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31일의 기억.
또다시 비가 내리는 아침, 3월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일어나자 마자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샤워를 마치고, 어제 산 따뜻한 보드복을 입고, 가방을 교환하러 시티센터로 향했다. 아침의 T.K. 맥스의 직원들은 지나치게 친절했다. 이거 어디서 교환하냐는 내 질문에 한자한자 똑.똑. 끊어 교환 절차를 설명해 주었다. 심지어 문장도 아니었다. 단어로만 설명을 해주었다. [원하면.교환.물건.원하고.바꿀.가져와.영수증.같이.] 저것도 어떻게 보면 인종차별인데. 교환할 물품을 들고 오라길래, 20유로를 더 주고 가죽자켓을 살까, 하며 2층으로 올라갔더니, 그 새 가죽자켓은 사라지고 없었다. 한치의 고민도 없이, 40유로짜리 <빌런>자켓을 집어 들었고, 일전의 가방이 39.99유로라 1센트를 더 주고, 자켓과 영수증을 받아 들고 매장을 나가는 찰나, 갑자기 시끄러운 알람이 울렸다. 쇼핑몰에 있던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고, 나는 순식간에 아울렛에서 물건 훔친 수상한 동양인이 되었다.
원체가 소심한 성격이라, 내 돈 주고 산 물건을 가게에서 들고 나갈 때도 알람이 울려 곤란한 상황이 생기지나 않을까 불안해 이어폰을 빼고 나가는 성격인데, 쓸데없는 걱정이라 여겼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여기 서있다간 경비가 달려와서 꽤 난처한 꼴이 될 것 같아, 최대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카운터로 갔더니, 일전에 한자한자 똑똑 끊어 설명하던 직원이 또 다시 내 자켓을 가리키며 [바꿀 물건? 가. 카운터.] 라고 애기를 했다. 이쯤 되니 나도 짜증이 나 [아니야. 말 그렇게 안 해도 돼. 아까 교환했어. 그런데 나가는데 알람이 울려서 다시 온 거야.] 라고 쏘아붙였더니, [뭐? 정말? 잠깐만. 오! 주머니안에 택이 들어있었네! 이거 누가 교환해줬어? 이거 때문에 알람 울렸다잖아!] [내가 했어! 정말 미안해! 오,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내가 저 남자 체포되게 할 뻔 했어!] [걱정 마. 그럼 이제 가도 되는 거지?] [응. 미안해!]
과도하게 친절해지고, 말도 빨라진 직원을 뒤로 하고, 무작정 더블린 거리를 걸었다.
걷다보니 부슬부슬 내리는 비 사이로 햇살이 조각조각 스며들었다.
홈스테이로 돌아가자니 괜히 일찍 가기가 멋쩍어, 하염없이 여우비를 맞으며 돌아다니다, 그라프튼 스트릿의 한 약국 앞에서 멈춰 섰다. 한 줄기 햇살이, 젖은 길바닥 위로, 노점의 꽃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사람으로 북적이는 거리에서, 한참을 햇살을 쳐다보며 서 있다가, 갑자기 마음이 동해 박물관으로 가기로 했다. 10여분을 걸어 도착한 인류학 박물관은, 크지 않았지만, 전시의 구성이 정말 알찬 박물관이었다. TV 쇼인 바이킹이 아일랜드에서 촬영중이라 그런지, 아일랜드에서의 바이킹 역사에 대한 특별전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인류학 박물관에서 유물 하나하나를 뜯어보며 4시간을 넘게 시간을 보내고 나니 배가 고팠다. 배는 고프고, 먹을 것은 정말 많은데, 먹고 싶은 것이 없었다. 분명 몸은 어제 산 보드복 덕분에 따뜻한데, 계속해서 추운 기분이 들었다. 따끈한 무언가가 너무 먹고 싶었다. 한참을 헤메다 들어간 곳은 한 샌드위치 체인점이었다.
샌드위치와 수프를 5.7유로에 세트로 시킨 후, 나온 수프를 떠먹자 몸이 훈훈해지는 기분이었다.하지만 여전히 뭔가 허전했다. 진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사람이 그리웠다. 나는 원래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성격이기에, 혼자 낯선 곳에 똑. 하고 떨어져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인간이라, 사회적 동물이라. 남의 집 눈칫밥 먹는 홈스테이 싱글룸 생활은 외로웠나 보다. 수프를 먹고 다시 인류학 박물관으로 향하려다가, 문득 눈에 '예이츠 2015'라는 광고들이 눈에 들어왔다. 광고를 따라가다 보니, 아일랜드 국립 도서관이 나왔다.
햇살이 너무 예뻐서, 안으로 들어가기 전 10여분 정도를 앉아 있다가, 지하 전시실로 내려가 2시간정도를 예이츠 전시에서 보낸 뒤, 홈스테이로 향했다. 저녁은 디가 만든 냉동식품이었고, 샤워도 굉음을 질렀고, 방에서는 여전히 옥수수 쉰내와 내 향수가 섞인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