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헤치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모으고 모아 힘을 힘을 있는 대로 주고 쓰는 글이 있는가 하면, 오늘따라 물 고인 웅덩이가 밟고 싶어 게슴츠레 발을 뻗듯 그저 그렇게 시작되는 글이 있습니다. <소심해서 좋다>는 후자였습니다. 푹신한 소파에 몸 담그고 꾸움뻑 단잠을 청했더니, 글이 쓰여 있었어요. 제 이야기라서 그런가 봅니다.
출간 후 몇 개월이 지나고서야 꽤 긴 시간을 거쳐 이곳에 다다랐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된 걸까요.
1. 브런치를 만나다.
사실 막연히 '글과 관련된' 무언가를 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하려는 대단한 계획이나 엄두는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브런치라는 서비스가 새로 나왔는데, 네가 해보면 좋을 것 같아."
친구의 소개로 처음 이곳 <브런치>에 발을, 아니 손가락을 디뎠던 기억이 납니다. 여기도 하얗고 저기고 하얗고, 글을 효과적으로 쓰고 보는 것 외의 어떤 겉멋도 없는 이곳이 참 좋았어요. 글을 쓰기 위한 편집 도구들 역시 그랬죠. 겉보기엔 심플하고 간단해 보이지만 그 단순함을 편리와 연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지 보였습니다. 저 역시 기획자이기에, 이곳의 치밀하고 치열했던 지난 시간이 느껴졌어요. (니 피 땀 눈~물) 그렇게 뭔가에 홀린 듯 어설픈 첫 문장을 흘렸습니다. “하나보다 둘이 나은 이유.”
지금 읽어보면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을 만큼 어설프기 그지없지만, 그 첫 글은 url 끝에 당당하게 "1"이 박혀있는, 화석급의 대선배나 다름없답니다. (https://brunch.co.kr/@symriro/1) 선배가 거칠게 지난 길을 후배 글들이 따르며 잔가지도 치고 평평하게 다져갔어요.
2. 이 많은 구독자는 어디서 왔나.
개인적으로 브런치의 콘텐츠 공유나 추천 알고리즘이 정말 잘 돼있는 것 같아요. 여타 플랫폼과는 달리, 새로 유입되는 인원이 그곳을 선점한 공룡 유저들의 텃새에 가려지는 일이 적습니다. 내가 쓰는 것을 좋아하고 그 글이 나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취향 맞는 독자들이 자연스레 유입될 수 있는 구조예요. 감히 글짓기 플랫폼계의 유튜브다, 라고 말하고 싶네요. (브런치에서 선물 받은 거 없습니다...ㅎ)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 차려보니 제 길 주변에 꽤 많은 사람이 모여있더라고요. 그들은 다져놓은 땅을 같이 밟아보기도 하고, 깎아 놓은 나뭇잎의 모양을 살펴봤어요. 나만의 공간이었던 나무 그늘에 누워 낮잠 한 숨 때리는 사람, 길가 벤치에 앉아 골똘히 뭔가 생각 중인 남성, 지려밟고 가라며 길 가운데 홀로 핀 꽃 앞에서 망설이는 여성, 그렇게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제 길을 지나치지 않고 곳곳을 향유하며 공감해주었어요. 칭찬하고 응원해줬죠. 정말 고마운 분들입니다. 비록 오가는 이 늘어갈수록 그곳을 다지는 제 마음은 더 무거워졌지만, 멈추지 않았어요. 아니 멈출 수가 없었죠. 너무 재밌었으니까.
3. 암호를 만들어보자.
당시 제 글들은 더 좋은 길을 만드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우연히 발이 닿아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 그중 되도록 많은 이들에게 좋은 정보나 공감을 줄 수 있는 이야기.
업무적으로 완전히 소진된 날이었습니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배터리가 텅 소리를 내며 방전이 되어버렸죠. 그리곤 생각했습니다. 아, 이거, 내 앞에 서있는 이 사람은 아무리 나를 설명하려고 해도 모르겠구나. 나 같은 사람들만 알아볼 수 있는 일종의 암호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다.
