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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절주절 신씨네Cine Feb 03. 2019

내 인생에 힘을 더해주는 <빌리 엘리어트>

오늘로 20번째 관람을 마치고 끄적끄적

누구나 힘이 들 때 찾아보곤 하는 영화 한 편쯤 있을 거다. 이따금씩 '나 뭐하고 사는 거지?' 등 내 인생에 대해 회의감이 들 때 보는 영화 말이다. 내게 그런 영화가 바로 <빌리 엘리어트>다.

 

쇠로 된 배들이 백조마냥 유유히 떠다니는 강 위에서, 발레 소년 빌리(제이미 벨)는 그의 선생님 윌킨슨 부인(줄리 월터스)에게 '백조의 호수'의 줄거리를 묻는다. 윌킨슨 부인은 '저주로 백조가 된 공주가 왕자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약속하지만 끝내 결혼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비극적 줄거리를 들려준다. 그 비극에 빌리는 "공주가 죽은 이유는 왕자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인가요?"하고 반문한다. 윌킨슨 부인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위의 이야기처럼 오랜 옛날부터 언제나 여성은 남성의 선택에 의해 삶 혹은 죽음이 결정되어왔다. 선택받지 못함의 이유는 간단하다. 남성이 규정해 놓은 '여성상' 그것에 부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숙, 처녀성, 순종을 강요받는 여성은 살기 위해서 자신을 억누르고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오래도록 고착된 수직적인 권력구조는 비단 남-녀의 관계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은 아니다. 


영화를 살펴보면 1980년대 영국은 가족 내에서의 부계 중심 수직적 위계질서와 기업에서 사측과 노동자 측의 관계 또한 이와 같은 수직적 권력구조를 지님을 알 수 있다. 물론 지금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구조의 근원은 언제나 '생존'과 관련되어있었다. 그러므로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에게 강요되는 남성적인 권투(할아버지부터 배워왔다는 이유로)와 강인함, 폭력은 '남성'으로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생존을 위한 당연함이며, 여성의 것으로 간주되는 '발레'는 남성이 해서는 안 될 금기, 도태라는 이름의 죽음으로 여겨진다.

 

오프닝 시퀀스. '태어나자마자 춤을 췄다'는 고백조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 음악에 맞춰 빌리는 춤을 춘다. 정말로 지치지 않고 춤을 춘다. 하지만 이내 그는 타고난 춤을 멈추고 교육된 남성성에 의해 권투 글러브를 착용하고, 비좁은 사각 링 위에 올라 폭력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그의 몸은 폭력의 행사를 거부한 채 멀리서 흘러오는 피아노 선율에 따라 흔들거린다. 한 대 얻어맞으면서까지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도달한 발레 교습은 그의 내면에 내재한 '아니마'(anima‧남성 내면의 여성성)를 끄집어낸다. '선(線)이 참 예쁘구나' 하는 윌킨슨 부인의 칭찬은 남성으로선 치욕이지만, 아름다움의 욕구를 지닌 인간으로선 칭찬이었다. 이를 치욕이 아닌 칭찬으로 인지한 빌리는 그 이후로 '남성의 세계'에서 외로운 투쟁을 시작한다. 그에게는 남성성에 대한 반항이 다른 의미로 '인간다운'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 투쟁의 무기는 '발레'로 상징되는 쉬지 않고 회전하는 '운동'이다.


<빌리 엘리어트>에 등장하는 갈등과 투쟁은 크게 두 가지이다. 빌리의 아버지, 재키 엘리어트(게리 루이스)와 빌리의 발레를 사이에 둔 인정과 거부의 갈등이 첫 번째이고, 재키가 속해 있는 탄광 회사의 노조와 사측의 타협과 구조조정을 둔 갈등이 두 번째이다. 이 다른 듯 보이는 두 가지의 갈등은 사실 같은 맥락의 갈등이다. 부-자, 노-사의 갈등에서 갑(甲)의 위치에 서있는 아버지와 회사는 상대적 약자의 위치에 서있는 아들과 노동자측(乙)에 대해 자신의 프레임 안에 가두려 시도한다. 이는 오로지 강자의 편의에 따른 약자에의 희생 강요. 하지만 이런 인간다움을 억압하고 순응을 강요하는 프레임은 확연한 거부반응을 일으켰고, 을(乙)들은 각자의 상이한 수단으로써 갑에 대항한다. 


누군가는 거대한 폭력에 맞선 작은 폭력을, 또 다른 누군가는 폭력에 맞선 진심을 다한 노력을 무장한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교차편집으로 보여지는 빌리의 발레 씬과 노조의 파업 씬은 궁극적으로 같은 투쟁 의미를 내포한다.

 

영화 속에서 빌리가 끊임없이 시도하는 '회전' 기술은 객관적으로 살펴봤을 때에 비효율적이고 비정상적인 무쓸모의 운동이다. 윌킨슨 부인이 가르치는 '시선 앞에 점을 찍고 한 바퀴 돌아서 그 자리로 되돌아오'는 운동은 시작과 끝이 같은, 결국엔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며 의미가 없는, 에너지 낭비 운동에 가깝다. 이는 마치 아버지의 뜻에 대항하여 끝까지 발레를 지속하는 빌리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그 무의미한 회전 운동이 관객들의 시선에 인지되고 우아한 곡선으로 다가올 때에야 비로소 아름다움이 되는 것처럼, 빌리의 진심을 다한 회전은 곧 아버지 재키의 시야에 맺히며 마음을 움직이는 계기가 되었다.


 흔히 우리는 이 세상에 국지적으로 존재하는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항하여 순응하며 따라가거나 혹은 억지와 거부, 반항으로 대항하곤 한다. 대표적으로 페미니즘 운동과 지역갈등 등의 민감한 사안에서도 논리와 스스로의 가치로 대항하기보단 감정적 다툼으로 상대했으며, 정치적 불합리에 있어서도 투표라는 실력보단 인터넷 댓글이란 감정으로 대응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응은 언제나 상대의 시선에 인지되지 못하면서 ‘무쓸모’의 에너지 낭비 운동으로 격하되고 만다. 


이처럼 약자로 분류되는 우리에겐 '빌리'와 같이 노력과 진심으로 이룩한 실력이 필요하다. 빌리는 언제나 강자의 억압에 발악할 때, 춤을 췄다. 그런 그의 실력은 백번의 반항보다도 더 설득력이 있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우리의 노력에 응답치 않는 강자의 무심함을 탓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들 스스로가 '고정된 남성'을 버린 빌리만큼의 용기를 냈었는가를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끊임없이 행동하자.


이것이 빌리가 남긴 세상의 불합리를 향한 투쟁의 노하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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