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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Apr 30. 2024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직원 구하기

개업 준비가 착착 이뤄졌다. 작은 빵집 하나 여는 것인데도 쉽지 않았다. 본사에서 빵을 가져다 파는 게  아니라 직접 빵을 만들어 파는 빵집이다 보니 매장과 공장(큰 규모가 아니어도 빵을 만드는 곳을 공장이라 불렀다)이 필요했고 가게에 들어갈 가구도 만들고 주변 공사까지 하다 보니 꼬박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빵을 만드는 직원들을 위한 숙소도 꾸며야 하고, 반죽기 오븐 등 기계와 쇼케이스 그리고 다양한 주방용품과 포장용기까지 구비하고, 구청에는 사업자등록 등 서류상의 절차까지 밟아야 하니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빵을 만들고 파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었다.


빵을 만드는 사람들은 주로 팀으로 다니는데 이 세계도 일반 회사처럼 엄격하게 계급화되어 있었다. 공장장을 중심으로 빵을 반죽하는 사람, 성형하는 사람,  굽는 사람, 샌드위치와 케이크를 만드는 사람 등으로 나뉘어 있다. 빵집을 운영하는 12년 동안 여러 팀을 만났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팀 중 하나는 제일 먼저 만난 사람들이다. 낯선 만남이었지만 정말 진심으로 대했고 그들이 떠난 후에도 한두 명은 가끔 찾아와 주기도 했다. 빵맛은 공장장의 레시피와 기술력에 달렸는데 그들의 빵 종류는 다양했고 또 기술력도 빵빵했다.  


우리는 1박 2일 동안 김포 어딘가로 단합대회까지 갔다. 이런 분위기가 생소했는지 공장 직원들과 매장 직원들 모두 어색하게 하루를 보내야 했다.  꾸미기만 하면 훤칠하고 잘 생겼던 공장장은 새벽 6시부터 출근하는 다른 직원들과 달리 늘 꾀죄죄한 모습으로 점심 때나 돼서 나타나곤 했다. 지방에서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부모님께서 주변에 잘 나가는 빵집을 보고는 빵기술자가 되라고 해서 들어왔다는 K, 곱상한 외모에 말없이 일만 하던 B, 항상 날 보고 환하게 웃어줬던 S. S는 가게를 그만두고도 가끔 찾아와 불쑥 콜라(나는 그때도 콜라를 즐겨 마셨다)를 사다 주곤 했다.  그리고 유일한 홍일점인 A는 매장에서 케이크와 샌드위치를 만들며 우리가 자리를 비울 때면 물건을 팔아주기도 했다.  그들과의 만남은 너무나 소중했고 지금도 가끔 그들이 보고 싶다.


그 외에도 여러 명이 함께 왔지만 지금은 얼굴조차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때 매출이 어느 정도 유지되었더라면 그 팀과 함께 오랫동안 같이 했겠지만 그들과의 만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중 한 명은 몇 년 뒤 홈플러스 빵 매장에서 만났는데 나를 보자마자 빚쟁이라도 만난 듯 황급히 피했다.  나의 애틋한 마음과 달리 그들에게 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였나 보다.


일주일 정도 일찍 온 공장 직원들 밥을 해놓고 찾아 헤매다 발견한 곳은 근처에 있는 오락실이었다. 어쩌면 공장장부터 열 명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일렬로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가족들 밥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엉터리 주부였는데 주방 도우미를 찾을 때까지 삼시세끼 꼬박꼬박 밥까지 해줘야 했다.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는 매장 직원이다. 급하게 콜한 사람은 바로 우리 둘째 딸을 키워 주셨던 분이다. 첫째까지는 환갑이 지난 친정 엄마가 겨우 키워주셨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10 년 뒤에 태어난 우리 둘째는 더 이상 엄마에게 맡길 수가 없어 다른 분께 육아를 맡겨야 했다. 


오랜만에 아이를 키우게 된 부부는 우리 둘째를 너무나 귀여워해 주셨다. 특히 증권회사에 다니던 그녀의 남편은 우리 둘째가 보고 싶어 퇴근만 하면 서둘러 집에 왔고 일요일에도 딸을 데려가 놀고 싶어 했다. 그렇게 2,3년이 지났을 무렵 아이의 성추행 문제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하루는 퇴근 후 아이를 데리러 가보니 그 남편이 우리 딸 목욕을 시키고 있었다. 물론 그럴리는 없었겠지만 그 모습을 보니 뉴스의 장면들이 떠오르며 찜찜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런가 하면 퇴근 후 아이를 데리러 가면 다른 집에 있으니 그 집으로 오라는 쪽지가 종종 붙어 있었다. 그 부부는 성당 사람들끼리 저녁에 자주 모였고 가보면 우리 딸은 그 집 방 한편에서 놀고 있었다. 또 어느 날인가는 그녀가 테니스를 즐기는 동안  우리 딸은 테니스장 흙바닥에서 놀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 싶어 나는 갑자기 딸을 우리 아파트 1층 어린이집으로 옮기고는 그 이유까지는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불편하게 헤어진 사이였지만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다 보니 또다시 급하게 매장 직원으로 도와줄 수 있냐고 부탁을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민망한 일이었으나 그녀는 고맙게도 망설임 없이 달려와 나를 도와주었다.


