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풀이 방어기제 <전치>
엄마는 모르면 가만히 좀 있어!
되는 일 참도 없다고 생각되던 시절. 걱정 서린 엄마의 얼굴에 대고 난데없는 짜증을 뱉었습니다. 집으로 막 들어서던 길이었어요. 취업과 연애 모두 연패 스코어를 쌓아가던, 당시의 여느 일상처럼 어두운 낯빛을 하고 말이죠. 사실 그 날은 집으로 들어서기 전에 몇 가지 사건을 더 겪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진상 손님을 만나 전에 없던 치욕감을 맛봤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얼큰히 취한 아저씨의 과녁이 됐습니다. 소심한 저는 그 장면에선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익숙한 향기와 온도를 풍기는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얼굴이 안 좋다며 걱정하는 엄마를 본 순간, 입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의 퉁명스러운 대답을 끝으로 원망이 튀어나왔습니다.
우리는 다른 어딘가에서 겪은 설움이나 분노를 가까운 누군가에게, 나를 이해해주는 혹은 만만한 이에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안부를 묻는 엄마가 답답해서, 어색하게 위로하는 아빠가 바보 같아서, 세상 편해 보이는 동생이 눈에 띄어서, 그렇게 여러 번 그들에게 화풀이를 했습니다. 돌아보면 왜 그랬을까 후회하면서도 머지않아 같은 실수를 반복하죠.
이처럼 '어떤 대상이나 사람에 대한 감정이나 갈등을 보다 덜 위협적인 대상이나 사람에게 향하게 하는 행위'를 전치(displacement, 치환)라고 합니다. 방어기제의 한 종류인데, 쉽게는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라는 속담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 <미생>을 보면, 마 부장의 사자후를 맞은 정 과장이 입을 앙 다물고 있다가 하 대리에게 짜증으로 푸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하 대리는 그런 정 과장의 어깨를 주무른다거나 옹호하며 상황을 모면합니다. 그리곤 휴게실로 안영이 인턴을 호출해서 말합니다. "야, 너 일 그 따위로 밖에 못해?" 이처럼 꼭 가족이 아니더라도 사회 속에서도 나보다 계급이 낮은 이에게 화풀이하는 장면은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뺨을 맞은 건지 화풀이를 아주 제대로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유소 습격사건>의 4인방인데요. 이 녀석들이 무슨 이유인지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다 말고 주유소를 습격하기로 결심합니다. 그 주유소의 서비스가 맘에 안 든다거나, 배신한 애인의 약혼자가 일하고 있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기름값을 너무 비싸게 받는다던가, 납득할만한 계기도 없이 말이죠. 그저 주유소는 편의점의 맞은편에 있었고 우연히 눈에 띄었다는 것만으로 습격을 결심을 합니다.
영화의 포스터 디자인과 문구만 보더라도 얼마나 긴 시간을 헤집고 올라가야 이 영화를 만날 수 있을지 느껴집니다. 1999년 개봉하여 흥행에 성공한 코믹 영화인데요. 지금은 모르는 사람들이 없는 유지태, 이성재, 김수로, 유오성, 유해진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나름의 앳된 얼굴을 하고는 등장합니다.
오래전 영화의 먼지를 털어낸 이유는, 영화 속 주인공인 노마크, 딴따라, 뻬인트, 무대포 4인의 행태가 '전치'를 꽤나 극단적이고 또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주유소를 점거한 이들은 사장을 포함하여 직원들을 모두 감금합니다. 기물파손은 물론, 직원들을 폭행하거나 괴롭히는 일도 서슴지 않죠. 심지어 주유소를 찾은 손님들한테까지 화풀이를 합니다. 정말이지 악당 중에 악당이네요.
영화는 두 가지의 요상하고 큰 줄기를 갖고 진행되는데요. 첫 번째는 '주유소를 습격한 이유'입니다. 정작 영화에서는 "그냥!"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하지만, 이유가 없다고 하기에 이들의 행태는 상당히 기이합니다. 단순한 화풀이라면 말 그대로 화를 푼 후에 이득이 될만한 것들을 챙기고 달아나면 될 텐데, 오히려 그곳에 정착을 합니다. 유니폼을 입고 손님들을 맞이한다거나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며 그곳의 일원인 것처럼 행동하죠. 두 번째는 '갈등의 해결'입니다. 그들이 습격한 시점을 계기로 주유소 주변에 일어나던 다양한 비리와 갈등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곤 그들이 본의 아니게 갈등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게 되죠. 이 악당들은 뭘 바라고 이러는 것일까요. 주유소를 습격하기 전에 겪었던 사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저마다의 '뺨 맞은 종로'를.
