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미의 세상 Aug 25. 2023

도전! 뮤지컬스타

50 플러스 강서센터, 우리의 여름, 극단 오르다

새벽 5시,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뜨거운 액체가 볼을 타고 흐른다. 한 줄기 또 한 줄기. 왜 눈물이 나는 걸까? 행복해서? 아쉬워서? 나도 잘 모르겠다. 길을 걷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매캐해지다가 기어코 훌쩍이고 만다.


공연을 마친 지 이틀 째다. 다행히 원 캐스팅이라 네 번이나 무대에 설 수 있었지만 마지막 공연을 위해 커튼 뒤에 선 순간부터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몰려왔다. 내일부터는 뭘 하고 살지?  왜 좀 더 멋지게 해내지 못했을까? 그저 아쉬움뿐이다. 마지막 커튼콜을 위해 스팽글 가득한 공연복을 입고 계단 위로 올라갔을 때 바로 눈앞에는 커다란 미러볼이 돌아가고  강한 조명 때문에 눈은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신나게 춤춰봐! 인생은 멋진 거야~"

양 주먹을 불끈 쥐고 춤을 출 때부터 이 눈물바람은 시작되었다.


연기에 대한 열정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지난해 겨우 연기에 대한 맛을 느끼고 꽃을 피워보려 했으나 서울시장이 바뀌고 정책이 바뀜에 따라 50 플러스 센터는 취창업 관련 과목만을 남기고는 문화활동에 대한 모든 과목이 폐지되고 말았다. 망연자실해 있을 때 지인이 강서센터에서 뮤지컬 과목이 개설되었다고 알려주었다. 묻고 따질 틈이 없었다. 바로 신청을 했고 부푼 마음으로 개강일을 기다렸다.


아, 그런데 그때 나는 이미 얼굴에 약간의 보수와 개조를 위하여 얼굴이 온통 부은 데다 멍투성이였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런데 갑자기 오디션을 본단다. 뮤지컬에서는 노래가 필수인 것이다.

"내 참~ 이거 오디션에서 떨어지면 창피해서 어쩌지?"

그렇게 멍 자국은 파운데이션으로 부은 눈은 시커먼 선글라스를 끼고 오디션에 참가했고 어찌어찌 수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 대본을 받고 리딩에 들어갔던 날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직감했다. 주인공은 나야! 그런데 엉뚱하게도 엄마인 도나도, 딸인 소피도 아닌 엄마 친구인 타냐를 하란다. 그때부터 나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그만둬? 아니야. 또 이런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르잖아"

겨우 마음을 다잡고 수업에 가면 까칠함의 정도를 넘어선 까마득한 후배부터 완전 꼰대 아저씨까지.

딸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자 딸은,

"엄마 이미 한 달치 수강료를 냈고 돌려주지 않는다며? 한 달 뒤에 그만둬!"

"그래, 한 달만이다!"

그런데 오늘은 말해야지 하고 가면 누군가  한 명씩 빠지는 것이다. 어, 어 하는 사이에 나는 그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첫 커피타임을 가지던 날, 연출은 내게

"선배님 너무 잘하세요. 그래서 많이 고민했어요"

흥, 그렇게 고민했는데 왜 나를 타냐를 시켜?

그 후 연출은 나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타냐는 도도하고 섹시하고 정말 멋진 여자예요"

원 세상에! 세 번이나 이혼한 바람기 많은 여자가 멋있다고?  말도 안 돼.



수업은 토요일 오전이었다. 주말부부라 일주일 만에 집에 올라온 남편을 외면하고 수업을 하러 가는 것이 내내 편치 않았으나 남편은 센터까지 차로 데려다주는가 하면 아낌없는 응원도 해주었다. 얼마나 미안하고 고맙던지.

수업이 토요일에 이뤄진 것은 수강생 대부분이 직장인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 때문에 일부러 센터가 문을 열었기 때문에 수업이 끝나면 바로 비워줘야 했다. 뮤지컬이란 단지 대사만 읊는 게 아니라 노래와 안무가 있어 서로 연습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우린 모두가 퇴근한 저녁에야 연습을 할 수 있었고 따로 연습 장소가 없어 서울 시내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서울 식물원 다리 아래에서 안무 연습을 하다가 쫓겨나질 않나, 비좁은 사무실이나 학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대본 연습을 하질 않나, 난생처음 국립중앙도서관에 회원 가입을 하여 방음장치가 된 곳에서 연습을 하기도 하고, 교회나 복지관에 모여 연습을 했다. 마지막에는 사당역 근처 유료 연습실까지 빌려 장면별로 연습을 했다.



