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WAII #13 가장 효율적인 계산은 때론 가장 재미없는 결과를 낸다
하와이에서의 셋째 날, 카네오헤에서 돌아온 오후. 나와 Y는 호텔에 들어와 씻은 뒤 기절하듯 쓰러졌다. 새벽같이 일어나 한 시간은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해양 액티비티를 세 종류나 즐기고 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종일 체험을 신청하지 않아 다행이라며, 이게 20대 후반의 체력이라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웃었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해가 중천인데 몸은 노곤노곤하게 늘어져 이대로 그냥 낮잠이나 푹 자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당연히 그럴 수가 없었다. 하와이에서의 고작 6일. 지금이 바로 그 중간 지점이었다. 이렇게 호텔에서 잠이나 잘 거야? 여긴 하와이라고! 귓가에서 효용가치를 따지는 한국인 본능이 자꾸만 소리쳤다. 앞으로 남은 날들도 액티비티나 예약성 일정으로 가득 차 있어서, 하와이 호놀룰루를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은 정말로 몇 없기도 했다. 나가자. 우리는 이게 옳다고 믿으면서도 또 동시에 억지로 옷을 차려입고 지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의 목적지는 하와이의 전통 음식 중 하나인 '포케'로 유명한 오노 씨푸드Ono Seafood였다. 지금에야 포케가 샐러드나 다이어트용 식단으로 대중화가 많이 됐지만, 내가 하와이를 여행하던 2019년에는 포케란 서울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낯선 음식이었다. 그래도 오노 씨푸드는 하와이에서 손에 꼽는 관광 음식점 중 하나였고, 특히 아히 포케가 유명했다. 참치가 아닌 아히. 그 지역에서만 쓰는 고유한 단어가 주는 특별한 매력이 있었다. 나는 그게 무슨 마법의 단어라도 되는 것처럼 홀린 듯 길을 향했다. 아히 포케를 향해.
오노 씨푸드는 우리의 호텔에서 버스로 약 15분 정도 걸리는, 해변가에서부터 약간 더 내륙으로 들어간 동네에 있었다. 걸어서는 30분이 넘게 걸렸다. 원래도 산책을 좋아하는 나와 Y였지만 반나절을 바다에서 혹사한 오늘만은 달랐다. 당장이라도 우버를 부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채, 상식적이고도 합리적인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호텔 가까이에서 오노 씨푸드로 가는 버스 노선은 두 종류가 있었는데, 우리는 계획적인 사람들답게 구글 맵으로 배차 간격을 확인한 후 개 중 버스 시간대가 짧은 정거장으로 향했다. 마침 곧 버스가 도착할 예정이기도 했다. 지친 몸도 잠시, 우리는 하와이 포케를 먹을 생각에 들뜨기 시작했다. 그런데 5분 후 도착이던 버스가 3분 후 도착이 되더니, 아예 노선 상에서 사라지기까지 했다. 이게 뭐지? 우리가 너무 늦게 왔나? 버스가 먼저 가버린 걸까? 버스 정거장이 잘못되었다기에는, 다른 노선의 버스들은 멀쩡히 정차했다가 떠나기를 반복했다. 어쩌면 오노 씨푸드로 가는 이 버스 노선만 마침 운행을 안 하는 걸지도 몰라.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나와 Y는 잠시 고민 후, 차선을 택했다. 코너를 돌면 있는 또 다른 노선이 경유하는 버스 정거장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구글 지도를 보며 어떻게 해야 덜 걸으면서도 더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할까 고민한 결과였다. 다른 버스는 코너의 버스 정거장에 약 10분 정도 후 도착할 예정이었다. 조급할 필요 없었다. 우리는 하와이의 뙤약볕을 받으며 다른 버스 정거장으로 향했다. 설마 여기에도 버스가 안 오지는 않겠지.
언제나 그렇듯, 여행은 모든 설마를 증폭시키는 묘한 힘이 있다.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도착한 버스 정거장에서도 우리가 원하는 버스만 콕 집어 오지 않았다. 어느 것도 예측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버스 노선이 없다면 모를까, 뻔히 있는 노선이 올 듯 말 듯 하다가 사라지다니. 그것도 하와이잖아. 그것도 호놀룰루라고. 이 세계적인 관광지에서 버스 시간 하나 제대로 예측이 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돼? 서울의 잦은 배차 간격과 정확한 시간 예측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이런 무질서함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지만, 그렇기에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나와 Y는 다시 원래 정거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전에 기다리던 정거장이 배차 간격이 더 좁았기 때문에, 어차피 올 지 안 올지도 모를 버스를 기다릴 거라면 그나마 확률 상으로 이전의 정거장이 나았기 때문이다.
