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n년 전 맥도날드 알바생의 기억
아무리 그래도 팔 할은 좀 오버인가.. 싶지만 빅맥이 내 성장에 한몫을 한 건 확실하다. 나는 빅맥을 만들고 빅맥도 나를 만드는 데 상당히 일조했다.
고1 겨울방학을 앞둔 어느 날, 내년 수학여행으로 호주/필리핀/태국/제주도 중에서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골라 신청하라는 가정통신문이 뿌려졌다. 나는 초등-중학교를 거치면서 학생들을 지방의 이상한 청소년수련원에 처넣고는 3박 4일간 조교들이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기합을 주고 마지막 날 촛불을 들고 울게 하는 이상한 수련회와, 때가 되면 소풍이라는 이름을 달고 시내 놀이공원이나 궁궐에 아이들을 그저 풀어놓는 것이 대체 무슨 교육적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안 갈 수는 없나' 하고 한참 머리를 굴리다가 담임 선생님께 그냥 직구를 던져 물어봤는데 처참히 거절당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친했던 친구들과 함께 필리핀으로 수학여행지를 골랐다. 제주도는 다녀온 적이 있었고 필리핀이 그나마 저렴했던 것이다. 쓸데없는 여정에 그냥 마냥 놀러 가는 기분으로 돈을 마구 쓰고 싶진 않았다. 수학여행비가 아주 비싸지는 않았지만, 가계를 걱정했던 우리 모두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기로 했다. 학생 신분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는데, 패스트푸드점은 가끔 고등학생 아르바이트생을 쓰기도 한다는 걸 들었다. 나는 롯데리아 햄버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아직도) 하루는 학교가 끝난 후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집 근처 맥도날드로 향했다.
동네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와 본 적도 없었기에, 일단 밖에서 매장 안을 살펴보며 한참 서성거렸다. 대형마트 안에 위치한 지점이라, 물건을 고르는 척하면서 지켜보기에 좋았다. 한산한 저녁이었고 넓은 매장 안에는 몇 팀만이 조용하게 앉아서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일하는 사람은 몇 명 없었는데 손님이 끊일 듯 끊이지 않을 듯 드문드문 들어갔다. 한참을 밖에서 구경하다가 손님이 조금 줄어들자, 마음을 다잡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 옆에서 연말 장식을 달고 있는 사람에게 아는 사람인 양 공손히 인사를 하고 말을 걸었다. "저는 이 동네 사는 학생인데요 (이미 교복 입고 있음) 혹시 아르바이트 구하시나요?"
운이 좋았다. 내가 말을 건 사람은 매장의 매니저였다. 어느 학교 다니냐, 알바는 왜 하려고 하느냐, 일이 힘든데 괜찮겠느냐 등등 한참 이런저런 질문을 하던 매니저님은 나의 대답에 웃으면서 '청소년을 쓸 수는 있는데 부모님 허락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여쭤보고 다시 오겠다고 하며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알바를 딱 구한 건 아닌데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내가 용기를 내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때까진 항상 정해진 바운더리 안에서만 말을 했었다. 버스기사, 문구점 직원, 은행원 등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는 해 봤지만, 이번 대화는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려는 협상의 시작이었다. 집에 가서 저녁을 먹으며 엄마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했다. "나 알바 해도 돼?" 엄마는 일찍 사회경험을 해 보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지지해주셨다. 나는 신이 나서 다음날 방과 후 다시 맥도날드에 찾아갔고, 매니저님을 만나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고는 출근 날짜를 정할 수 있었다. 수많은 요소들이 나를 도와줬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용기가 부족해 매장 안으로 발을 디디지도 못했다면? 그날 저녁 매니저를 만나지 못했다면? 손님이 계속 몰려들어와서 대화하는 동안 계속 방해를 받았다면? 엄마가 허락해주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 덕분에 나는 17살에 맥도날드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친구들은 그 해 겨울방학이 되기 전까지 아무도 아르바이트를 못 구했고, 고2가 되어서도 알바를 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생애 처음 막내가 되었다. 노안이라 얼굴은 27살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17살 고등학생이라니까 다들 신기해했다. 장녀라 일찍부터 책임감을 가져야 했고 어딜 가나 어른스럽다는 소리를 들으며 맏이 역할을 했는데 막내가 되니 기분이 오묘했다. 새 크루가 들어와 일손을 보태는 것도 좋은데 고등학생이야? 막내가 생겼네! 다들 관심을 가지고 나를 도와줬다. 학교와 집만을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이 너무 지루했는데, 방과 후에 할 것이 생기니 활력이 돌았다. 곧 겨울방학이 되었고 나는 방학 내내 신나게 일을 했다. 이제껏 내가 해보지 않았던 일을 배우는 게 너무 즐거웠다. 마대로 바닥을 청소하는 것도 즐거우니 열심히 했고, 그건 같이 일하는 크루들의 눈에도 보였을 것이다.