뮤지컬은 안무보다 노래다. 그러나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을 뽑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음치에 박치라는 것을 이 공연을 하며 처음 알았다. 노래라는 것은 그저 20 년 전쯤 직장 다닐 때 노래방에서 부른 것이 다다. 그때는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를 흥에 겨워 부르면 되었다. 그러나 극에서는 내게 맞지 않는 노래를 게다가 춤까지 추며 불러야 했다. 여자들은 대부분 노래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박치인 나는 몇몇 안 되는 문제아 중에 끼일 수밖에 없었다. 몇몇 회원들은 보컬레슨을 받기도 했지만 노래가 많은 것도 아니고 솔로 곡 한 곡뿐인 데다 그것도 반복되는 후렴구가 대부분인 노래를 위하여 보컬레슨까지 받는다는 것이 왠지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그러나 그 안일한 생각에 본 공연에서도 어김없이 박자를 못 맞추는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그래도 6개월 동안 나는 아침저녁으로 강아지와 함께하는 산책길에서 오로지 그 한 곡을 정말 지겹게도 불렀다. 그러나  잘 부른다고 생각했지만  수업시간 중에 춤추며 부르다 보면 꼭 박자를 놓치는 것이다. 마지막 공연날 우연히 음악감독과 함께 택시를 타게 되었다.

"저 어땠어요?"

"제가 좀 더 봐드렸어야 했는데..."

"저 또 박자 놓쳤나요?"

"네, 몇 군데"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촬영본을 보니 몇 군데나 불안했다. 6개월 동안 그렇게나 흥얼거렸는데...



두 달 전부터는 새벽에 눈이 떠지기라도 하면 거울 앞에 서서 안무 연습을 했다. 하필 내가 나오는 장면마다 춤과 노래가 빠지질 않았다. 게다가 섹시한 타냐다. 눈은 게슴푸레하게, 손동작은 섹시하게, 한시도 턱을 내려서는 안된다. 지하철 이동 중에도 내내 대사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어느 날인가 지하철에 앉아 혼자 중얼거리며 연기 연습에 빠져 이상한 동작과 눈길을 보냈던 것 같다. 그때 건너편의 승객은 마치 미친 여자를 보는 듯했다. 설마 내가 자기를 유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어디 그뿐이랴? 수업이 있는 날이면 거의 한 시간 전에 센터에 도착해서는 센터 건물의 유리창 앞에 서서 안무 연습을 하였다. 토요일 오전이라 도로는 한산했고 나는 있는 힘껏 몸을 꼬며 춤을 추었다. 그 순간 그곳을 지나가던 행인들의 시선 또한 곱지 않았다.

"애들도 아닌 중년의 아줌마가 이 아침에 저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러나 그렇게도 연습을 했지만 늘 연출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다이나모스는 최대의 보컬그룹인데 지금 라인댄스 하시는 거예요?"

아니 이 중장년들에게 도대체 뭘 바라고 있는 거야? 급히 섹시댄스를 검색하니 웬 야동에 가까운 춤이 검색되었다. 다시 요즘 걸그룹들의 방송을 찾아보니 어찌나 빠른지 몇 번을 돌려봐도 도저히 따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댄스가스 유랑단과 몇몇 유튜브의 동작을 섞어 춤을 만들었다. 아, 그런데 내년에 결혼할 예정인 예비 사위까지 온단다. 이런!  요란한 장모 때문에 혹시 파혼이라도 당하는 건 아닐까?


바로 공연날에도 연출은 아주 배고픈 표정으로

"아직도 그 벽을 깨질 못하시네요!" 선배님 타냐예요. 절대로 친절하게 바라보면 안 돼요"

에구 그 빌어먹을 타냐, 왜 나를 타냐를 시킨 거야? 그러나 도나의 연이은 고음의 노래 세곡을 듣는 순간 또 소피의 수많은 대사를 듣는 순간 그나마 내가 타냐였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던지.


처음부터 시원치 않았던 허리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되지도 않는 섹시 춤을 유튜브를 보며 흉내 내다보니 내 허리는 그만하라고 마구 아우성을 쳤다. 하루는 무릎 때문에 한의원으로 또 하루는 허리 주사를 맞기 위해 통증의학과로. 연습이 없을 때면 틈틈이 병원 순례를 해야 했다.


또 섹시 타냐였기에 몸도 만들어야 했다. 나는 급히 운동을 시작했고 식이요법도 시작했다. 그리고 두 달 만에 체지방 6 킬로그램을 줄이고 근육은 1 킬로그램을 늘이는 데 성공했다. 처녀 때부터 다리가 굵어 절대 반바지나 치마를 입지 않았던 내가 공연장에서 수영복을 입었다. 다행히 관객들은 나의 노출이 그다지 괴롭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회에 나와 수없이 다이어트를 했지만 이렇게 살을 많이 뺀 적이 없다. 공연에 대한 추억과 함께 최대의 수확물이다.