빵집을 열 때 우리 둘째 딸은 초등학교에 막 들어갔다. 꿈에 부풀어 입학 준비를 해줘야 했지만 그때 내 머릿속에는 그저 빵가게뿐이었다. 그래도 그 바쁜 와중에 받아쓰기 시험을 본다 해서 한밤중에 귀가해서는 연습까지 시켜 학교에 보냈는데 하필이면 그날 딸이 필통을 잊고 갔다. 고학년도 아니고 1학년이다. 그날 담임 선생님은 딸을 시험도 못 보게 하고 수업시간 내내 뒤쪽에 나가 팔을 들고 서있게 했다.

"도대체 너희 엄마는 필통도 챙겨주지 않고 어떻게 학교에 보낼 수 있니?"

이 말에 화가 난 나는 더 이상 딸을 맡기고 싶지 않아 입학한 지 한 달 밖에 안 된 딸을 단지 내 초등학교로 전학을 시켰고 우리도 아파트 단지 내로 이사를 했다. 그 선생에게 고마워해야 할까? 그 덕분에 목동아파트로 이사 온 우리는 빵집을 하는 데는 큰돈을 까먹었지만 아파트를 산 덕에 재테크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또 기억에 남는 사람 중 하나는 매장 아르바이트생이다. 날씬한 데다  특히 웃는 모습이 예뻤던 그녀는 술도 얼마나 잘 마시던지 공장 직원들의 가슴을 꽤나 두근거리게 했다. 그런데 그녀의 부모는 성당에 다녔는데 그렇게 개방적인 딸이 수녀가 되기를 원했다.  설마 지금 어느 성당에서 수녀가 되어 있지는 않겠지?

 

개업 전에 나는 사전 탐사를 위해 경희대 앞 모 빵집도 방문했다. 재개장하던 날이라 어마어마하게 손님들이 몰려왔다. 나는 구석에서 시식 빵을 잘라주느라 손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때 나는 그 활기찬 모습을 보며 큰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정말 재미있는 일거리를 찾았다며 꿈에 부풀었다. 



체인 사장이 운영하는 빵집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규모가 있는 빵집과 공장장들이 개업해 운영하는 소규모 빵집이다. 하루는 기술자가 운영하는 아담한 동네빵집을 찾았다.  아기자기한 빵가게는 정감이 넘쳤으나 차디찬 냉장 작업대 위에 아이가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짠하고 또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젊은 부부가 너무나 대견했다. 그들은 지금도 빵집을 하고 있을까? 그 아이는 벌써 성인이 되었겠지!


그리고 인천 쪽에서는 이름이 날대로 난 빵집을 찾았다. 바로 내가 운영할 상호였다. 아주 시답지 않은 눈초리로 쳐다보던 사장 때문이었는지, 크나큰 매장의 규모에 주눅이 들었던 건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달리 나는 그 상호를 달고 10명 넘는 직원과 함께 빵집을 시작했다. 빵집을 팔고 나간 전 주인이 내게 신신당부한 대로 아담하게 시작했더라면 큰 손해 없이 빵장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개점을 일주일 정도 앞둔 시점부터 제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쿠키였다. 손톱만큼 작은 과자를 예쁜 쿠키 상자에 넣어 포장하는 것은 매장의 일이다. 텅 빈 가게에 쭈그리고 앉아 포장을 하는데 수도 없이 나오는 쿠키를 보고는  급히 가까운 친지까지 불러야 했다. 자그마한 쿠키를 예쁜 케이스에 담고 밀봉하고 예쁜 끈으로 리본까지 매야 했으니 이 똥손이 얼마나 허둥댔는지 모른다.


그리고 롤케이크 등 선물 세트가 나왔고 내가 보지도 못했던 빵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그저 슈크림빵이나 팥빵 카스텔라 정도만 사 먹던 내가 크레죤, 호두브리오슈, 슈톨렌 등 다양한 빵부터 파이류와 케이크까지 보고는 너무나 황홀해 껑충껑충 뛸 지경이었다. 당시 목동에서 이 정도로 다양하게 빵을 팔던 집은 없었다.


3,000 여 세대의 가장 중심부에서 빵가게를 열던 날, 아파트 단지는 온통 축제장이었다. 팡파르가 울리고 댄서들이 춤을 추고 주변 학원 선생들로부터는 밤새도록 민원이 빗발쳤다. 작은 컵을 사은품으로 줘서 인지 밤 12 시 문 닫을 때까지 아니 그 후로도 며칠 동안 그 긴 줄은 끊이질 않았다.  우리 부부 둘 다 직장을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가게 앞 넓은 땅은 화환으로 가득했고 축하객들을 위해 식당까지 빌려야 하는 등 지금 생각하면 정말 호화롭게 개업식을 치렀다. 그 많은 화분 중 하나는 아직도 우리 집 거실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빵집아줌마로서의 삶은 12 년이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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