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
우연히 학창 시절 일기장을 펼쳤습니다. 하...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걸 간신히 견뎌가며 당시의 참담했던 중2병 스웩을 훑어가고 있었는데요. 문득 흥미로운 문구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미래의 나는 보아라."
이어진 내용은 '절대 이런 부모가 되지 말라'는 것이었죠. 당시의 기억, 아니 기억이라 하기엔 너무 희미한 안개를 뭉치며 왜 그런 글을 썼는지 추론해봤는데요. 요는 이렇습니다. 당시의 저는 친구 집에 너무 놀러 가고 싶었고 부모님께서 허락을 하지 않으셨어요. 꼭 가야 했던 일이 있었나 본데 결국 가지 못한 것이죠.
그렇게 방에 틀어박혀서는 주먹을 단단히 움키며 미래의 나에게 엄중한 경고를 합니다. 이 정도로 원하는 걸 못하게 하면, 심지어 그걸로 이렇게 혼내기까지 하면, 결국 사람은 삐뚤어져버릴 거라고. 이렇게나 엄청나게! 화가 나게 될 거라고. 그러니 잊지 말라는, 당시의 분노와 원망이 상세하게도 기술된 서신은 결국 시공간을 넘어 지금의 저에게 전해졌습니다.
글쎄... 답신을 쓰자면 이렇습니다.
나는 당시의 부모님을 이해하게 되었다. 만약 너 같은 자식이 스스로 했던 약속도 어기고 '이번 한 번만 제발 한 번 만' 하면서 똑같은 상황을 되풀이하는 걸 보고 있으면 지금의 나는 당시 부모님보다 더 크게 화를 내버릴지도 모르겠다.
서운한가?
어쩌겠어. 결국 나 역시 내가 수십 년 간 봐온 두 분의 근처 어딘가 쯤의 사람이 되었는데.
'동일시'는 제 답신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이유를 잘 설명하는 방어기제입니다.
동일시(identification): 자신에게 주요한 인물의 태도나 행동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여 닮아가는 것
동일시의 대상은 부모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소꿉놀이를 하며 그들을 흉내 내곤 했잖아요?
그런데 이는 단순히 '모방'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방은 스스로 닮고 싶은 대상에서 비롯되는 반면, 동일시는 반드시 닮으려는 의지에 기반하지 않기 때문이죠. 점차 머리가 크고 세상 모든 가치들이 다르게 느껴지는 사춘기가 되면 내가 늘 동일시하던 존재들에게서 닮고 싶지 않은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적대적 동일시(hostile identification)는 닮고 싶지 않던 모습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말이 되나 싶은데, 의외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어요. 괴팍한 상사 밑에서 이를 악물고 버텼던 누군가는 동일한 위치가 되어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자신의 상황들을 다루곤 하죠. 내가 알던 선한 직원이 직급이 오르며 점차 변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진 않나요. 혹은 내가 지금 그렇지는 않은지.
영화 <4등>에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나오는데요. 선수 시절 감독의 매질에 참지 못하고 운동을 포기한 광수는 자신의 학생인 준호를 매로 다스리며 말합니다. "이럴 때 잡아주고 때려주는 선생이 진짜다." 준호 역시 코치의 폭력이 무서워 운동을 관두기까지 하지만, 자신의 동생이 사소한 잘못을 하자 막대를 하나 집어 들곤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죠. "몇 대 맞을래?"
그래도 이들의 사례는 <대부>에 나오는 콜레오네 집안사람들에 비하면 뭐, 이해도 되고 귀여운 편이랍니다.
영화 <대부>는 영화는 마피아 조직을 이끄는 콜레오네 패밀리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조차 OST인 'The Godfather'를 듣는다면 '어? 이거...'라고 반응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영화의 명성과 내용은 뒤로 하고, 그 가족의 모습을 살펴보자고요.
아버지인 '비토 콜레오네'는 마피아 조직의 창시자이며, 가장 중요한 존재는 가족입니다. 그에게 '가족'은 좁게는 피가 섞인 사람들, 넓게는 그와 공존하며 협조하는 모든 관련자를 의미해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살인도 마다하지 않으며, 때에 따라서는 해야 할 살인을 안 하기도(?) 하죠. 가족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은 모두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그 모습은 각기 다릅니다. 첫째 '소니'는 불같은 성격을 지녔으며 주변인을 건드리면 그게 누구든 가만 두지 않습니다. 가족에 대한 진심은 아버지를 빼닮았지만 침착하지 못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의 아들이 맞나 싶어요. 한 번은 (자신의 여동생을 때린) 처남을 길 한가운데에서 쥐 잡듯이 패는데, 그 분노는 이해하지만 가족 전체에겐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진심만 앞서는 모습 때문에 화를 당하니 참 안타까운 맏이입니다.
