒤편을 후각으로는 알 수 있었습니다. 눈을 감았을 때야 비로소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우리가 초록색의 팔딱이는 그 녀석이 ‘개구리’라는 것을 알게 되듯이, 그루누이는 자신이 후각으로 먼저 접하게 되는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원했고, 알게 된 것에 대해서는 (보이지 않는 연못 속을 보듯이) 그 각각의 크기와 위치를 분리하여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후각’으로만 말이죠.



그런 그에게 자아(ego), 초자아(superego), 원초아(id)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였을까요.


정상적으로, 원초아는 인간이 태어나는 시점부터 생성됩니다. 하지만 의식 너머 깊은 곳에 있어야 하는 원초아는, 그의 행동 대장이자 욕망의 화신인 ‘리비도(libido)'에게 몸 전체를 여행할 권리를 줍니다. 그런 리비도는 입과 항문을 거쳐 생식기에 머물게 되는데, 이런 욕구의 흐름에 따라 '자아’와 ‘초자아’가 형성됩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입:구강기), 배변에 대한 통제를 시작하고(항문:항문기-‘자아’가 형성),  이후 일반적인 성 욕구가 시작(생식기:남근기- ‘초자아’형성)되는 것을 이 흐름에 빗대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루누이’에게 이런 이론은 완전히 무의미합니다. 그의 ‘리비도’는, 그 욕망의 화신은 각종 악취가 진동하는 시장 바닥에서 태어난 그 순간부터, 그의 코에, 그 천재적인 후각에만 붙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루누이에게 원초아(id)와 자아(ego)는?


그루누이의 원초아는 '후각 그 자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어떤 감각으로도 지각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들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는  ‘후각’이야말로 그루누이를 살아가게 하는 호기심이자 ‘힘의 원천’인 것이죠.


그렇다면 그에게 ‘자아’는 무엇일까요. 일단 그의 자아는 ‘향기’라고 가정하며, 이 어거지를 이어가겠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개인은 1~3세 사이에 어머니와의 관계를 통해 자아의 틀을 형성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그루누이에게는 배부른 소리일 뿐입니다. 신은 그에게 정상적인 자아를 형성할 기회는 애초에 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의 어머니는 생선을 팔고 있었습니다. 생선 시체들이 나뒹구는 바닥에 그루누이를 낳았으며, 낳자마자 버리기 위해 천으로 가려둡니다. (그리고 이가 적발되어 교수형을 당합니다.) 때문에 그루누이는 ‘자아’라기 보다는 ‘목적성 자아’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자아로서 살아가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즉, 원초아인 ‘후각’에 대한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는 ‘향기’가 그에게 ‘세상과 타협하고 살아갈만한 목적’을 확립해 주는 자아의 역할을 하는 것이죠.


인간은 누구나 어느정도의 미래를 꿈꿉니다. 아마도 그루누이에게 미래란, ‘넓은 집과 미모의 배우자, 행복한 가정’과 같이 복잡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 산 너머, 저 강 너머에는 무슨 향기가 있을까.” 향기, 딱 그뿐. 그는 이러한 목적성 자아의 지휘 통솔 아래, “ 이 상황을 견뎌내면 더 새로운 향기를 경험할 수 있을 거야.”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형성하였고, 유년기에 닥치는 끔찍한 역경들을 담담하게 견뎌냅니다.





그에게 일어난 충격적 사건



첫 번째 충격


어느 날 그루누이는 자신이 지금까지 ‘자아’의 구조물로 쌓아왔던 향기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굉장한 향기를 맡게 됩니다. 이는 그 이전의 삶 자체를 무색하게 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으며, 말 그대로 충격이었습니다. 그 향기는 길에서 자두를 팔고 있던 어떤 여인(이하 자두 소녀)의 채취였습니다. 어디서도 누구에게도  맡아보지 못한 고유의, 그리고 너무나 황홀한 종류의 향기. 그루누이는 뭔가에 홀린 듯 그녀를 따라가지만 안타깝게도 불찰에 의해 그녀를 죽이게 되고, 고유의 향기도 점차 사라져갑니다.


자두, 드릴까요?


그루누이의 초자아가 이를 전후로 생성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그에게 사회적 관념이나 초자아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죠. 하지만 그루누이의 내면은(원초아와 목적성 자아) 그럴 만큼 여유가 있지도, 딱히 너그럽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그녀의 죽음으로 인한 현상, 즉 ―내면에 굉장한 포만감을 주었던 그녀의 향기가 사라져가는 현실만이 애통할 뿐이었습니다. 당시에 원초아가 생성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 하나 더 있는데요. 영화 후반부, 물고문을 하며 살인 동기를 묻는 교도관에게 “I needed her."라고 일관하는 모습에서도 사회적인 관념을 찾기는 어렵죠. 그루누이와 자두소녀의 이 일화는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하며 뒤에 다신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루누이에게 초자아(superego)는?


그렇다면 그의 초자아는 무엇일까요?

