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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Aug 09. 2020

일어나지 않지만 존재하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그녀는 15A 좌석을, 나는 15B를 배정받았다.
우리가 12월의 어느 아침에 영국 해협을 날아가는 브리티시 항공 보잉 767기에서 옆자리에 앉을 확률은 989.727 분의 1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1종 오류'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 기각시킨 가설이 현실로 일어나는 상황을 뜻하는 심리통계 용어예요. 처음 이 개념을 배울 때 '그 정도의 낮은 확률이 일어날 수 있나? 그렇다 한들 큰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로또 당첨의 예를 들으니 대번에 이해가 되더라고요. 나에겐 일어나지 않는 일. 하지만 매주 토요일 분명하게 발생하고 있는 대사건!


인연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확률이 989.727 분의 1이라니... 길었던 고독의 시간, 그 억울함이 눈 녹듯 사라지네요. 더군다나 어렵사리 발생한 인연을 이어 서로 죽고 못 사는 (혹은 못 죽여서 사는) 연인까지 발전한다는 건 로또 당첨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꽤 많은 사람이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브리티시 항공 보잉 767기에서의 확률은 로또의 그것과 조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발생하기 어려운 건 알겠는데, 이 낮은 가능성이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외모나 노력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언젠간 주어지겠네. 애타게 기다린다고 빨리 오지 않아! 라고 생각했었죠. (이게 그 정신승리라는 건가..)


어디쯤... 오셨지..? (그렇게 희망회로는 가동됐다)


따져보면 의아한 일입니다. 똑같이 낮은 확률인데 로또 당첨은 있을 수 없고, 인연은 언젠가 생길 거라고 착각을 했다는 점이요.


보잉 767기의 옆자리에는 색깔도 모양도 똑같은 다른 좌석들이 있었습니다. 맥락의 고유함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낮은 확률이라도 동일한 옆자리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죠. 이처럼 이야기는 같은 우연이라도 그 고유성을 잘 구성해야 로또 당첨과 같은 기적의 순간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선남선녀가 정해진 통로 위를 걷는 듯한 스토리보다 '김씨표류기, 오아시스, 만추'처럼 유별난 상황 틈에서 어긋나며 발생하는 로맨스가 저에게 더 오래 남아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서로 다른 영화인데, 가슴 어딘가 같은 부위가 꾹- 눌리는 느낌이랄까요.


자, 그러면 유별나고 고유한 상황을 한 번 설정해보겠습니다.


1. 미친 사람이 두 명 있습니다. 한 명은 남자고 한 명은 여자예요.


2. "제 인생의 먹구름 다 걷어내고 햇살이 비추게 할 거예요." 희망찬 외침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남자.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색 쓰레기 봉지를 뒤집어쓰고 조깅을 합니다. 그날 밤늦게까지 심각하게 독서를 하다가 이내 책을 창밖으로 던져버립니다. 닫혀있던 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나죠. 큰 소리에 깨어난 부모님에게 분노를 쏟아냅니다. 어제는 그가 8개월 만에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날입니다.



3. 여자도 만만치 않습니다. 언니가 초대한 손님 앞에서 갑자기 집에 간다며 깽판을 놓는가 하면 식당에서도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면 괴기스러운 비명을 지르죠. 아까 그 미친 남자의 조깅코스에 뛰어들어서는 정신병자라며 막말을 하고 침을 뱉습니다. 아내를 향한 남자의 맹목적인 진심을 비웃습니다. 그러면서도 조깅만 하면 나타나서 부지런히 소리를 질러요.


"너 방금 뭐라 했냐?" (변신 5초 전...)


4. 남자는 아내에 대한 접근금지 명령을 받은 상태입니다. 조금만 수상한 행동을 해도 집으로 경찰관이 들이닥치죠. 조깅을 방해했던 여자가 아내와 건너 지인이라는 걸 알고 그녀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아내에게 편지를 전하는 수단으로 말이죠.


5. 세상에 공짜가 있나요. 여자는 화를 내거나 누군가의 뺨을 때리거나 성난 표정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 때 외에는 춤을 춥니다. 댄스대회를 준비 중이거든요. 마침 파트너가 필요하던 차, 편지를 전해주는 조건을 걸죠. 조깅할 때 외에는 팔다리 조차 몇 번 흔들어본 적 없는 이 남자에게 댄스 대회에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꼭 해야 되는 거지?" / "어."


6. 실버라이닝(siver linings)은 어두웠던 날이 갤 때 구름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한 줄기 빛을 의미합니다. 남자의 입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이기도 하죠. 여자는 말합니다. 그런 미친 희망 따위 개나 주라고.


7. 두 남녀는 상대가 자신보다 더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연인이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희망(silver linings)을 찾는 작전(play book)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로맨스 코미디 영화라는 걸 알리 듯 초장부터 벼랑 끝에 선 남녀가 정신을 쏙 빼놓는데요. 이들이 희망을 찾아가는 수순이 참 특이합니다. 인연은 생겼는데 막상 마음을 모으려니 서로의 목적이 다르고, 심지어 한 사람의 목적을 이루려면 다른 이가 포기를 해야 합니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전투 속에서 웃픈 사건들만 반복될 뿐이죠.


그런데 다소 우스꽝스럽게 표현되는 이 과정은 사실 생존 그 자체였습니다. 남자에겐 편지를 아내에게 전하는 것만이 녹아내린 삶을 되돌리는 유일한 길이었어요. 여자에겐 춤을 추는 게 숨을 내뱉고 마실 수 있는 단 하나의 출구입니다. 아무도 없는 절벽 끝에서 만난 두 사람에게 '희망'이란 좋게 좋게 이룰 수 있는 보너스 게임이 아니었죠. 상대를 이용할 때는 작정해서 미쳐야 했고, 그만큼 모든 상황에 전심을 다했습니다.


8. 그런데 빛줄기를 완전히 뒤덮어버리는 최악의 상황들을 만나요. 예상보다도 더 큰 아픔이 남아있었다는 걸 깨닫죠. 결국 상대마저 자신을 이용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챈 바로 그 순간, 모든 걸 품어내는 진심이 드러납니다. 터져 나오던 불기둥을 일순간 거꾸로 되돌린 것 같은 고요하고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가슴속 그곳을 꾸욱 누르는, 1종 오류의 순간.



얼마 전 지인들과 기억에 남는 로맨스 영화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회심의 일격으로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내질러봤지만 아무 반응이 없더군요. 심지어 본 사람조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글의 흐름을 부지런히 그렸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씩씩거리며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책장에서 알랭 드 보통의 책도 꺼냈어요. 분개하며 키판을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이토록 사소한 우연에서 비롯된 글이네요.


하지만 글을 읽은 당신이 이 영화를 본다면 그 우연은 더 면밀한 확률로 들어서게 됩니다. 인연이 연인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너무 대놓고 추천하는 것 같지만 속아주세요. 혹시 알아요? 1종 오류를 겪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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