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따뜻한 사람이잖아
정통적인 의미의 정물화를 그려보지 않았다. 평소 더 활동적이고 재미있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정적인 사물보다는 인물이나 동물이 우선이었다. 유화를 배우면서 첫 그림부터가 브렉시트 시위 현장이었으니 뭐. 내 MBTI에서 가장 분명한 건 E니까.
두 번째와 세 번째 그림으로 작은 캔버스에 튤립 두 송이와 핫핑크 배경의 해바라기를 그리긴 했지만 뭔가 정물보다는 소품의 의미가 강했다.
정물은 여러가지 일상생활의 사물을 주제로 한 회화를 말한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사과의 화가로 불리는 세잔이 있다. 사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했던 화가다.
세잔 이전의 화가들은 주로 크고 웅장한 스타일로 신, 영웅, 왕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다. 세잔은 구성과 연출이 자유로운 정물에 도전했다. 사과나 오렌지와 같은 정물을 마음껏 배치, 구성해 대상을 그대로 그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질서 자체를 바꾸고자 한 것이다. 원근을 적용하지 않고 시점을 다양화하는 실험을 해가며 정물화만 270여 점을 남겼다.
세잔의 정물화 가운데 가장 알려진 작품인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은 무미건조한 주제를 위대한 미술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덕분에 인류 3대 사과에도 이름을 올렸다. 인류의 3대 사과는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그리고 세잔의 사과다. 요즘은 아이폰의 애플도 포함되어야 할 것 같지만…
내가 처음 모작을 하게 된 정물화는 미국 화가 자넷 리커스(JANET RICKUS)의 작품이다. 이 작가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한동안 작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인간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물을 통해 인간관계를 이야기할 수 있다니, 놀랍기만 했다.
알랭 드 보통은 ‘영혼의 미술관’이라는 책에서 예술의 목적을 발견하려면 어떤 문제들이 우리의 마음과 감정을 다스리면서도 우리에게 곤란함을 안겨주는 것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소위 책 읽기의 목적이 머리에 도끼질이라는 것처럼 예술 역시 그러해야 한다는 것. 단, 책보다는 감성의 영역인 그림에서는 기억, 희망, 슬픔, 균형 회복, 자기 이해, 성장, 감상에 이르는 7가지로 분류한 감정에 다달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자넷 리커스의 그림은 명백히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림을 보는 순간 가족, 친구를 떠올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것이 기억일 수도, 희망일 수도 있겠지만.
인상주의를 연 화가인 마네는 “화가는 과일이나 꽃, 심지어 구름으로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퇴근 후 나홀로 화실인, 회사 숙소 한 켠의 이젤에 빈 캔버스를 놓고 스케치를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오렌지 빛을 더해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그림은 초벌상태에서 수난을 겪었다. 물난리였으니 그야말로 수난이다. 지난가을 태풍인 무이파가 지날 때 그림 작업을 주로 하던 회사 숙소에 물난리가 났기 때문이다. 출장 중인 상황에서 베란다 배관에 문제가 생기면서 거실, 방바닥에 물이 들이쳤다.
다행이라면 대부분의 완성작은 릴에 매달아 두었는데, 하필 초벌인 상태였던 이 작품만 바닥 한편에 새워두었다가 한쪽면 10cm가량이 한동안 물에 노출된 것이다.
캔버스에 묻은 물 조심스럽게 닦아낸 뒤 그늘에 둔 채 한동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 외에도 젯소칠만 해둔 새 캔버스 여럿이 물에 젖어 망가졌다. 완성된 그림이 상하지 않은 것은 무척이나 다행한 일이었지만, 휴일 맑은 날이면 곱게 젯소칠을 해둔 캔버스가 망가져 무척이나 속이 상했다.
관계를 주제로 한 이 그림이 물에 젖은 상태에서 회복하기를 기다리며 관계와 회복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그러던 10월 말, 이태원에서 핼러윈 축제 중에 150여 명이 좁은 골목에서 압사로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잃은 가족들의 슬픔과 관계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곤 했다.
오렌지 빛을 닮은 밝은 에너지를 가졌을 20대 여성들 다수가 황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꼭 20년 전 나와 내 친구들 같아 한동안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고 그 기간을 지났다. 무엇도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희망과 슬픔이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만나고 소통하는 시간을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나만의 작업실인 회사 숙소에서 초벌 작업과 수난을 겪은 뒤, 주말에 그림을 그려오고 있는 미술학원으로 옮겨와 세부묘사를 진행했다.
묘사를 시작하고는 매끄러운 도자기의 질감, 린넨의 접힌 모양, 사과… 그렇다 사과까지. 어느 것도 쉽지 않았지만 즐거웠다. 오렌지빛 매력쟁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그림에는 단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색이 사용된다. 소위 사진 같다는 그림이라면 픽셀이 많다는 의미.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 채워져야 밀도가 높은 사진 같은 생동감이 나온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실력의 은인이 되는 작품을 만나게 된다고들 이야기한다. 관찰력이 확 좋아지면서 뭔가 실력이 확 업그레이드되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을 진행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정적인 그림이었기에 좀 더 조용히 말을 걸고 색을 찾고 맞춰보게 되었던 것 같다.
뜨거운 여름이 한창, 내일부터는 장마가 시작된다고 한다. 오렌지빛 설렘을 기억하며 이 계절을 지나고 반가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약해본다. 다정하게 이야기도 나눌수
있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