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밤새 생긴 까치둥지를 진정시키기 위해 머리에 물을 묻혔습니다. 어, 그런데 손이 미끌거리더라고요. 잠이 덜 깼나 싶었는데 점차 그것이 비누 거품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불현듯 지난밤이 떠올랐어요. 트리트먼트를 바르고... 헹궜던가? 머리를 다시 감으며 생각했습니다. 쉴 때가 됐구나.
익숙한 무언가에 균열이 생기는 건 내면에서 보내는 일종의 위험 신호와도 같습니다. 그 신호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단순한 행동부터 인생 자체가 바뀌는 경험까지 나타날 수 있어요. 영화 <머시니트스>의 '트레버'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음산한 낯빛으로 등장하는 트레버는 1년째 잠에 들지 못하고 있는 기계공입니다. 잠에 들면 이유를 알 수 없는 악몽에 시달리죠. 심각하게 말라버린 몸을 보고 있자면 그가 살아있을지언정 사는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영화는 그의 불안정한 일상과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을 교차시키며 긴장감을 이어가는데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과거가 없는 삶
놀랍게도 트레버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지난 1년간 이 생활을 했지만 그전에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모르죠. 공장의 다른 직원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현재 직업과는 관련 없는 전문 지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곤 합니다. 심지어 예전 사진을 보면 상당히 건강한 체격이었습니다.
"더 마르다간 보이지도 않겠어요."
주변인들은 그를 걱정합니다. 그런데 정작 답답한 건 당사자입니다. 어렵사리 하루하루 살아가고는 있는데 딱히 왜 그런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뭐야... 왜케 피곤해..
무슨 일이 있었길래
1년 전, 트레버의 부주의로 인해 어린 소년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이 나쁜 자식이 뺑소니를 쳤어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사건은 트레버에게도 큰 정신적 충격이었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떠납니다. 다른 지역에서 공장으로 들어가 일용직을 구하고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죠. 그에 대한 기록은 집을 떠나기 전 그곳에 멈춰있습니다.
언뜻 보면 그가 자신의 잘못을 세탁하기 위해 새로운 삶을 선택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이전의 삶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볼 때 그는 '해리성 둔주'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해리성 장애(解離性 障碍 , dissociative disorders)는 평상시 통합되어 있던 개인의 기억, 의식, 정체성 등이 붕괴되는 정신장애입니다. 그 종류로는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해리성 기억상실(= 기억상실증)', 영화의 소재로 자주 활용되는 '해리성 정체 장애(= 다중 인격)', 그리고 해리성 둔주가 있어요. 이중 해리성 둔주의 특징은 과거와 정체성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 채, 본래의 삶을 떠나 기약 없는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 '여행'이 참 놀라운데요. 말이 여행이지, 하루아침에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삶을 사는 셈입니다. 심지어 그 기간이 짧게는 몇 시간에서부터 길게는 수년간 이어질 수도 있어요. 흔히 알고 있는 '기억 상실증'과 다른 점은 이들이 자신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크게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정체감 관련 기억을 제외한 상황판단력은 정상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른 정신 문제에 비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수월한 편이죠. 실제로 사라진 남편을 오랜 시간 후 발견했는데 아내를 기억하지 못했으며, 다른 지역에서 다른 아내와 가족들을 이끄는 가장이 된 사례도 있습니다. (거짓말 탐지기 정도는 해본 거겠지...?)
자신을 잃어갈 때
증상으로만 보면 뭔가 속편해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느 날 트레버의 공장으로 '이반'이라는 사내가 나타나 동료의 팔을 다치게 하는 사고를 저지르는데요. 동료들은 그것이 트레버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결백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죠. 곳곳에서 이반의 흔적이 발견되지만 주변 사람들은 한결 같이 말합니다. "이반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
안녕? 이반이라고 해.
이반은 트레버에게서 발현된 죄의식입니다.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것들은 외부로 나오려는 성질이 있는데 이 경우 환시(쉽게 말해 허깨비)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죠. 이따금 이반의 손이 매우 일그러져 있곤 하는데 그 존재가 죄의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손은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하는 가장 능동적인 신체 일부니까요.
자신의 문제를 모른 채 살아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트레버 역시 2시간의 러닝 타임 내내 참 갖가지 고통스러운 모습들을 보이는데요. 잠 한 숨 이루지 못하고 점차 시들어가는가 하면 소중한 친구이자 연인인 스티비를 잃게 됩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난 네가 누군지 알아'라며 1년 전 자신과 다시 만나는 장면은 처참하기 그지없습니다. 영화의 제목이자 트레버의 직업으로 나오는 단어 '머시니스트(machinist)'에서 알 수 있듯, 자신을 잃고 살아가는 삶은 마치 기계처럼 메마르고 영혼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난 네가 누군지 알아...
알아채야 할 때
뺑소니범의 기약 없는 삶을 통해 굳이 해리성 둔주를 다룬 속내가 있습니다. 나쁜 짓을 하면 고달프다, 라는 뻔한 사실보다는 '인간이 어떻게 설계되었는가'에 대한 진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죠. 해리성 둔주는 앞서 <아이언맨>에서 소개해드렸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서 비롯되는 문제 중 하나입니다. 인간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봤을 때, 감당할 수 없는 극심한 스트레스는 주변의 정상적인 맥락을 파괴시키고 극단적인 경우 그 삶에서 조차 탈출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글의 초반에 언급했던 제 경험은 사실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어요. 찌들어 가는 삶으로 인해 심신은 못 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는데, 정작 주인 놈은 모른 척하며 똑같은 하루를 출발하고 있을 때 말이죠. 핸드폰을 든 채 핸드폰을 찾거나, 손에 치약을 짜거나, 혹은 샤워 후에 물기를 제거하며 생각하는 거죠. 잠시만, 내가 머리를 감았던가.
트레버 역을 맡은 배우 '크리스천 베일'은 영화를 위해 체중을 30kg나 조절하며 그 외모를 달리 했다고 하는데요. 아래 사진을 보며 대부분은 좀 더 건강하고 맵시 있는 오른쪽 몸을 선호할 것입니다. 그런데 외모뿐만이 아니라 내면에도 맵시가 있습니다. 그 역시 두 모습 중 어느 하나에 가깝겠지요.
드러나는 것들의 형태나 피로는 쉽게 자각하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것들은 외면하게 되는 것 같아요. 트레버처럼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나의 내면이 왼쪽 모습처럼 시들어가는 걸 보게 된다면 방치할리 있을까요? 아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치합니다. 옆사람도 그러고 있기 때문에.
삶의 미세한 균열을 알아챌 필요가 있습니다. 내 안에서 보내는 신호니까요. 일상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면, 당신이 느끼는 것이 맞습니다. 착각한 것도 아니고 유난스러운 것도 아니에요. 지치지 않는 옆사람을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