주인공인 '노마크, 딴따라, 뻬인트, 무대포'가 주유소 맞은 편의 편의점에 들어서기 전, 아니 그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악당 무리를 결성하기 전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야구를 하고 싶었다, 노마크
노마크. 그가 폭주 차량을 단 하나의 공으로 세운 사건은 꽤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고속 주행 중인 차량의 유리창을 그 먼 거리에서 정확히 맞췄다는 것만으로도 투수로서의 역량이 증명되는 셈이다. 애석하게도 현재의 그는 야구선수가 아니다. 고교야구 시절, 코치는 그의 천재적인 실력을 알아보지 못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당시 코치는 따로 뭔가 감사의 표시를 하는 학생들에게만 더 많은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가진 게 실력뿐인 학생들을 곱게 볼리 없었다. 노마크는 대부분의 훈련시간 동안 운동장을 뛰었다. 50바퀴를 뛰고 나면 30바퀴가 기다리고 있었다. 30바퀴를 뛰고 나면 다시 50바퀴를 뛰어야 했다. 의문이 들었다. 왜 일부 선수만 계속 운동장을 뛰는지. 코치의 답은 간단했다. 뛰기 싫으면 말아라, 너 말고도 뛰게만 해달라고 돈 보따리 들고 찾아오는 부모들 많다. 너 이 자식, 어미 아비 없는 거 티 내냐? 노마크는 황망한 기분이 들었다. 유니폼을 벗어던졌다. 그곳을 떠났다.
음악을 하고 싶었다, 딴따라
딴따라의 지독한 음악 사랑은 그들 무리에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잠시라도 음악을 듣지 않으면 그는 긴 머리를 흔들거나 호흡을 거칠 게 뱉으며 불안해한다. 잘 모르는 누군가에게 이어폰과 MP3를 빌려달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그마저 없을 땐 주변에 노래를 불러달라고 한다. 그에게 있어 시간이란 '음악을 듣지 못하는 시간'과 '음악을 듣는 시간'으로 나뉠 뿐이다. 다만, 좋아하는 만큼 실력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락커로써 음악인생이 그리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다. 연주의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공연장의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엔 각지고 어둑한 무리들이 서있었다. 돈이 있었다면 만날 일 없었을 자들. 음악도 계속했을 것이다. 그들은 딴따라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마지막 공연의 기억이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빼인트
그리는 행위의 제한을 둔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빼인트에게 있어 누드화는 인간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었다. 그는 진지하게 그림에 임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덕에 어렵지 않게 그 꿈을 이어갈 수 있었다. 문제는 아버지가 그의 꿈을 응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날, 아버지는 폭발했다. 빼인트가 그린 그림을 모두 찢거나 부쉈다. 그의 머리 위로 캔버스를 겹겹이 끼우며 찢어발겼다. 공부나 하라고 절규했다. 그림이 그리고 싶다고 답했다. 머리 위에서 또 하나의 작품이 찢어졌다. 어머니는 오열했다. 집을 나왔다.
이유 없이 대가리만 박았다, 무대포
깊게 파인 눈과 뭉툭한 콧날, 타고난 골격과 넘치는 힘. 교내에서 그를 쉬이 대할 수 있는 학생은 없었다. 껄렁패 몇이 그를 도발하다가 체면을 구긴 적이 있다. 그에게 멱살 잡혔던 그 '한 놈'은 결국 살려달라며 목숨을 구걸해야 했다. 그렇게 '무대포'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하지만 별명과는 반대로 그는 타인을 배려하는 순수한 학생이었다. 외모 탓에 주변이 그를 오해할 뿐. 그의 학교 일과 대부분은 고요한 운동장에서 '대가리를 박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그의 항변을 들어주지 않았다. 너 같이 무식하고 힘만 센 놈은 공부할 자격도 없어. 억울해하면 할수록 선생님은 더 차분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대가리, 박아.
