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과 충족과 변화와 깨달음
요즘은 직사광선을 피해 저녁때쯤 푸르른 공원을 오래오래 산책한다. 지는 해가 잘 보이는 벤치에 걸터앉아 한참 동안 여름의 싱그러움을 눈과 코, 귀와 피부에 담는다. 짧은 다리를 아이처럼 흔들어도 봤다가, 틀어진 골반을 비웃기라도 하듯 양반다리도 했다가 꼬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문득 눈길이 닿은 내 운동화 밑창에 홈이 많이 닳아 있는 걸 발견했다. 비가 많이 오는 영국에서 매일 발이 젖는 게 싫어 방수 기능을 오래 검색해서 찾은 신발이었다. 신으면 워낙에 발이 편하기도 하고, 가진 게 이것뿐이라 매일 걸을 때 함께 해서 그런지 1년도 되지 않아 많이 다친 모습이었다.
어린 날의 내 단화가 떠올랐다.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옷과 신발은 어른의 그것보다 소모되는 시간이 훨씬 빠르다. 아무리 예쁜 운동화를 선물로 받고, 스팽글이 달린 나팔바지를 장만해 봐야 다음 계절이 돌아올 때 예전만큼 딱 맞기란 쉽지 않다. 엄마는 절약정신이 투철한 분이셨고, 주변에 우리 남매보다 한두 살 많은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 친구분들이 많아서 우리는 계절마다 옷을 얻어다 입으며 나름의 아나바다를 실천했다. 얻어다 입힌다고 해서 다 늘어나고 때 묻은 구질구질한 옷들도 아니었고, 심지어 잘 사는 집 애들 옷이라 원단도 재질도 마감도 디자인도 뛰어난 옷들이었다. 우리 취향에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불평할 수는 없었다.
초등학교 때는 그냥 마냥 어울려 놀기 바빴다면, 중학교 때부터는 다들 같은 교복을 입게 되자 당연하게도 사복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늘어났고 당시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다음카페/싸이월드 패셔니스타들의 등장으로 아이들이 유명 브랜드 옷이나 신발을 학교에서 경쟁하듯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교복을 입는 게 나쁘지 않았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복보다는 매일 같은 교복을 입는 게 편했다. 하지만 신발은 다양하게 장만하고 싶었다. 매일 내 기분 따라 변화를 줄 수 있는 건 신발이 유일했다. 교칙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튀는 색깔이나 디자인은 지양해야 했지만 그래도 선택지가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 친구들이 하나둘씩 신고 오는 유명 스포츠 브랜드 운동화는 비싸서 사 달라는 소리도 못 꺼냈다. 그 신발 한 켤레 값이면 적어도 세 켤레는 마련할 수 있는, 디자인이 비슷한 보세 스트릿 단화를 사 신었다. 하지만 그렇게 저렴하다고 해서 색깔별로 세 켤레를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그냥 땡깡을 쓰면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었겠지만 부모님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는 우리 남매는 말도 한마디 못 해보고 속만 끓이는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신발이 닳고 닳을 때까지 신다가 또 다른 운동화를 사 신고, 또 다른 운동화로 넘어가는 일을 반복해야만 했다. 내 동생은 신발보다는 옷에 관심이 더 많았는데, 손길이 안 가는 티셔츠들을 다양하게 입느니 그나마 자기 마음에 쏙 드는 티셔츠 하나를 매일 입고 싶어서 저녁에 스스로 손빨래를 하곤 했다.
대학생이 되고 다시 사복 생활로 돌아가자니 지출은 배로 늘었는데, 옷보다는 신발에 비중이 더 실렸다. 그 어릴 때 땡깡 부리지 못했던 스포츠 브랜드 운동화도 사고, 다양한 컬러와 스타일의 신발을 신발장에 넣어두니 마음이 풍족한 것 같았다. 물론 엄마의 따가운 눈총은 피할 수 없어서 가격을 좀 줄여 말해야 했지만. 그리고 많아 봐야 4-5켤레일 뿐이었다. 신발장을 꽉 채울 정도로 수집하고 관리하는 마니아들에 비하면 소박하기 그지없어도, 나는 어릴 때 채우지 못했던 욕망을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떳떳이 내 손으로 번 돈으로 사서 채울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매일 저녁 손빨래를 하지만 다른 친구들의 눈에는 그저 똑같은 티셔츠를 매일 입고 오는 것으로 보여 놀림을 받았던 내 동생은, 아직까지도 행거가 무너지도록 다양한 디자인의 옷을 사서 시도해보고 실험해보면서 그때만큼 마음에 드는 옷을 찾기 위한 여정 중에 있다.