공연날이 다가오자 다들 극도로 예민해졌다. 같이 호흡을 맞춰야 하는 사람이 지각 결석이라도 하게 되면 그만 공공의 적이 되고 만다. 그들은 처음 뮤지컬을 시작할 때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부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강서센타라고 해서 서울의 서쪽 사람들만 모였던 것이 아니다. 멀리는 곤지암에서또 강동에서 오기에  자동차로 이동하지 않으면 차가 끊겨 택시비만 6만 원을 낸 사람도 있다.


생업이 있는 데다 서울의 서쪽 끝까지 오자니 3 시간 가까이 걸려 오건만 지각을 밥 먹듯 하다 보니 미운털이 박힐 수밖에 없다. 게다가 현재의 흐름을 잘 모르니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도 다반사다.  못 온다는 문자는 모이기 바로 전에 날아오곤 했다. 그런 것을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은 장황하게 핀잔의 글을 썼고 못 온다던 그녀는 그 글 때문인지 한참이나 늦은 후 도착했다. 그러나 벌써 한 장면의 연습은 끝나 관련된 사람들은 돌아갔고 우리는 다음 장면의 안무를 짜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너무나 흔한 영상을 들이대며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이미 연출은 기존의 무대를 원하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나는 일언지하에 "그건 아냐"하며 다른 외국 영상들을 보고 있는데 힘들게 왔는데 자기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마구 물병을 던지며 소리를 치는 것이다.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한참을 패악(?)을 부리던 그녀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녀는 여기저기에 "저는 왕따예요"라고 말하고 다녔단다.


그 외에도 매번 조퇴계를 내야 했던 직장인들도 볼멘소리를 했으나 돌아가는 것은 구박뿐이었다. 공연이 다가오면 어떻게든 외워지겠지 하며 안일하게 생각했던  사람들  또한 따가운  눈총을 피할수 없었다 그 나이에 많은 연습이 없으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못했던 것이다.



우리의 나이가 적지 않다 보니 부모님의 건강상태는 늘 걱정거리다. 공연일이 다가오던 어느 날 갑자기 도나의  친정아버지가 쓰러지셨다. 경동맥에 이상이 있단다. 시술과 수술을 앞둔 그녀는 제대로 뮤지컬에 몰두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의사들의 협박 어린 말에 아연실색한 그녀는 공연 포기까지 생각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다행히 잘 버텨주셨고 공연에 참석한 그녀는 대학로 열린 극장이 터져라 열창을 했다.


나도 8월 연휴를 맞아 모처럼 90이 넘으신 시부모님을 모시고 동해안으로 갔다. 거동이 불편하셔서 그저 창밖으로 바다를 보는 게 다였지만 부모님은 너무나 좋아하셨다. 그러나 연휴로 모든 식당은 초만원이었다. 원래 횟집을 가려다 길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바로 앞의 조개구이 집으로 갔다. 유명한 오징어순대에 생선구이까지 곁들여 푸짐한 밥상을 준비했는데 그만 덜 익은 조개를 드셨었는지 어머니가 탈이 나고 말았다. 게다가 시아버지는 며칠 전 드신 염소탕으로 계속 화장실을 가시는 게 아닌가?


겨우 모셔다 드리고 서울에 올라온 우리는 어머니가 패혈증에 걸리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이가  많으신 노인들에게 패혈증이란 무서운 병인 것을. 나도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나는 대타도 없는데! 그런데 다행히 어머님은 병을 이겨내셨고 퇴원을 하셨다. 아직도 많이 안 좋으시다. 좋은 일 한다는 것이 그만!


남자 주인공의 갑작스러운 번아웃. 급기야 당황한 연출은 공연장까지 뛰어 내려왔고 순간순간 도나의 열창으로 또 소피의 빠른 대처로 극은 겨우 마무리되었다. 아직 한 번 더 공연이 남아있던 우리는 모여서 이야기를 했다. 어떡하면 좋겠냐는 연출의 말에 샘은 다른 샘이 대신했으면 한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가장 지각비를 많이 고 다이아몬드 스텝도 제대로 밟지 못해 우리에게 수없이 구박을 받아도 늘 천진난만한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였기에 우리는 모두 너무나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두 번째 공연 날 앙증맞은 앞치마를 두르고 밝게 웃으며 나오신 그분이 어찌나 고맙던지.

"또 공연해야 하는 부담감을 내려놓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그분의 밝은 미소는 더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눈부신 조명 아래 춤추던 우리에게는 채 말하지 못한 추억과 많은 이야깃거리가 숨어있다. 벌써부터 그들이 그립다. 이렇게 우리의 뜨거웠던 열기는  공연과 함께 서서히 식어가고 축하 선물로 받은 꽃들도 시들고 있다. 한 송이 또 한송이 빼내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도 이렇게  조금씩 시들고 겠지? 다행히 공연을 보러 와 준 지인들은 너무나 멋있게 살고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 잘 살고 있는거야. 브라보 마이 라이프!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행복한 여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