따지고 보면 그들이 원하는 건 참 명확합니다. 양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 믿고 격려하는 부모의 사랑, 선입견 없이 가르치는 선생과 학교였죠. 영화 말미에 주유소를 빠져나가던 노마크가 가족사진을 꺼내보는 장면은 이를 잘 나타냅니다. 그들은 사회적인 약자였습니다. 서로를 알아보고 다시 뭉치면서 다른 장면의 강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주유소의 강자.
'전치'는 누군가에 대한 감정을 좀 더 안전한 다른 대상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마음의 고통을 해결하는 방어기제입니다. 그런데 본래의 대상과 전치 대상 간에는 어느 정도의 유사성이 있어야 합니다. 부장님에게 느꼈던 불만을 아무 말없는 바위에게 쏟아내긴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부장님이 그려진 샌드백이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타이슨의 주먹을 갖게 되죠. 영화 속 4인방 역시 '고지식한 어른의 모습, 깔보는 태도 등' 자신의 과거 상황과 유사한 장면을 겪을 때 크게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주인공들은 가족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주유소 사장, 얌체짓을 일삼는 순경, 갑질 손님, 위아래를 가리려는 껄렁패, 상인들을 착취하는 건달 등을 한 자리에 엉켜 놓고는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갑니다. 사회적 약자의 꽤나 통쾌한 일침을 날리는 것처럼, 영화는 표현합니다.
문제는 그 과정 자체가 사실상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방법이라는데 있습니다. 사유지를 점거하고, 기물파손, 납치, 감금, 폭력, 성희롱 등 죄목으로 따지자면 끝이 없죠. 전치의 역기능입니다. 전화 상담원에게 폭언을 하는 고객, 사장 나오라며 고성을 지르는 진상 손님 등 일상적인 장면부터, 묻지 마 범죄, 성폭력 등 강력 범죄까지, 자신보다 약한 대상에게 고통을 해소하려는 전치의 역기능은 주변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은 지속할 수도 없고 지속해서도 안됩니다. 언젠가는 대중의 눈에 의해, 법에 의해 통로가 막히니까요. 지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종로에서 뺨 맞았을 땐?
마냥 참고 살기엔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종로에서 뺨 맞았을 때 한강에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전치는 사실 순기능이 더 많은 방어기제입니다. 안전한 상황에서 안전한 방법을 통해 본래 대상에 대한 고통을 해소한다면 말이죠. 이를 위해서는 앞서 언급했던 '본래 대상과 전치 대상 간 유사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심리치료 방법 중 하나인 '역할 놀이'에서는 상담자가 갈등의 대상이 되어 그와 유사한 주제와 말투를 연기하고 내담자는 그 대상(상담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쏟아내곤 하는데, 이 역시 전치의 순기능 과정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꼭 전문 치료가 아니더라도 가능합니다. 가족, 친구, 애인이 있으니까요. 물론 글 서두의 제 경험처럼 무작정 가슴을 후벼 파는 건 당시의 대상에게나 나중에 돌아본 나 자신에게나 상처로 남는 것 같습니다. 좀 더 부드럽고 안전한 방법이 필요한데요. '내가 오늘 이런 일을 겪었고 지금 너에게 화풀이하겠다'라고 미리 알리는 것입니다. 상대가 대비할 수 있게.
상대가 그 제안을 받아주겠냐고요? 물론이죠. 나 역시 상대의 전치 대상이 되어준다면 말이죠. 사실, 심기 불편해 보이는 친구의 누군가에 대해 험담을 차분히 들어주는 것도 이런 역할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런 방식을 좀 더 발전시키면 역할놀이가 가능합니다. 남친의 노답 부장님이 되어, 여친의 얌체 선배가 되어, 어머니의 무심한 남편이 되어, 마치 그들처럼 연기해보는 거예요. 부장님께, 얌체 선배에게, 웬수 같은 남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겁니다. 전치의 순기능적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엔 어색하겠지만 점차 연기력(?)도 늘고 나름 재미도 있습니다.
(어감이 좀 이상하지만) 매월 '전치의 날'을 정해서 그 날은 서로의 전치 대상이 되어 주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