마음을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심해서 좋다>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길 곳곳에 작은 암호를 남겨놓기 시작했어요. 그곳을 지나던 소심이가 보면, 어머 누가 내 일기장을 여기에 갖다 놨지, 싶을 만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 말이죠. 신기한 게, 다른 글들처럼 뇌를 쥐어짜거나 탈수기에 넣고 탈탈 돌리지 않아도 자연스레 문장이 흘러나왔어요. 더 신기하게도, 그 후로, 전과는 또 다른 모양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어요. 소심한 사람들. 세상에나.
4. 고래가 고래를 만난 날
제가 고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물속에 사는 다른 어류들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고래는 포유류. 인간과 참 비슷해요. 물속에서 숨을 못 쉽니다. 그럼에도 물속에 살고 바다 깊은 곳을 유영해요. 오직 고래만이 지구에서 가장 깊은 바다의 비밀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고래는 알이 아닌 새끼를 잉태하고 낳은 후 젖을 먹여 키웁니다. 새끼 역시 당연히 물속에서 숨을 못 쉬겠죠. 따라서 태어나자마자 수면으로 내달리는데 힘이 달리면 어미고래가 뒤에서 밀어준답니다. 거참 스웩 쩌는 녀석들 아닌가요.
무엇보다 좋은 건 이들의 겸손함입니다. 덩치는 현존 동물 중에 제일 큰데, 상어와 다르죠. 포악하지 않고 오히려 바다 생태계의 균형을 조절해요. (<포뇨>에 나온 '그랑망마레'는 분명 고래일 거예요!) 인간을 도왔다는 전례도 어찌나 많은지. 이마의 모양도 예술이에요. 수면 위 꼬리 모양도 러블리 그 자체! 아, 슬슬 고양되고 있네요. 진정진정.
포뇨의 엄마 '그랑망마레'
어쨌거나 그게 무엇이던 고래와 관련된 것을 보면 한 번 더 보는 버릇이 있어요. 고래를 주제로 내세웠을 그 조직이나 개인에 관심이 갑니다. 그래서인지, 웨일북(Whale books)을 처음 봤을 때 생각했어요. 언젠가, 나는, 이 출판사로, 가리다.
whale : 고래
그리고 갔습니다. 그곳으로.
'위클리 매거진'에 선정이 됐고, 제 책을 희망하던 출판사 중에 거짓말처럼 그곳이 있었어요. 반갑다. 고래야.
5. 생각의 덩어리가 수 놓이는 과정
예상대로 웨일북은 좋은 출판사였습니다. 숨을 참고 해저 이만리를 누빌 것 같은 강려크한 한 방, 그리고 책을 재화가 아닌 사람의 일부로 보는 듯한 온기가 느껴졌어요. 처음 에디터님의 연락을 받을 때 어찌나 긴장했던지. 그녀는 책의 방향과 강점, 전반적인 흐름, 목차 등에 대한 첫 미팅을 하자고 했습니다. 미팅 전에 미리 그런 부분을 고민해보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어요. 고민이라니, 성격상 고민만 할 수는 없었죠. 작가 왕고래가 아닌, 기획자 아무개가 등장하여 공을 들이며 기획안을 작성했습니다.
당시 이미 책의 60~70% 양에 해당하는 글을 써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팅은 어렵지 않게 흘러갔습니다. 글 뭉치가 책으로 변태 하기 위해 필요한 많은 조언도 받았습니다. 작가가 원하는 글의 나열이 아닌 누군가 손을 뻗어 집을 수 있는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우리가 다소 갈등을 겪게 될 수도 있다,라고도 말씀하시더라고요. 겁이 났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알겠더라고요. 더 나은 결과를 위한 관점이었다는 것을. 물론 갈등도 없었습니다.
그다음은 비슷한 장면의 연속입니다. <사랑의 블랙홀> 주인공이 무한히 하루를 반복하는 장면처럼 말이죠. 정해진 뼈대에 따라 살을 붙이고, 목차를 조정하고, 글을 수정하고, 보내고, 피드백받고, 다시 붙이고, 수정, 보내고, 받고, 붙, 수, 붙, 수, 보, 받, 보, 받. 개인적으로 출판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그곳이 더 이상 제 일기장이 아니라는 느낌이었어요. 내가 쓰고 싶은 글만이 아닌, 독자가 전반적으로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을 구성하는 것.
