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알림을 꺼버렸다
어린 나는 책을 끼고 사는 아이였다. 엄마는 3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내가 세 살 전에 한글을 떼고 주절주절 보이는 것을 다 읽어대는 아이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책 읽는 것도 재밌었고 말하는 것도 노래하고 춤추는 것도 좋아했던 아이가 어렴풋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 같다. 학교에서 주는 다독상, 글쓰기 상을 나풀나풀 들고 집에 돌아오던 아이. 그냥 책과 글은 내 일상의 한 부분인데 왜 상을 주는지는 잘 몰랐다.(아이러니하게도 일기는 진짜 쓰기 싫었다) 자기가 쓴 글을 암기해서 발표해야 했던 국어 시간의 수행평가가 있었다. 친구들은 글 쓰는 것도 싫고 외우는 것도 싫고 앞에 나가서 발표하는 것도 싫어했는데, 나는 그 3분을 위해 며칠간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학교 수업에 큰 관심도 없던 주제에 그때 왜 그렇게 열심히 했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되지만 그 기억이 생생하다. (심지어 내용도 기억난다. 미디어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중에게 미치는 파급력이 상당하니 말과 행동을 좀 조심했으면 좋겠다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온전히 즐거움만을 위한 독서와 글쓰기는 점점 멀어져 갔고 내신이랑 입시 공부만 열심히 했는데.. 진짜 아이러니하게도 수능에서 (수리 빼고) 언어영역 등급이 제일 낮게 나왔다. 모의고사 초반에는 그냥 시험지 읽고 답만 풀어도 점수가 좋았는데, 작품의 일부분만 수록되니 답을 유추하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능에 나올법한 문학작품들을 빌려다 전체를 읽었다. 내가 원해서 읽는 책이 아니니 속도도 안 나고 재미도 없었다. 전체를 읽고 풀어도 답은 잘 안 나왔고.. 그저 EBS 파이널만 잘 봐도 모의고사에서 똑같은 문제 몇 개를 풀 수 있는 기능적인 시험에 짜증이 늘었다. 점점 언어 점수는 떨어졌고 결국 부담이 되었는지 30분이 모자라 1교시를 망쳤다. 글과 문자가 약간 멀게 느껴졌지만.. 수능은 그냥 그런 시험이다 라고 생각하니 좀 나았다.
또래보다 조금 이르게 디지털카메라를 접하면서 꽤나 오랜 시간 블로그에 사진과 글을 함께 올렸고, 페이스북에도 단상을 쓰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너무 책을 안 읽는구나, 초고부터 제대로 기획해서 글을 쓴 지가 오래됐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바와 과제, 술로 매일을 채우던 대학시절을 지나 사회에 나오자 삶이 일-일-일로 채워져서 책장을 넘길 시간도 없었다. 퇴사를 하면서부터 나는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이제껏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사놓고 쌓아두기만 했던 책을 집어 들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혹은 생산성 있는 고민을 위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끔 예전에 쓴 글을 보면 의아할 때가 있다. 누가 쓴 건가, 다시 작가 이름을 확인해야 한다. 이게 내가 쓴 글이라고? 인정하기 싫을 정도로 창피한 글이 있다. 이런 생각은 어떻게 했었지, 이런 구절이 내 머릿속에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글도 있다. 국으로 앉아있어도 시간이 흐르면 노력 없이 나이를 먹는 것처럼 글쓰기도 그냥 마냥 늘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책도 많이 읽고 자주 읽고 곱씹으며 읽어야 한다. 생각도 많이 하고 그 생각을 시간 날 때마다 머릿속에서 잘 굴려야 한다. 한 줄이 됐든 열 줄이 됐든 쓰기도 자주 써야 한다.
어느 순간 글 쓰는 것이 힘들었다. 한동안 '못 쓰겠다'는 생각만 머리에서 맴돌았다. 이제껏 그랬듯이 편리하게 '시간이 부족하잖아'라는 핑계를 댔다. 노력을 하지 않으니 발전도 없었다. 발전은 무슨, 그 상태 그대로 멈춰있기나 하면 다행이었다. 생각을 멈추고 멍해지는 뇌와, 더 이상 키보드 위에서 춤추지 못하는 손가락을 보는 것. 뼈 아픈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말을 억지로 줄인 적이 있었다. 원래도 누군가에게 말을 먼저 걸거나, 마이크를 쥐어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떠들어대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슨 말이 상황에 적절할지 잘 몰라 한참 허둥대다가 말을 내뱉는 타입이었다. 대화 사이의 어색한 간극을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말은 차마 뇌를 거칠 시간이 없었고, 나중에 머리를 쥐어박아야 하는 실언으로 남곤 했다.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끼던 차에 자연스럽게 내가 속한 곳에서 멀어져 사람들과의 교류를 줄이며 나를 고립시켰다. 그렇게 나는 말을 줄이며 대화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말을 하지 않으면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다. 생산성으로 연결되는 긍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과거를 곱씹고 현재의 나를 미워하며 우울감의 구덩이에 처박는다는 것을 인지한 후부터는 생각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요가 선생님이 매일 말씀하시듯 그저 이 순간에 머무르고 나를 바라볼 것. 내가 지금 해야 하는 것에만 집중할 것. 그럼에도 생각이 끊이지 않는 날에는 책, 음악, 영화, 게임 등으로 주의를 분산시켰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말수를 줄였을 때처럼.. 생각을 하지 않으면 곧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잊어버릴지도 몰라. 괜찮겠어?'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보다는,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버티면서 주의를 계속 돌려줘야 했다. 그렇게 서서히 생각하는 법을 잊게 됐고, 생각이 필요한 시간에도 넷플릭스를 틀고 게임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글로 정리하고 싶은 소재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이 흐릿해도 글은 쓰고 싶다는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책과 브런치의 글을 읽으면서, 영화를 보다가도 깨닫는 것이 있으면 쓰고 싶었고 좋은 음악을 발견하면 리뷰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생각을 하자니 닥쳐올 후폭풍이 두려웠다.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또 어느 모퉁이에서 부정적인 감정과 마주쳐야 할 것이고, 괴로운 현실과 맞물려 하루하루 나 자신에게 고통을 줄 것이 뻔했다.