둘째 '프레도'는 철딱서니가 없습니다. 놀기 좋아하고 정작 나서야 할 때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니 가업에 도움을 주기엔 부족해 보여요. 그럼에도 야망은 있고 인정에도 목말라있죠. 하지만 아버지는 프레도를 사랑할지언정 신임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프레도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말을 이으려다가는 이내 아끼고 말죠. "Fredo, well... Fredo was well..." 아버지는 둘째에 대한 모진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별종은 막내인 '마이클'입니다. 그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위해 해병대에 지원했습니다. 여동생의 결혼식에서도 콜레오네 무리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요. 자신의 애인에게 아버지의 사업방식을 소개하며 자신은 다른 사람이라고 선을 긋는 장면은 그의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2명의 양아들과 1명의 딸을 포함하여 총 6명의 자식들 중에 유일하게 아버지와 가업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상대 조직으로부터 피습을 당하자 오히려 마이클이 나서서 복수를 계획하고, 관련자들을 한 자리에 모은 후 머리에 방아쇠를 당깁니다. 대학생이었고, 인생 첫 살인이었죠. 그 과정에서 애인과도 멀어졌습니다.
<대부 2>에는 아버지인 비토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미국에서 큰 성공을 이룬 뒤 시칠리아로 돌아가 (이제는 너무 늙어버린) 조직 보스 '돈 치치'에게 가족의 복수를 해요. 자,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아버지로부터 가장 멀어지려 했던 아들 마이클은 아버지와 가장 근접한 방법인 살인으로 문제를 해결한 셈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난다?
콜레오네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위의 속담이 떠오릅니다. 말 그대로 콩을 심었으니 콩이 난 셈이죠. 우리는 이전 세대 일부를 선택하고 복붙하는 과정을 거쳐 지금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분명 잘 선택했던 것 같은데 왜 원치 않던 모습들도 복사가 되었을까요.
동일시는 (적대적 동일시를 포함하여) 성격과 형성에 발달에 있어 주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중요한 대상이 부정적인 감정이나 불안을 느끼게 했을 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상대와 동일한 위치를 점하여 그 불안을 해소하게 됩니다. 내가 싫어했던 누군가의 모습은 그렇게 나의 일부가 된 셈이죠. 필요한 과정이었고, 콩은 자라났습니다.
하지만 자라난 콩들의 모양이 모두 같은 건 아니에요. 콜레오네의 자식들이 각자 다른 모습을 갖게 된 것처럼 말이죠. 알코올 중독 부모에게서 자란 자녀는 같은 중독 증상을 보일 확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 중요한 점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닮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거의 기억을 계기 삼아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누군가는 자라난 콩을 두었고, 누군가는 뽑았습니다.
뽑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것이 내가 원치 않았던 모습인지 알아채기만 하면 돼요. 쉬운 얘기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어요. 이제 와서 그런 것들을 따져보기 귀찮기 때문이죠. 심지어 어떤 행동은 지금의 나에겐 너무 편리한 도구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알아채야만 잘 뽑을 수 있고, 잘 뽑아야 채 자라지 못한 좋은 콩들을 효과적으로 남길 수 있습니다.
마이클은 아버지를 이어 조직의 대부가 되지만 그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고, 확장하며 얻게 된 사람들을 새로운 가족으로 여겼습니다. 지켜야 할 사람들이 늘었고 많은 변수를 고려해야 했어요. 그 과정에서 해를 입었지만 그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반면 마이클의 우선순위는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겐 조직의 존폐에 대한 적과 동지만이 있어요. 가족이라도 조직에 해가 된다는 걸 알면 예외를 두지 않았습니다. 마이클은 아버지로부터 가장 닮고 싶지 않던 모습을 닮게 되었고, 가장 닮아야 할 모습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가 동일시의 개념을 알고 스스로를 돌아봤다면 그 결과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답신의 마무리는 이렇습니다.
당시 너의 심경에 공감하지 못하는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난 결국 네가 미워하던 그 어떤 사람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이 편지로 인해 네가 남긴 콩밭을 한 번 더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름 좋은 것들도 남더라. 그 시절에 네가 부단히 노력해준 덕이다. 고맙다.
너는 성공적으로 이곳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