저는 '향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천재적인 후각으로 쉽사리 고급 향수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른 감각을 초월할만한 향수들을 제작함으로써 외부와의 소통이 시작됩니다. 자신의 향수 냄새에 따라 사람들의 태도가 너무나 쉽게 달라진다는 것을 느낀 것이죠. 그에게 ‘향수(초자아)’는 향기(자아)와 마찬가지로 ‘외부의 것’이었지만 자신을 사회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달랐습니다.



두 번째 충격


어느 날 그루누이는 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 나이의 여느 청소년들이 그렇듯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 것이죠. 놀랍게도 그루누이 자신에게는 향기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자아라고 믿으며 쌓아왔던 향기가 정작 자신에게는 없었던 것이죠. 참 어렵게 정체성을 확립했지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없는 정체성’이었습니다.



그 충격은 그에게 기나긴 비탄의 시간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당돌하신(?) 청년이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자아(향기)’를 직접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최고의 채취를 가진 12명의 여인으로부터 그것을 수집하여 자신만의 최고의 향수를 만드는 것이죠. 영화 속 그루누이의 이런 면모는, 형태만 다를 뿐 우리들에게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내면(원초아와 초자아의 균형)에 의해서가 아닌, 타인이나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역방향으로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죠.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요인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충격보다 더 큰 깨달음



완벽한 향수로서 세상 앞에선 그루누이


사형대에 오른 희대의 살인마 그루누이. 돌팔매질을 준비했던 수 많은 군중과 교황 그리고 살해당한 딸의 아버지까지도 그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루누이의 완벽한 향수 냄새가  모두에게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들은 끓어오르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집단 성교를 하기에 이릅니다. 야유와 분노로 가득했던 광장이 온통 전라의 피부색과 괴성으로 뒤덮이죠. (이 낯 뜨거운 장면에는 ‘후각이 이성을 지배할 수 있다’는 작가의 놀라운 상상력이 숨어있습니다.)




그루누이의 볼에 흐르는 눈물의 의미


그루누이는 그야말로 완벽한 초자아로서, 현실적으로도 완벽한 외부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자신의 시야에 펼쳐진 모든 존재가,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자신을 찬양하고 있었죠.



하지만 곧 깨닫게 됩니다.


‘향수’는, 초자아로서의 그것은, 자신의 중심인 ‘자아’가 될 수 없음을.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정체성’은 애초부터 외부로 인해 형성된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말이죠. 애석하게도 향기와 향수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것은 없었습니다. 목표에 다다른 자신은, 열광하는 군중 속에 홀로 서있는 무가치한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떠올립니다.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마치 아기가 처음으로 엄마의 사랑을 느끼듯) 자신의 원초아에게 최초의 행복함을 주었던 자두 소녀, 그리고 그 소녀가 가진 향기의 영원함 (아기가 엄마의 절대적 지지에서 느끼는 영원함), 그 뿐이었음을 말이죠. 아마 그의 눈물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뜨거웠을 것입니다. 얼마나 외로웠으며, 얼마나 슬펐을까요.



그루누이는 보통 사람이 유아기에 경험하는 무조건적 행복에 대한 욕망을 ‘향기’라는 특화된 형태로서 자두 소녀에게 느꼈을 것입니다. 유아기에 엄마를 통해 이루는 자아 형성 경험을, 십 여 년이나 지난 시점에 외부인으로부터 하게 되었죠. 심지어 그 놀라운 경험 조차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에게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그 사실을, 자신의 자아가 실패하였고 진정한 내면과의 대화를 통해 재형성해야 함을 인정하지 않은 채, 먼 길을 도망쳐 왔습니다.


결국 그루누이는 자신이 ‘無’였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고향인 파리에서 다시 ‘無’로 돌아갑니다.





글을 마치며


 그루누이는 천재였습니다.


그를 생각하면 머릿속에 함께 떠오르는 천재가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만드는 소년 ‘어거스트 러쉬’. 그 역시도 부모님의 사랑 없이 홀로 자랐죠. 하지만 둘의 미래는 너무도 다르네요. 물론 생선 시체더미 위에서 태어난 그루누이에 비하면 어거스트는 양반집 규슈나 다름없지만, 시대적으로 정상적인 환경을 누리지 못하였다는 공통점은 있는 것 같습니다.


나 불렀어~? (사뱡)


한 명은 원하는 꿈을 모두 이루었고,

다른 한 명은 무가치함을 느끼며 집시들에게 먹혀 죽는 것을 택하였습니다.


이 두 천재에게서 억지로라도 시사점을 찾아볼까 합니다. ㅎ


현대 사회는 참 많은 사람들이 그루누이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내면은 깊이 들여다보지 않은 채 사회적 통념과 외부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향수 냄새’로만 일상을 이어가는 것이죠. 그들에게 그루누이의 미래가 오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언제 어느 시점에 자신의 정체성이 모두 외부로 이사 간 것을 깨닫고, 그루누이의 눈물을 흘릴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눈을 감아보세요.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 물어보세요.

달리 원하는 것은 없는지, 내면의 외침은 무시한 채 다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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