일 자체는 엄청 힘들었다. 어려서 체력이 받쳐줬으니까 했지,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못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100평이 넘는 매장이라 아침 청소도 오래 걸리고, 손님 많은 주말 런치타임에는 해피밀 장난감을 노리는 아이들의 습격과 매장을 꽉 채우도록 줄 선 손님들의 주문을 처리하느라 2시가 지나면 다들 땀에 절어 녹초가 됐다. 아무 이유 없이 나에게 쌍욕을 하는 아저씨 때문에 넋이 나간 적도 있고, 당시엔 진동벨이 없었기에 큰 매장에서 손님들을 찾느라 목이 쉬기도 했다. 저녁 마감은 일찍 시작해도 끝이 없는 것 같았다. 다들 맥도날드에서 별 일 다 해봤는데 어디서 무슨 일은 못하겠느냐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첫 알바를 맥도날드라는 글로벌 대기업에서 시작한 건 참 좋은 선택이었다. 모든 일의 기본을 제대로 배웠기 때문이다. 일을 시작하고 3일은 교육만 받았다. 시스템이 확실하고 내가 외워 적용하기만 하면 되도록 매뉴얼이 정해져 있었다. 심지어 주마다, 월마다, 년마다 마감을 하는 방법도 나눠져 있었다. 뭔가 실수를 해도 매뉴얼을 찾아보면 대처 방법이 있었다. 태평양 한복판에 그냥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서 나 같은 학생도, 관련 경험이 없는 사람도 매뉴얼만 잘 공부하고 익히면 일을 잘할 수 있었다. 자존감을 높여주는 지름길이었다. 내가 공부한 만큼 일의 능률이 올랐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해도 시험 성적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직관적으로 나의 결과가 눈에 보이니까 할 맛이 났다.
지켜야 할 것은 딱딱 지켰다. 나는 청소년이었으니 10시 이후에는 일할 수 없었다. 학교가 끝난 후 6시부터 10시까지 평일 4시간을 일했는데, 10시가 되면 같이 일하던 언니 오빠들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꼬마에게 호랑이 겁을 주듯 '널 보내지 않으면 경찰이 온다'며 늦지 않게 집에 돌아가라고 보냈다. 월급날이 되어 내 사물함을 열어보면 이번 달 몇 시간을 일했는지, 시급은 얼마인지, 초과근무 주휴수당 등등 항목이 세세히 나뉜 명세서가 들어 있었다. 통장 정리를 하면 끝자리에 착착 쌓이는 돈이 내 노동의 결과였다. 최저임금을 받고 긴 시간 일하지도 않으니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내 손으로 돈을 벌어 수학여행비를 조금씩 마련하고 있다는 것이 뿌듯했다. 차곡차곡 모아 수학여행비를 엄마에게 갚았고, 대학을 갈 때는 수중에 300만 원 정도의 돈이 생겼다. 성인이 되자마자 군말 없이 4대 보험도 딱 적용됐다. 당시엔 중요성을 몰랐지만 지금은 그렇게 기본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절히 안다.
일이 힘들어도 마음이 힘들지는 않았다. 각종 이벤트 덕분이었다. 한 달간 열심히 일한 크루를 뽑아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 크루룸에 걸린 일 년짜리 달력을 채워나갔다. 나도 몇 번 이달의 크루가 된 적 있는데, 포상으로 주어지는 소정의 선물도 좋았지만 내가 열심히 일하면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자신감을 충전해주는 기회가 되었다. 몇 달에 한 번씩 일찍 마감 후 크루 파티를 하거나, 다른 매장에 지원 요청을 해서 매장을 맡기고 호숫가로 놀러 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이벤트들을 통해 크루들끼리 친해질 기회도 많았고, 그렇게 친해진 사람들끼리 혹은 일하는 스타일이 잘 맞는 사람들끼리 스케줄을 짜기도 쉬우니 괜한 사람 스트레스 없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평일 오전에 항상 일하시는 이모 크루가 있었다. 나는 항상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만 일해서 일한 지 한참 되어서야 그 이모를 만나게 됐다. 어느 패스트푸드점을 가 봐도 20대 언니 오빠들만 보이니까 당연히 그렇게 채용하는 줄 알았다. 이모도 처음에는 사람들이 쳐다보니까 카운터에 나가지 않고 그릴에서만 일을 하다가, 점점 익숙해지니 마다하지 않고 업무를 다 배웠다고 했다. 몇 년 전 CGV에 갔다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미소지기로 일하시는 걸 봤다. 따뜻한 미소로 티켓을 검사하고 영화관을 안내하시는 걸 보고 그 이모가 떠올랐다. 아무리 파트타임이라도 채용에 나이와 성별 등 조건을 걸지 않는 것이 좋았다. 차별이 적은 것 같았다. (물론 정규직이 되거나 승진에는 여전히 문제가 있지만)
일이 힘들어도 회사가 잘 챙겨준다는 생각이 드니까 오래오래 일했다. 고3 때 수능 준비로 쉬었던 걸 빼면 햇수로는 3년 반을 일했고, 새 크루들을 가르치는 트레이너 생활도 오래 했다. 나는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 사람들이 나를 반겨준 것처럼 새 크루를 반겨주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그냥 매뉴얼을 던져주고 '읽어보세요~' 하는 것보다, 어떻게 잘 풀어서 설명해주느냐에 따라 역량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걸 보는 것도 재밌었다. 사람들이 좋고 일이 괜찮다는 이유로 집에서 자주 떠들어대니까 인연이 또 연결됐다. 내 동생도 수능 이후 같은 맥도날드에서 알바를 시작한 것이다. 한 번도 같은 시간대에 일한 적이 없지만 서로 함께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일터의 이야기가 좀 더 풍성해졌다. 동생도 꽤 오래 일하다가 군대엘 갔다.
