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복수'는 영화의 주된 소재 중 하나입니다. 몇몇 작품이 떠오르네요. 국내에서는 <올드보이>, <복수는 나의 것>, <악마를 보았다>, <세븐데이즈>, 해외에서는 <킬빌>,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글레디 에이터> 등, 정말이지 치밀하고 진한 복수극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복수를 다룬 영화는 공통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주인공도 상당 부분 파괴된다는 점이죠. 복수를 성공한 후 허망함으로 인해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모든 걸 걸었던 시간의 끝은 여전히 고요해요.
그래서 복수를 다룬 영화를 보고 나면 통쾌함보다는 먹먹함이 더 많이 남게 됩니다. 그런데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Once Upon a Time in Hollywood)>에서는 조금 다른 종류의 복수가 등장합니다. 스스로 파괴되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름답운 복수 말이죠. 놀라운 점은 그것을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닌, '감독'이 한다는 점이에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2019년 작품이에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 알 파치노, 루크 페리, 미켈틴 윌리엄슨 등 엄청난 배우들이 출연했죠.
영화는 1969년 할리우드 황금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요. 당시 유명 배우였던 샤론테이트에게 집시 무리의 리더인 찰스 맨슨, 그 추종자들이 벌인 끔찍한 실화를 다룹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당시의 사건을 알고 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이에요. 어떤 사건인지 볼까요.
당시 사건 요약:
1969년 8월 8일, 샤론 테이트는 지인 5명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찰스 맨슨 일당이 집을 습격했고, 샤론 테이트와 지인 5명은 무참히 살해당했다. 찰스 맨슨은 집시 무리의 리더이며, 그녀는 찰스 맨슨과는 아무 연관성이 없었다. 매우 억울하게 살해당한 것이었는데 찰스 맨슨의 음악에 대해 비판하던 프로듀서 테리 맬처가 살던 집으로 이사 왔기 때문에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이다. 당시 임신 8개월이던 샤론 테이트는 찰슨 맨슨 일당에게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그들은 '너에게는 선택권이 없어'라며 칼로 수차례 찔러 끝내 살해했다.
정말 끔찍한 사건입니다. 샤론 테이트라는 배우는 1961년 엑스트라 출연을 시작으로 서서히 주목을 받았어요. 이후 열심히 노력하여 결국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여배우로 자리 잡았죠. 그렇게 행복의 정점에서 살인사건의 희생자가 됐습니다. 그녀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비극적인 여배우로 꼽힙니다.
이 사건을 접한 사람들은 엄청난 분노감을 느꼈어요. 그중 영화감독도 한 명 있었는데요. 그의 이름은 쿠엔틴 타란티노. 잔혹한 결말을 만드는 감독입니다. 그는 당시의 사건에 '만약'을 숨겨둔 영화를 만들기로 해요.
등장인물 및 줄거리
영화는 스타로서의 전성기를 지난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인기가 점차 떨어지면서 겪는 어려움들을 그려요. 릭이 트레일러 안에서 울분을 토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가 느끼는 불안과 압박을 여실히 보여줘서 꽤 인상 깊었어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력이 그 잘생긴 외모에 가려지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기도 하죠. (뭐든 가려도 좋으니 일단 나한테도 좀 줘볼래)
릭의 친구인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는 과거의 스캔들로 인해 영화계에서 일자리를 잃은 인물이에요. 릭의 운전수 겸 매니저로 일하죠. 분명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인데 빵형 특유의 바이브 때문인지 '을'의 느낌이 전혀 없어요. 참고로 클리프는 실존 인물이 아니에요. (마치 감독의 '만약에'를 위해 의도적으로 탄생한 듯한) 가상의 존재랍니다.
어느 날 릭의 이웃으로 할리우드에서 가장 핫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과 배우 '샤론 테이트(마고 로비)'가 이사를 옵니다. 릭은 들떴어요. 그들과 친해지면 좋은 작품을 얻어서 다시 예전의 명성을 되찾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하지만 워낙 바쁜 그들이기에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좌절해요.
샤론 테이트가 배우로서 성장하는 이야기는 서서히 추락하는 릭과 상반되는 또 다른 이야기로 전개되는데요. 이때부더 샤론과 릭, 클리프의 일상에 조금씩 찰스 맨슨과 그의 추종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해요. 전혀 엮일 일이 없는 것처럼 지나치지만, 역사적인 사건을 알고 본다면 불안감이 증폭해요. 샤론 테이트가 배우로서 성장할수록, 그녀가 행복의 정점에 다가갈수록, 당시의 끔찍한 사건도 가까워지는 것이니까요.
대놓고 스포를 하자면, 영화의 결말은 실제 사건과 다르게 전개됩니다. 집시 무리는 습격하려고 계획한 집을 찾아냅니다. 손에는 총과 칼을 들고, 자신들의 신념을 실행할 각오를 담아 다가서죠. 긴장감 넘치는 BGM이 공간을 가득 메워요.
문을 열자 기다리고 있던 건 어떤 남자와 그의 맹견 '브랜디'였습니다. 클리프 부스라는 이름의 그 남자는 "흐음... 어떻게 오셨죠?" 라며 너스레를 떱니다. 그 집은 샤론 테이트의 바로 옆집인 릭의 집이었죠.
당황한 집시들은 총을 들이대고 협박해요. 하지만 결과는 그들의 기대와 달랐어요. 집에 있던 남자는 낄낄대다가 결국 깔깔댔고, 그럼에도 협박하던 이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어요. 어느 덧 투견 브랜디가 총을 든 손을 물어뜯기 시작했으니까요. 결국 집을 습격했던 세 명의 일당은 오히려 잔인하게 살해당합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피와 살 그리고 비명이 난무하곤 하는데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는 초중반까지 그런 장면이 없어요. 영화의 분위기도 다른 작품과는 달라서 '이번 영화에는 감독이 자신의 스타일을 뺐나 보다'라고 생각하게 되죠.
그런데 실은 이 마지막 장면을 위해 기를 모으고 있었던 것 같아요. '만약 그 집이 아닌 이 집을 습격했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할 수 있는 한 가장 잔인하고 자비 없이, 자신의 스타일을 꾹꾹 눌러담아서, 그 무리에게 심판을 내립니다.
타란티노 감독이 재창조한 이야기는 그 사건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에게 묘한 치유감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간편하고 자극적인 키워드로 기억되는 당시 사건에 강렬한 메시지를 담아 놓아요. 타인에게 폭력을 일삼는 무리는 잔혹한 벌을 받게 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메시지를 말이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이제는 복수를 할 사람도 당할 사람도 없는, 역사의 한 장면을 꺼내서 만든 이 영화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아름다운 복수이자 떠난 이들에 대한 깊은 애도를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