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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Feb 25. 2016

더 유머러스하게 죽는 법

유머가 숨 쉬는 영화 - 두 번째 <월드워z>




If I had no sense of humor, I would long ago have committed suicide.

내게 유머 감각이 없었다면 나는 오래전에 자살했을 것이다.

< 마하트마 간디 >




유머가 숨 쉬는 영화를 찾아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있습니다. 앞서 영화 <마션>의 '마크 와트니'를 만나봤는데요. 그의 유머는 지구로부터 7천만 km 떨어진 행성에서도 광야를 종횡무진하며 잠자고 있던 우리의 유머 신경을 긁어주었습니다. 아직 못 보신 분은 먼저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영화는 <월드워z>입니다. 유머 다루는데  좀비 영화인가 의아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영화의 몇몇 장면에서 소위 '유머러스한 죽음'   있습니다. 특히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는 그런 유머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당장 죽게 생겼는데 유머가  소용이냐고요? 그러게요.   멋있어도 상관없죠. 그런데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야말로 내가 삶을 어떤 식으로 조망해왔는지 가장  보여줄지도 모릅니다.  좁은 찰나를 비집고 나온 유머야말로 일생을 숙성해온 최고의 정수 거예요.


<월드워z>는 저의 서랍 속 영화제에서 좀비 영화 부문 최상위권에 있는 영화입니다. 낮에는 자유로이 도심을 누비고 밤에는 욕조에서 두려움과 싸워야했던 로버트 네빌(윌 스미스)의 이야기, <나는 전설이다>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던 자리입니다. 월드워z의 도입부를 비롯한 몇몇 장면은 제가 그 나라 사람이 아님에도 굉장히 사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좀비한테 물리면 좀비 된다.'는 기본 룰을 충분히 따르면서도 넓은 범위의 이야기를 덜 잔인하되 더 긴장되게 그리고 대담하게 풀어냈죠. 군더더기 없는 쾌속 전개 덕에 좀비 영화인데 담백하기까지 합니다. 네빌에게 양해 구했습니다. 팬트하우스에 룸메이트 생겼다고.


거, 방 좀 같이 씁시다.


<월드워z> 일종의 좀비&재난 영화입니다. <나는 전설이다>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면,  영화는 인류의 위기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광범위한 시점 변화 때문인지 재난영화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UN 소속 조사관 '제리 레인(브래드 피트)'은 생존율 제로에 가까운 인류의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 세계 여러 도시를 돌며 사건의 기원과 단서를  찾아다닙니다.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좀비에게 약점은 없는가. 그렇게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군분투하지만 그들은 말 그대로 완전무결한 존재였습니다. 인류는 점점 더 죽음에 가까워질 뿐입니다.



유머러스한 죽음


사실 영화 전반에 걸쳐 유머라고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여러 영화에서 다양한 색깔을 드러냈던 브래드 피트도  영화에서만큼은 묵직하고 신중한 모습유지합니다.  브래드 피트가 아니어도 됐겠다 싶을 정도였죠. 그렇기 때문에 가뭄에  나듯 뜬금없이 등장하는 유머가 오히려 영화 전반의 분위기와 상반되며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그리고 유머가 등장하는 순간들은 항상 죽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영화에선 그렇게  번의 '유머러스한 죽음' 나오는 데요.   살펴보겠습니다.



1. 이스라엘에서 보상 좀 받아야겠는데.


평택에서 큰 소득을 얻지 못한 제리는 이스라엘로 가기 위해 경비행기에 올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순탄치 않습니다. 좀비들이 어둠을 뚫고 덤벼들기 때문이죠. 저격수의 엄호를 받으며 가까스로 비행기에 올랐으나 누군가는 비행기에 연결된 급유관을 해제해야 했습니다. 팀원 중 한 명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보상 좀  받아야겠는데."


그리고는 어둠 속으로 뛰어들죠. 같이   없다는  직감하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게  이스라엘로부터 뭐라도 얻어먹어야겠다고 말한 셈입니다. 일각을 다투는 상황에서의 빠른 판단, 담담한 유머 그리고 어딘가 게리 올드만을 연상케 하는 옆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도착하면 카톡해!



2. 원해서 하는 거예요? / 당연히 아니죠.


좀비들이 도사리고 있는 B동에서 중요한 병원균 샘플을 갖고 와야 합니다. 성공률이 굉장히 낮고 실패는  죽음을 의미하는 시도입니다. B동으로 건너가는 복도 , 그곳의 모두가 긴장한   죽이고 있을  제리가 동행자에게 묻습니다.


"원해서 하는 거예요?"


