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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피디 Feb 27. 2024

치앙마이에선 온전히 내 속도대로 살 수 있었다

사진으로 보는, 여자 혼자 열흘간의 느릿느릿 치앙마이 여행

한달간의 리프레시 휴가가 주어졌고, 난 치앙마이에 왔다.

아침 먹으러 가던 길. 아침 바람은 선선해서 모든게 더 아름다웠고, 자꾸 멈춰서 사진을 찍게 되었다.
Cafe rosemary. 아침을 먹으면서 책을 보기에 딱 좋은 공간.

여행지를 고르는게 쉽지 않았다. 가본 도시가 많다는건 표면적 이유였고, 사실 나는 요즘 좀 위축되어 있었다. 여러 인생의 크고 작은 부침으로 작년 초부터 감정의 에너지가 바닥나기 시작해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는 어떤 도움 없이는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토록 좋아하는 여행의 기회가 한달이나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중한 한 달을 후회 없이 끝내주게 잘 보낼 자신이 없어서 목적지를 정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사실은 갈 곳이 없었던게 아니라 어디에 갈 자신이, 힘이, 에너지가 없었다.

매일 갔던 Om Ganesha 요가원
치앙마이에서 느낀 행복의 팔할은 '옴 가네샤 요가원'이었다. 수업이 정말 좋았고 적당히 힘들었다.

파리 마일리지 항공권을 예매했다가 취소했다가, 뉴욕 숙소도 찾아봤다가, 지금 시즌엔 호주가 좋다길래 시드니 혼자 여행을 검색해봤다가. 매일 검색만 하다가 끝이 났다. 이제 진짜 예약을 해야 할 때 즈음, 오랜 고민이 무색하게 난 그냥 치앙마이행 티켓을 끊었다. 그나마 나를 확실하게 생기있게 하는 순간이 요가였고, 치앙마이에서는 하고 싶은만큼 요가를 할 수 있었다. 여러번 와본 곳이니 익숙하고, 여유 부리며 공부할 카페도 많았다. 관광지가 크게 많지 않아서 어딜 구경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없었다. 그리고 안식휴가의 가장 중요한 미션인 '새 회사에 지원할 포트폴리오 만들기'를 완수하기에도 적합해보였다.

님만해민의 거리. 너무 좋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포폴 파일을 열지도 않았다. 지원할 회사의 채용공고를 여행 첫 날 열어보긴 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이런 역량이 필요해요', '이런 분과 함께하고 싶어요', '합류하면 이런 일을 해요', '총 6개의 채용 단계를 거치게 돼요'.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내려가며 깨달았다.

아, 나는 이직이 하고 싶은게 아니었구나.
꽃이 흐드러졌던 브런치 카페 On the bread 가는 길
이런 집 사서 이주하고 싶다, 치앙마이로.

나는 그냥 도망치고 싶은 거였다. 의미 없이 충실히도 반복되는 너절한 일상에서, 더 이상 성취감을 느낄 수 없는 나의 일터에서, 변화하고 싶지만 작은 역동도 쉽지 않은 고체처럼 굳어버린 내 서울의 삶에서. 당장 손에 잡히는 변화라는 게 겨우 이직이었고, 단순 회로에 따라 회사를 옮기자 마음 먹었지만 내 깊은 내면은 이미 알고 있었다.

네임 밸류가 조금 더 좋은 회사에 가서 비슷한 일을 하는거,
그게 과연 축 늘어진 네 삶을 건져올려 줄거라고 생각해?


양심상 차마 닫지는 못해서 계속 계속 왼쪽으로 밀려난 채 작아지고 있는 채용 공고 창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니야, 이건 아닌 것 같아.  

정말 매일 방문했던 님만해민의 fruit stand. 망고랑 수박을 저만큼 사도 3천 얼마였던 천국.
끝내줬던 에어비앤비 뷰. 이런 뷰를 보면서 망고를 먹다가 이력서를 쓴다는건 너무 안 어울리잖아.

그래서 난 쉬었다. 잘 쉬고 있다. 매일매일 요가를 하고, 신선한 과일을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요즘 재미 붙인 영어 공부도 맘껏하고, 책을 보면서. 그리고 내 안의 목소리에 좀 더 곁을 주었더니 작년 초부터 나를 괴롭히던 서울에서의 뒤죽박죽한 생각들이 점차 또렸해졌다. 이직이 답은 아니야.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 부모님의 기대만 아니라면 아직 결혼도 원치 않아. 어디 매이고 싶지 않아. 자유롭게, 더 자유로워지고 싶어.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어. 인생의 next step이 필요해.

더운 나라의 노을 지는 시간은 마법 같다. 유난히 평온하고 행복하고 충만해져서, 삶이 갑자기 되게 살만하게 느껴진달까. 마사지 받으러 가던 어느 올드타운의 거리.

내가 언제나 여행을 좋아했던 이유는 바로 이거였다. 서울에서의 나보다 외국에서의 내가 항상 더 나답기 때문에. 나의 내면의 소리가 훨씬 더 잘 들리기 때문에. 은연 중에 날 억압하는 것들이 없는 곳에서, 나 스스로의 기대치가 사회의 그것과 동기화되지 않는 곳에서, 난 가장 나다운 생각을 뱉어낸다. 그리고 그 방향이 언제나 더 행복했다.

정처 없이 걷던 님만해민의 마지막 밤

두번째 읽고 있는 책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면의 목소리란 완전히 새로운 생각과 개념이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실은 오랜 시간 심사숙고한 결과일 가능성이 큽니다.

주말에만 여는 징짜이 마켓(러스틱 마켓)에서 본 정말 멋진 그림. 한국까지 들고 갈 수 없어서 구매는 못했지만, 저 부처님 너무 맘에 들었다.

내면의 목소리. 그걸 어떻게 듣는지 당최 모르겠던 나날들 속에서 조금은 발전이 있었던 이번 여행. 남은 시간이 더 길다면 좋겠지만, 위축됐던 내 자신이 항공권을 열흘도 못되게 끊어놓은 바람에 아쉬운 시간들이 저물어간다. 기간을 연장할까 고민도 했지만 미련을 남겨둔 채 가기로 했다. 서울의 삶을 살다보면 마음을 피신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동앗줄 같은 곳이 필요한데, 그 한 가닥을 남겨두는 행운으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나만의 속도대로 흘러갔던 치앙마이는 완벽했고,

또 속도 조절이 필요할 때 부여잡는 마음으로 다시 찾게 될 것이다.


왼) 요가 끝나고 방앗간처럼 들렀던 브런치 카페 On the bread / 오) 매일 아침 유기농 요거트로 만들어먹던 망고볼
5년만에 다시 들렀던, 정말 그대로였던 The Barn Eatery and Design
맛있게 먹었던 양식들. 위치안부리 로스트 치킨 / 흐언므언짜이
안녕, 또 올게! 곧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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