하지만 잦은 장기여행을 시작하고 짐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 오자 선택의 폭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디자인이 예뻐서 샀던 신발은 다 한국 집 신발장에 몇 년째 처박혀 있고, 지금도 영국에서 내가 가진 신발은 이 밑창이 닳아가는 기능성 운동화 하나에 슬리퍼 하나가 끝이다. (탭슈즈 하나는 제외하고..) 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신발이 없다고 해서 그때처럼 서운하지는 않다. 운동화 하나를 밑창이 닳도록 신어도 예전처럼 마음이 힘들지 않은 이유는, 내가 다양한 신발 컬렉션보다 짐 부피를 줄이는 여행을 선택한 결과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땐 가정형편과 부모님의 반응 때문에 살 수 없었던 것이고, 지금은 내 돈 주고 얼마든지 살 수 있지만 짐에 파묻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뭐든지 빨리 꽂히고, 열정을 다해서 즐기고, 그러다가도 한순간에 질려버리는 성향이 있다. 마치 좋아하는 신발을 며칠 내내 신나게 신다가 밑창이 닳기도 전에 신발장 구석에 쑤셔 박는 것 같다. 한 신발에 꽂혀서 매일매일 신다 보면 좀 더 빨리 신발의 길을 들일 수 있지만, 그만큼 빨리 질리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제 나는 잘 안다. 그래서 신발장에 다양한 컬러와 디자인의 신발을 구비해두는 것처럼, 나는 지금도 여러 가지 일을 벌여놓고 오늘 하고 싶은 건 뭘까 고르곤 한다. 스마트폰에서는 이 책을 읽고 노트북으로는 저 책을 읽는다. 수강 시작한 지 한참만에 드로잉 수업을 끝냈지만 그 이후에 또 다른 온라인 수업들도 한꺼번에 시작했다. 영화도 어떤 날은 내가 정한 주제의 컬렉션에서 꺼내 보고, 어떤 날은 손 가는 대로 보기도 한다. 매번 질려서 포기하고 나면 실패했다는 느낌을 덜어 줄 수 있도록 더욱 많은 선택지를 만드는 것이 나의 방어기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걸 깨달은 이상, 어떤 일은 성향상 내게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취미는 내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아 그만둘 수도 있지만, ‘질려서’ 신발을 구석에 처박는 일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며칠 전까지는 일이 많으니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할 게 너무 많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원에서 내 신발 밑창을 보는 순간 다른 생각이 들었다. 매일 신발 열 켤레를 다 신어볼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 하루에 열 번은 집에 다시 돌아와 신발을 갈아 신고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은 ‘빨간색 운동화를 신고 싶어’라는 마음이 아침에 들었으면, 하루 종일 그 비비드한 컬러와 활동성을 즐기면 된다. 내일은 단정한 검정 옥스퍼드화가 끌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게 선택지가 다양하게 있으니 질릴 걱정 없이, 그날그날 하고 싶은 것에 하루하루 충실하면 될 일이다.
누가 보면 나는 ‘뭐 하나 제대로 끝내는 건 없는 사람’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언젠가는 끝을 보는 사람이고, 끝을 보지 못하는 것에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다. 한 켤레의 신발만 신었을 때는 1년 후에 닳아서 버려야 할지도 모르지만, 열 켤레의 신발을 돌아가면서 신다 보면 어떤 신발은 수명이 조금 일찍 다해 빨리 버려지고, 또 다른 신발이 추가되고, 그러다 보면 컬렉션과 평생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발은 언젠가는 길이 든다. 나는 신발 길들이는 데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는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신발 길들이는 것보다는 다양한 색깔과 디자인을 체험하면서 오래오래 이 컬렉션을 즐기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매일 다른 신발 신으면 너무 좋지 않나? 하루하루가 새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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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plash @Jake Gooss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