당연히 아니겠죠.  누가 걸어 다니는 시체와 스산한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고 싶겠어요. 하지만 제리도 그건 알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만큼이나 답이 정해진 뻔한 질문을 해본 것이죠.  뻔한 질문과 대답이  유머러스합니다. 능글맞은 표정이 어딘가 짓궂게도 느껴집니다.


원해서 가는 거에요?
당연히 아니죠.
자, 갑시다.



3. 운명의 사운드, 치익-


<월드워z> 유머러스한 죽음이라는 주제에 선정된 이유는 사실 마지막 장면 때문입니다. 콜라 광고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청량감마저 드는  장면이 굉장히 유머러스하기 때문입니다.  부분은 이야기의 형태로 간단하게 풀어보겠습니다.




그가 인류 종말의 숙제를 풀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체내엔 해독 가능성을   없는 병원균이 퍼져버렸다. 제리는 무거워지는 몸을 어렵사리 옮기며 동료들이 기다리는 A동을 향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선인장이라도 삼킨  가슴이 쓰라린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A동으로 향하는 하나뿐인 복도, 그곳엔 인간만 보면  까뒤집고 달려드는 좀비들이 있다. 지구상의  누구도 제리의 생존을 담보할  없다. 죽음의 그림자가 발밑을 어슬렁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있나, 그는  대담하게  순간을 맞기로 한다.



자판기에서 콜라를 하나 뽑아 들었다. 아까부터 마시고 싶었는데 그들이 소리에 예민한 탓에 먹지 못했다. 이젠 마셔도 된다. 그깟 콜라 한 캔으로 뭔가 달라질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치익-' 깡통의 균열 뚫고 나온 탄산의 소리가 적막한 복도를 적셨다. 환청인지 비명인지 모를 괴이한 소리들이 이따금씩 들렸다. 그는 긴장감으로 말라가던 입속에 인생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콜라를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자판기 속 콜라 캔들의 고정 스위치를 풀었다. 쏟아지는 깡통들은 저마다의 요란을 떨며 복도의 침묵을 깨부수었다.



그 마찰음은 천장과 벽을 빠르게 오가며 복도의 끝으로 날아가 그곳에 있는 좀비들의 귓전을 찔렀다. 그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괴성을 지르더니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앞다투어 뛰었다. 그곳엔 제리가 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전력질두하는 좀비 무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담담히 걸었다.





마지막 순간에 선다는 것


유머감각이 없다면 죽음을 달라던 마하트마 간디의 말에서는 저승 가는 길에도 유머  자락은 남길  같은 의지가 보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는 인생 마지막 순간에도 유머를 뱉을  있을까요. 아마도 그럴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순간을 대비해 유머를 연습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만약 우리의 일상이 죽음과 매우 가깝게 닿아 있다면 어떨까요. 가령 전시 상황으로 인해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의 손길을 목격하는 상황이라면 죽는다는 게 지금과는 다른 거리와 의미로 다가올 것입니다. 죽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겠지만, 잘 죽는 것은 꽤나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곳에 남게 될 가족과 친구들, 넓게는 인류가 나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죠. 그들이 기억하는 내 모습이 이곳에 존재하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유머는 죽음에 대한 어떤 면을 담게 될지도 모릅니다.


'유머러스한 죽음'이라는 것은 당장 인생 하직하게 생겼는데 농이나 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지막 까지 삶에 대한 내 태도를 유지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순간입니다. 그 아찔한 문턱에서 지난밤 꿈같았던 내 삶을 한 마디의 유머로 정리할 수 있다면, 그건 혼신을 담은 오페라의 클라이맥스처럼 멋질 것입니다. 지휘자의 마지막 손짓은 더할 나위 없겠죠. 제리는 멋진 연주를 했습니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유머러스하게 맞이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것일까요.


산 넘어 산, 하루가 멀다 하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왜 자꾸 힘든 일만 생길까 좌절하곤 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 문제는 늘 곁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못 본 척했을 뿐이죠. 하나의 가능성으로, 일상에 연결된 실타래로, 집요하게 나를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제리가 좀비 무리를 향해 담담히 걸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모든 순간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곳에 도착하기까지의 수많은 위기상황에서도 늘 마지막처럼 힘을 쏟았습니다.


우리에게 뛰어오는 문제들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보는 건 어떨까요. 그 순간이 내 삶의 마지막 기록인 것처럼 혼신의 연주를 해보는 거죠. 그런 관점에서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은 굉장히 유머러스한 것 같습니다.


인류의 대부분이 좀비로 변해버린 상황, 죽음의 문 손잡이가 잡히는 최악의 순간에도 그들은 더 잘 살고자 했습니다. 유머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살았습니다.


유머러스한 죽음은 없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의 유머러스한 삶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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