멍하니 버스만 기다린 지 30분은 지난 것 같았다. 오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해라, 하는 심리가 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버스가 눈앞에 섰다. 우스운 일이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무색하게 욕심을 버리니 눈앞에 홀연 듯 나타나다니. 버스는 이래서 시간대가 안 맞나 수긍이 갈 정도로 느리게 달렸고, 오노 씨푸드 앞의 정거장에서 내렸을 때는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지친 상태였다. 호텔에서 출발한 지 거의 한 시간은 지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희망은 있었다. 포케! 그렇게 맛있다는 아히 포케를 먹어야지. 저 멀리 오노 씨푸드의 빨간 간판과 외국인들이 보였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모든 건 끝이 나기 마련! 마지막 힘을 내어 당차게 가게에 들어갔다.
공교롭게도 그날의 아히 포케는 품절이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가게 벽에 붙은 거대한 메뉴판에는 다양한 메뉴 사진이 붙어있었다. 다른 포케는? 메뉴가 하나는 아니잖아. 아히로만 포케를 만드는 게 아닐 거 아냐. 나는 절망적인 마음으로 메뉴를 읽었다. 소유 아히, 소유 타코, 스파이시 아히, 스파이시 타코... 그렇다. 오노 씨푸드는 오직 아히(참치)와 타코(문어)로만 포케를 만드는 가게였고, 아히가 품절이라는 것은 이 가게의 메뉴 반이 품절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소유 아히 아니면 스파이시 아히를 시켜서 이런저런 맛을 즐길 참이었다. 타코라는 선택지는 우리에겐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타코라니. 문어라니. 여기까지 와서 먹는 게 고작 문어 포케라니! 하와이에서 먹으려던 근사한 아히-포케가 (단어까지도 생소하고 멋진데) 타코 포케, 아니, 그냥 문어 덮밥이 되고 말았다. 나와 Y는 무기력한 마음으로 타코 포케를 시켰다. 그중에서 클래식한 소유 타코. 딱히 다양한 맛을 시키고 싶지도 않아, 둘 다 같은 메뉴로 통일했다. 그 맛이 기대도 되지 않았다. 메뉴는 오래 지나지 않아 나왔다. 네모난 스티로폼 박스 안에 담긴 흰쌀밥과 그 위에 얹힌 문어숙회 무침. 나는 한없이 풀 죽은 모양새로 꾸역 한 입을 넣었다. 입에서 익숙한 맛이 씹혔다. 하지만 감칠맛이 풍부하고 무엇보다 문어 주제에 굉장히 부드러웠다. 웬걸, 생각보다 맛있었다.
기대하던 아히 포케가 아닌 문어숙회 비빔밥이었고, 대단한 미적 충격보다는 평범하고 예상할 수 있는 맛의 범주였지만 간만에 입에 들어온 탄수화물의 힘은 놀라웠다. 현지의 신선한 해산물도 한몫했다. 입에 넣을수록, 밥을 씹을수록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하루 종일 먹은 게 카네오헤에서 액티비티를 하며 먹은 도넛 하나와 커피뿐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우리는 오노 씨푸드 가게 앞의 파라솔 벤치에 앉아, 아히였으면 정말 맛있었겠다는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도, 문어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산더미 같은 쌀밥을 모두 먹어치웠다. 아주 든든한 점심에는 분명했다.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건 타코에 대한 불만이나 오노 씨푸드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아히를 먹지 못한 미련에 가까웠다. 다음에는 꼭 아히 포케를 먹으리라. 내게 다음이란 게 있다면.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호놀룰루의 또 다른 관광 맛집, 레오나즈 베이커리Leonard's Bakery였다. 마침 오노 씨푸드에서 걸어서 약 10분 정도의 거리에 레오나즈 베이커리가 있었기에 식사 후 소화 겸 산책에도 딱 좋았다. 나와 Y는 한결 산뜻해진 발걸음으로 옮겼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더니 확실히 움직임이 달랐다. 레오나즈 베이커리는 가까워질수록 길에 달콤한 향기가 풍겨와서 기분까지 좋아졌다. 설탕의 냄새가 곧 행복의 냄새인 것만 같았다. 저 멀리 이탤릭체의 간판과 빈티지한 핑크색 차양막이 보였다. 그리고 길게 줄을 선 사람들까지. 맛집임에 분명한 신호들이 가득 있었다.
레오나즈 베이커리는 '말라사다'라는 포르투갈의 전통 빵을 주로 판매하는 빵집이다. 말라사다는 구멍이 나 있지 않은 동그란 도넛의 일종으로, 겉은 바삭하게 튀겨 설탕을 뿌리고 속은 촉촉하게 유지한, 한국의 찹쌀도넛과도 비슷하게 생겼다. 속을 채울 때도 있고 채우지 않을 때도 있지만 채우지 않은 것이 평균적인 '말라사다'의 형태다. 하와이 포르투갈 이민자들을 통해 전파되어 하와이에 정착했으니 무스비와 어쩌면 비슷한 계열의 하와이 현지 음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레오나즈 베이커리는 특유의 선명한 핑크빛 브랜딩으로 유명한데, 빵을 6개 이상 사면 이 귀여운 핑크색 박스에 담아주기 때문에 한 박스를 사가는 사람들이 많기도 했다.