'붙수보받'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쯤 책의 디자인 시안을 받았습니다. 희멀건 녀석이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이미지였죠. 아니 이건... 정말이지, 나잖아! 어쩜 그렇게 표현을 잘 하시는지, 디자이너 김지안 님께도 참 감사했습니다.
교정본과 디자인 시안들을 확인, 의논, 컨펌하는 과정들을 여러 번 거친 후에 저의 임무는 끝이 났습니다. 초보 작가인 제가 쏟아붓는 질문 공세에 하나하나 상세히 답변해주시고, 모르던 부분까지 꼼꼼하게 챙겨주시는 모습에 감동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웨일북, 자네 참...) 이제 결과물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6.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그 녀석
서점에 책이 처음 놓이던 날입니다. 어깨 빠방한 책들 사이에서 식은땀 흘리고 있던 파란 색의 그 녀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서로를 발견하곤 앞다퉈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냥 못본 척 하고 지나가줘..." / "으, 응..."
"그냥 가라니까!" / "으, 응!"
당시 날씨가 살인적으로 더웠기 때문에, 서점의 냉골에 기대 시간을 좀 보냈습니다. (절대, 저얼대 누가 집어가나 관찰한 게 아니고요.) 이상하게도, 실감이 잘 안 나서인지 그때는 참 담담했어요. 글을 썼구나, 기회가 닿았구나, 책이 나왔구나. 오히려 몇 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날이 떠오르며 실감이 납니다. 글을 쓰다니, 기회를 얻다니, 책을 내다니.
+ 글을 쓴다는 것
브런치에 어설픈 첫 문장을 흘리고 나서, 의도하던 하지 않았던 제 인생은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글을 계속 써야 하는, 쓰고 싶어 지는 밍분(명분)이 생겼다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주변에 '글을 쓰라'고 자주 얘기하는 편입니다. 그것은 보고 읽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으니까요. 마치 나 모르게 누군가 찍어 놓은 사진처럼,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애써 부인하고 있던 것들을 차곡차곡 직면하기도 하죠.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나라는 것을 가장 또렷하게 느낄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누구와도 같지 않은 나입니다.
성공이나 실패 수기, 그냥 오늘 겪은 일, 10년 뒤 오늘 겪을 일, 지금 가장 걱정되는 일, 해결하기 위한 조건들, 기대되는 일, 노래 가사, 나를 대입한 소설, 싫어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지구상에 딱 한 명만 존재할 것 같은 유별난 사람, 전공의 장단점, 내 직업의 겉과 속 , 후배가 우리 회사로 취업한다고 했을 때 전하고 싶은 말, 인생의 목표, 남들에겐 사소하지만 나에겐 대단했던 성과, 영화나 책의 감상평, 이번 달 최고의 음식에 대한 묘사, 내 방에 있는 소중한 물건 세 가지, 엄마가 내 엄마이어야 하는 이유, 좋아하는 단어의 나열, 끝말잇기, 무엇이든 좋습니다. 글을 써보세요.
+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자, 그래서 저는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걸까요. 생각해봤더니 참 심플한 결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길에 들러주신 많은 분들, 지금도 귓전의 가을바람 느끼며 머물고 계신 분들, 인연을 늘려주신 구독자님들, 화면 끝자락까지 엄지를 늘려 하트 꾹 눌러주시는 천사님들, 댓글로 마음 담아주시는 은사님들, 고맙습니다.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정말 많은 걸 받았어요. 더 좋은 글로 돌려드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왕고래 드림
왕고래입니다. 심리학을 전공했고 소심합니다. 사람에 대한 글을 씁니다. <소심해서 좋다>, <심리로 봉다방>을 썼습니다. 어릴 적, 꿈을 적는 공간에 '좋은 기분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아직 변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