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답 있다
아는 선배 이야기. 얼굴은 말쑥하고 키는 훤칠하다. 각진 무테안경을 쓰고, 품이 넉넉한 옷보다는 몸의 라인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 셔츠나 슈트를 자주 입는다. 꽤 똑똑한 편이다. 능력도 좋아서 누구나 알 만한 직장에 다닌다. 이래저래 본받을 만한 점들도 많다.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태도라든가, 질서 정연하게 정돈된 일상이라든가.
그런데 누군가에게 그를 소개한다는 건 왜인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가 자주 입에 담는 말 때문이다.
“그건 아니지.”
대화 중 심심치 않게 듣는 말이다. 선배의 생각과 다를 때, 내 말은 운을 채 띄우기도 전에 서슬 퍼런 도끼질을 당하곤 했다. 선배의 말이 맞을 때도 많다. 그런데 뭐랄까. 옳고 그름이 딱히 중요하지는 않은 느낌이랄까.
한번은 그 선배를 다른 지인에게 소개한 적이 있다. 선배가 준비 중인 앱 서비스의 사용성에 대해 조언이 필요하다고 했고, 그 분야 전문가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든 것이다. 선배는 자신의 문서를 기반으로 질문했고, 지인은 의견을 얘기했다. 순조로운 듯했다. 그런데 특정 화면의 구성에 대해 의견이 갈리자 그의 주특기가 발동했다. 상대의 말을 끊어냈다.
선배: “에이 아니죠. 그건 박 과장님 생각이고요. 그 버튼은 이쪽 위치가 맞아요.”
박과장: “네? 아, 저는 최근 이런 유형의 서비스들이 지향하는 레이아웃 기준으로 의견을 드린 거고요. 예를 들어 이 앱을 보시면 이 부분이 잘 구성된….”
선배: “그래도 그건 아니에요. 생각해보세요. 이 화면에 사용자가 진입하면 딱 여기에서 버튼을 먼저 찾지 않겠어요?”
박과장: “말씀하시는 게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맞아요. 그런데 20대 여성이 주 타깃이라고 하셨고, 심지어 앱 중심의 서비스니까 이런 방식도 좋은 선택이에요. 해당 집단을 타깃으로 하는 서비스들이 전통적인 UI를 탈피하고 좀 더 효과적인 사용성을 만든 사례도 이미 많이 있….”
선배: “음, 그래도 아니에요. 이건 제 말대로 가는 게 낫습니다. 다음 내용 보시죠.”
이 선배의 방패를 뚫어보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다면 그만두길 바란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 상대가 틀렸다고 확신해서 저런 표현을 사용하는 게 아니다.
그건 아니지:
① 내가 너보단 잘났어. 그러니 내 말을 믿어.
② 그럼에도 네 얘기를 들어보려 했는데 내가 원하던 게 아니네. 그러니 스톱.
한 개인의 내면에는 매우 많은 법칙과 정의, 개념들이 정립되어 있다고 한다. 때문에 거기에 균열을 일으키는 외부 정보를 고민하거나 받아들이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멍 때리고 듣고 있다가 나보다 나은 생각을 하거나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기분이 팍 상해버릴지도 모른다.
‘그건 아니지.’는 이런 위험성을 사전에 차단해주는 최고의 방패다. 옳고 그름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듣고 싶지 않은 소리’의 서두를 끊어내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 타격감이 엄청나다고.
당하는 입장에선 자신의 생각이 통째로 부인당한 이유가 궁금하지만 딱히 대단한 답을 얻지 못한다. 따라서 이 표현을 한번 사용한 사람은 계속 내지르고, 당한 사람은 (자신에게 중요한 주제일수록) 그 논리를 증명하거나 공감 형성을 위해 애쓰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오빠, 저 AAA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어요.”
“아니지. 그것보다는 BBB가 낫지.”
“응? 내 전공이 AAA인데… 작년부터 준비해서 맡은 거예요.”
“그래도 그건 아니야. BBB가 대세.”
노력한다고 말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어느 정도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그저 듣고 싶지 않거나 왠지 괜히 한번 꼬집어보고 싶은 말이 들리면 끊고 보는 사람들. 애초에 합리적인 결론은 관심에 없었을지도.
“그래서 앞으로는 이런 방향으로….”
“에이, 아니야 그건.”
“야, 너는 왜 맨날 아니라고 하냐?”
“아니니까.”
“그러니까 왜 아닌지를 말해보라고.”
“보면 모르냐. 아니니까 아닌 거야.”
“그 아닌 게 뭐냐고 도대체.”
“너는 말해도 몰라.”
“아! 말을 해보라고. 생각을 해봐. 네가 말을 해야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를 알 수 있지 않겠냐!?”
“그건 아니지.”
“하… 뭐가 또 아닌데.”
“당연히 아닌데 설명이 필요하냐?”
이 표현은 특정 분야에 대해 딱히 경험이나 지식이 없어도 사용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맞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하지만, ‘틀린 것’에는 딱히 이유를 대지 않아도 말이 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잘만 활용하면 무한루프를 돌릴 수도 있다.
신용카드라는 게 그렇다. 긁을 때는 참 짜릿한데 날아든 청구서엔 자비라는 게 없다. ‘그건 아니지.’는 마치 당겨 쓰는 신용과 같다. 만약, 아주 만약, 살다가 누군가에게 내 사정을 얘기하거나 진심으로 대화하고 싶은 날이 오게 되면, 나의 사활이 걸린 이야기를 시작할 때쯤 상대가 씨익 웃을지도 모른다. 날카롭고 거대한 신용카드를 꺼내며, 그건 아니지, 라는 말과 함께.
그룹 에픽하이의 멤버인 타블로는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학석사 통합 과정을 졸업 했다고 밝혔다. 미국 명문대 출신 래퍼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몇 년 후, 한 누리꾼이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자 명단에 타블로가 없었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학력 위조에 대해 진실을 규명하는 모임이 생겼고, 관련 온라인 카페의 회원 수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당사자는 재학 시절 성적표와 교내 공식 확인서 등을 공개했다. 카페 회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조작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캐나다 시민증과 함께 학교 측의 공식 확인서, 학력 인증서, 교수 확인서, 졸업장 등을 추가 증거 자료로 제시했다. 그러나 카페 회원들은 여전히 믿지 않았다. 제시된 자료를 믿을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결국 타블로는 카페 운영자를 고소했다.
이처럼 한번 옳다고 믿는 생각은 잘 바꾸려 하지 않는 경향을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듣는 심리다. 그 외에는 무시해버리면 그만.
간편해 보이지만 이 편향은 물고기를 잡아들이는 통발과 같다. 들어가는 건 간편하나, 나오려면 인생을 걸어야 한다.
< 그건 아니지 >
파괴력: ★★☆☆☆
지속성: ★☆☆☆☆
고구마: ★★★★★
유의어: #그건네생각이고 #응아냐 #답정너
연관어: #내말이맞아안맞아 #왜아니라고말을못해
반의어: #일리있는얘기네 #내생각에는
왕고래입니다. 심리학을 전공했고 소심합니다. 사람에 대한 글을 씁니다. <후회 방지 대화 사전>, <소심해서 좋다>, <심리로 봉다방>을 썼습니다. 어릴 적, 꿈을 적는 공간에 '좋은 기분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아직 변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