우리는 설렘을 가득 안고 대기줄에 섰다. 도넛을 만들거나 판매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니다 보니, 줄이 아무리 길어도 생각보다 빠르게 줄어들었다. 앞 선 모두가 한 박스씩 사는 게 보였다. 그러나 Y는 저렇게 많이 사 봤자 결국 다 질리기 때문에 딱 하나만 먹으면 된다고 했다.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게다가 나 역시 애초에 도넛 계열을 좋아하지 않기도 했다. 우리는 Y의 것 하나, 내 것 2개 해서 총 3개의 말라사다를 샀다. 오리지널과 시나몬의 구성으로 된 단출한 조합이 핑크색 봉투에 담아 나왔다.
레오나즈 베이커리는 방문객도 많고 회전율도 높기 때문에 매일매일 빵을 만들고, 거의 만들자마자 판매된다고 한다. 그러니 이 도넛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바로 사자마자 먹는 것이다. 따끈한 온기가 남아있을 때. 우리는 거리에 서서 오리지널 말라사다를 하나씩 꺼내 들었다. 한 입 크게 베어먹으니 단박에 알았다.
아. 이거 꽈배기다.
그것도 밀가루로만 만든, 밀가루 빵에 설탕을 듬뿍 묻힌 꽈배기. 속이 촉촉하고 말캉한. 아주 맛있는 꽈배기임에는 분명했다. 물론 맛있었지만, 한국에서 쉽게 먹지 못할 맛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지만...... 이건 맛이 없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아니, 그러니까 내가 그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와서 먹은 게 고작 문어숙회 비빔밥이랑 꽈배기라고? 이게 무슨 일이람?
지상 천국이라는 하와이에 오면 모든 게 새롭고 낯설고 재미있고 멋질 줄만 알았다. 그런데 하와이에서 이렇게 많은 익숙함을 느끼게 될 줄이야. 어쩌면 하와이는 별 거 아닌 게 아닐까? 내가 너무 대단한 기대를 했던 걸까? 한국에서도 수많은 하와이를 놓쳐왔던 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수백만 원을 들여온 곳에, 그것도 가장 지친 날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선 오후에, 이토록 평범한 맛이라니.
이상하게도 웃음이 났다. 알 수 없는 허망감이나 무력감보다는 우스움이었다. 너무 큰 기대를 했네. 나 자신이 우습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이 상황이 재밌기도 했다. 단박에 어떤 환상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하와이 첫날 비행기에서 내린 그 순간부터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찾아 하와이를 배회하고 있었던 것만 같다. 특별한, 낭만적인, 불변하는, 내가 반드시 여기서 찾아야만 하는, 큰돈을 들인 효용가치가 있는. 그래야만 하는. 하지만 그 순간 알았다. 포케와 비빔밥, 그리고 말라사다와 꽈배기 사이에서.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무언가 투자한 만큼 돌려받아야만 하는 특별함은, 찾으려 하면 찾을수록 점점 그 빛을 잃어가기 때문에 세상 어딜 가도 결코 손에 쥘 수 없다는 것을.
하와이에서 겪은 수많은 실망감(특히 음식에서 온)은 꼽자면 한 두 개가 아니다.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지 알 수 없었던 로코모코와, 그냥 컬러풀한 시럽 뿌린 간 얼음에 불과한 쉐이브아이스와, 무겁기만 디립다 무거운 파인애플 주스까지. (그럼에도 기어코 이 모든 것을 먹어보다니!)
하와이에서의 시간이 지나갈수록 하와이에 대해 알아갔고, 하와이에서의 환상은 깨져갔지만, 도리어 그랬기에 나는 하와이를 더 사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아름다운 바다와 벅차도록 맑은 하늘, 그리고 눈부신 햇살뿐만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음식들과 불편한 대중교통 같은 것들을 알게 되면서.
여행에는 연애 같은 순간이 있다. 모든 걸 따지면서 하나하나 최고가 되길 바라면 결국 어느 순간 실망하고 좌절하고 만다. 어쩌면 연애와 마찬가지로 효율성이 모든 최선의 결과를 내지는 않기 때문이 아닐까. 너무 우상화하거나 낭만화를 하는 습관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완벽한 여행지(또는 사람)는 없기에. 오히려 조금 물러서고 이해하고, 단점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이 여행지(또는 사람)는 나의 일부로 들어온다.
나 역시 하와이의 어떤 순간들을 내 일상으로 끌어오게 되면서 하와이와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아주 특별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하지 않다 해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섬이기에. 그 마음이 결국 이 섬을 특별하게 해준다.
역시 여행이 좋으려면 그런 마음을 버려야만 한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찾겠다는 일념을. 완벽하고 전에 없는 순간을 만들겠다는 집착을.
하와이, 별 거 아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