심리상담을 다시 시작했다. 이런 우울감, 짜증, 화라는 감정을 피할 수 없다면 조금 건강하게 소비하고 싶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대화나 글이 나를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조언을 주셨다. 의미 있고 충만해지는 대화는 끊긴 지 오래였기에 일기를 쓰면서 나를 돌아봐야 했다. 괴로운 하루 순간순간을 돌아보고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일기인지라, 견딜 수 없는 답답함에 얼마 하지도 못했다. 영화 <어바웃 타임> 후반부에서 팀은 바쁜 일상에서 놓치는 작은 것들을 다시 돌아보기 위해 시간을 되돌려 똑같은 하루를 다시 살아보곤 한다. 나는 그때 그런 능력에다 웃돈을 얹어 준대도 매일을 다시 못 살았을 것이다. 그저 살아내고, 버텨내느라 바빴다.
어쩌다 빼도 박도 못하게 시간이 생겨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하기로 했다.
막상 다시 시작하려니 엄청난 두려움이 찾아왔다. 생각을 다시 시작하면 또 감정이 들끓는 것이 아닐까.. 초고를 작성하기도 어려웠고, 계속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면서 원고지에 만년필로 쓰는 게 아님에 감사했다. 단어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 들었고 문단을 이리저리 바꾸기도 많이 했다.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공원을 걸으면서도 계속 글 생각을 했다. 그렇게 글 하나를 완성했다. 발행 버튼을 누르면서도 두려웠지만, 내일 일어나 읽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지우면 된다는 생각에 잠자리로 향했다. 누워서 깜깜한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 시작은 했네.
예전에 쿠키 글에서도 썼듯, 뭔가 이유가 있어서 중단했던 것은 다시 시작하기가 너무 어렵다. 예전만큼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었다. 근데 막상 쓰고 나니, 글이 잘 써졌든 개판이든 그저 한 글자라도 썼다는 것에 하루가 무의미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큰 숨을 들이쉬고 잠이 들었다. 한번 시작하니 다음 날 또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글을 썼다.
요 며칠 내 글을 읽고 반응하는 알림이 계속 오면서 다시금 두려움이 고개를 들었다. 예전에 페이스북이나 블로그에 글 쓰고 좋아요 받을 때랑은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페이스북의 친구들은 나를 알고 있으니 아주 솔직하기는 어려웠고, 블로그 방문자들은 광고업자나 일반 검색 유저들이었지만 가끔씩 좋은 피드백이 오곤 했다.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는 건 베일을 쓴 문인들이 모인 대나무 숲에 벌거벗고 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고 쓰겠다는 열정이 넘치는 문인들. 원하면 베일을 걷어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고 나처럼 짙은 베일을 쓸 수도 있다. 속마음 어딘가를 헤매던 낱말들을 모아 내놓을 수 있는 대나무 숲 같은 곳. 그러다 보니 더 신경 써서 글을 내놓아야 한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내 글이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도 있겠지? (한번 더 다른 시각에서 읽어보고)
베일 사이로 얼굴이 조금 드러나지는 않았나? (이미 내 개인정보는 이역만리에 퍼져 있을 텐데)
.. 재밌나? (본인도 무표정으로 써 놓고는)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다. 재미가 없으면 어때? 내가 좀 드러나면 어때? 각종 소셜미디어에서 좋아요나 댓글, 팔로워에 집착하다가 망한 케이스가 떠올랐다. 내가 쓰는 글은 나의 생각 모음일 뿐이다. 사회 문제를 고발하는 르포르타주도 아니고, 독자들이 다음 회를 기다리는 연재소설도 아니다. 그저 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 온전히 나만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 한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가 담긴 메일은 알림이 필수적이지만, 난 글로 밥 벌어먹고 사는 작가가 아니다. 휴대폰 알림에 일희일비하고 싶지 않아서 브런치 알림을 그냥 꺼 버렸다.
이제 겨우 다시 시작했는데 글 쓰는 취미를 또 잃고 싶지 않다. 잠시 글을 쓰지 않을 때, 사진이라는 취미를 잃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글과 사진은 이렇게 설정을 바꾸고 요렇게만 하면 원하는 결과가 나올 것 같은데, 막상 결과물을 보면 또 예상한 대로만 되지는 않는다. 잘하고는 싶은데 고민과 공부 없이 그냥 지속하기만 한다면 내가 잘 못한다는 걸 증명하게 되는 결과가 될 것 같았다. 글을 포함해 모든 것에 임할 때 항상 잘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내 마음속 일정한 레벨에 도달하지 못하면 실패했다고 여기고 스스로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본다. 사진도, 일도, 탭댄스도,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도, 좋은 연인이 되겠다는 각오도, 공연히 사다가 책장만 차지하는 자격증 책들도,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또 도전하는 스쿼트도. 브런치 알림을 끈 것처럼 잘하든 못하든 신경쓰지 않고 그저 하기로 한다. 잘하지 못해도 그냥 하기로 한다.
하지만 글은 잘 쓰고 싶다. 그런데 잘 쓰는 게 뭔지도 모르겠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 그런데 좋은 글이 뭔지도 모르겠다.
그냥 쓰자.
그냥 우직하게 쓰다 보면 언젠가는 이게 좋은 글이야, 싶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