가장 좋았던 것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의 지평을 넓힌 것이었다. 나는 학원도 안 다녔고 취미활동도 하질 않아서 만나는 사람들이라곤 선생님과 친구들밖에 없었다. 맥도날드에는 나를 비롯해 30명 가까이 되는 '뉴페이스'들이 있었고 그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하며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리는 것 같았다. 한 살 많은 고3 언니들과는 금방 친해졌다. 영화 <품행제로>의 류승범 공효진을 보는 것 같은 커플도 있었는데, 한동안 조금 무서워하다가 크루 파티를 통해 친해지고 나니 나의 편견과 좁은 시야를 깨닫게 됐다. 호주 영주권을 준비해서 외국에 나가 살겠다는 언니도 있었고, 내 눈엔 연예인처럼 예쁘고 성격도 좋은데 일까지 잘하는 언니도 있었다. 명문 대학교를 다니는 언니 오빠들은 제각각 전공이 달라서 매일 끊임없는 질문 세례에 시달려야 했다. '언니는 뭘 배워요?', '우와 그런 건 어떻게 해요?' 뭔가 엄청나고 대단한 사람들 같았다. 갓 말을 배운 3살짜리가 된 것처럼 쏟아내는 물음에 언니 오빠들은 짜증을 내지도 않고 하하 웃으며 답을 해주곤 했다. 내가 고3 수험시절을 거쳐 대학교에 합격하자 자기 일인 것처럼 다들 기뻐해 주었고, OT는 가지 말라는 최고의 조언을 주었다. (휴 다행이다) 게다가 일할 때도 모두 어른스러웠다. 힘들고 지쳐도 목소리 높이는 사람이 없었고 다들 격려해가면서 일했다.
너무 이상적인가? 기억이 왜곡됐나? 내가 한없이 좁은 세상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을까?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어린 사람들인데 지금의 나 자신과, 또 내가 만나는 손윗사람들보다 훨씬 더 어른이었다. 그때 내겐 단점을 보는 눈이 없었던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단점이 있었을 텐데. 돌이켜보면.. 조금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예민해지는 오빠도 있었고, 이모는 워낙 사람들이 왔다 떠났다 하니까 초반에 정을 안 주셨다. 친해져서 나중에 나에게 휴대폰 팔아 사기를 친 언니도 있었다. 그때의 나도 지금보다 어른스러웠나, 다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의 내 눈은 단점을 찾는 데 더 집중되어 있는 것 같지만, 그때는 세상에 막 눈을 떠서 신기하고 좋은 것만 가득했다. 그때의 눈이랑 한쪽씩 바꾸면 좋겠다.
맥도날드에서의 모든 기억이 무조건 좋았던 건 아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고, 연차가 늘어날수록 회사에 불만도 생겼고 딱딱한 매뉴얼을 꼭 지켜야 하는 것에 너무 융통성 없다며 답답해하기도 했었다. 처음엔 마냥 좋고 신기했던 것들이 안 좋게 변하기도 했다. 매니저 점장들이 계속 바뀔 때마다 매장 분위기가 달라지고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구나 느낄 때도 많았다. 요즘엔 버거 맛도 없다. 매일 빅맥을 먹어도 질리지 않았던 그때의 맛이 온데간데없다. 빅맥은 나를 키웠지만 이젠 힘이 다 빠진 모양이다. 나는 이제 나의 이 할을 채워줄 다른 버거가 필요하다.
가끔 그때의 그 빅맥 맛이 그립다. 빅맥을 먹으며 맥도날드에서 성장을 느꼈던 모든 시기의 내가 자랑스러워서. 용기 있게 알바 구하느냐고 물어봤던 그날은 정말 뿌듯했고, 계약서를 작성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으로 사회에 발을 디디며 내가 드디어 커가는구나, 했다. 그때의 사람들이 그립다. 때 많이 묻지 않고 힘들어도 소소한 즐거움을 찾을 줄 알았던 그때의 나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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