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리품(loot), 파밍 심리, 그리고 금화로부터 파생되는 게임 경제
몬스터의 HP가 바닥나기 직전 간신히 마지막 일격을 날린다. 몬스터는 쓰러지며 사방에 금화와 아이템들을 떨어뜨린다. 파티원들은 웃으며 재빠르게 주워 담기 시작한다. 잠깐만, 이 몬스터는 대체 어디서 이 많은 전리품들을 끌어왔을까? 이 장면은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게임 속에선 너무나 당연하다. 오히려 소량의 금화나 아이템을 드롭하지 않으면 기분이 언짢아질 정도다. 조금만 곱씹어 보면 참 희한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적을 쓰러뜨리면 보상을 얻는다'는 공식은 과거 테이블탑 RPG 시절부터 이어져 왔다. 대표적으로 던전앤드래곤에서 플레이어들은 던전을 탐험하며 괴물을 처치하고, 주사위를 굴려 전리품(금화나 장비)을 획득하곤 했다. 게임마스터(GM)가 “이 몬스터에는 50 골드 정도가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배정하면, 플레이어들은 전리품을 수집해 캐릭터를 강화하거나 다음 모험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했다.
디지털로 게임 환경이 옮겨지면서 이러한 전리품 구조는 “몬스터가 자동으로 골드, 아이템을 드롭한다”는 단순화된 방식으로 정착되었다. 몬스터가 쓰러지는 순간 시스템에서 전리품을 생성하니 플레이어 입장에선 테이블탑 RPG에서 처럼 일일이 주사위를 굴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전투를 통해 얻는 보상이 훨씬 직관적으로 자리잡았다. 괴물을 처치하면 무언가 이득을 챙길 수 있다는 판타지 문법이 널리 퍼져 있었기에, 새로운 시대의 게이머들도 이 변화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단순해 보이는 장치 안에는 게임 기획자의 치밀한 의도와 플레이어의 심리가 얽혀 있다.
(1) 왜 몬스터는 금화를 가지고 있을까?
서두에 제기했던 “몬스터는 왜 금화를 갖고 다닐까”라는 질문을 다시 들여다보자. 게임 기획자들은 처음부터 게이머가 전투를 반복하고 싶어지게 하는 동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Hopson, 2001). 플레이어가 굳이 적을 잡을 이유가 없다면 그냥 전투를 회피하거나 스토리만 진행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금화 또는 아이템이 떨어지게 하여 전투의 즉각적 성과를 눈으로 보이게 하면 행동이 쉽게 강화된다. 이는 ‘부분 강화’ 또는 ‘확률 기반 보상 설계’라고도 불리며, 심리학적으로는 스키너의 행동주의 이론과 이어진다. 적을 해치울 때마다 어느 정도의 보상이 있다는 사실, 가끔은 희귀 아이템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플레이어를 계속 전투에 몰두하게 만든다.
(2) 전투와 성장, 탐험의 연쇄
게임의 전체 흐름을 통제하기 위해 몬스터의 아이템 드롭을 의도적으로 넣는다. 사냥으로 번 돈으로 상점에서 무기를 사고, 그 강화된 전투력으로 더 강한 몬스터를 잡고, 다시 더 많은 돈을 얻는 순환은 캐릭터 성장의 핵심 루프가 된다. 레벨 디자인 측면에서 이 루프가 커질수록 플레이어는 더욱 어려운 지역으로 이동하며, 더 풍부한 보상을 노린다. 사냥과 보상이 일련의 선순환을 만들어 “내가 점차 강해진다”는 성취감이 생기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1) 확률 기반 파밍 구조
디아블로 시리즈처럼 핵앤슬래시 장르에서 몬스터가 무작위로 떨어뜨린 아이템을 줍는 쾌감은 전투의 중독성으로 이어진다. '이번에 전설급 아이템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전투에 대한 의지를 계속 불러일으킨다. Zendle & Cairns(2018)는 비디오 게임 루트박스(무작위 보상 상자)가 “도박과 중요한 구조적·심리적 유사점을 지닌다”라고 밝혔는데, 몬스터 드롭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희소 아이템이 어느 순간 뚝 떨어질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큰 동기가 된다.
(2) 부분 강화 이론과 반복 행동
행동주의 심리학자 스키너(B. F. Skinner)가 말한 부분 강화(Partial Reinforcement) 원리를 떠올리면, 어느 시점에서든 당첨될 수 있는 구조가 행동을 강화시킨다는 점이 이해된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에서 강적을 처치하면 희귀 소재가 낮은 확률로 떨어지기에, “한 번만 더 잡아보자”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고 맴돈다. 적은 가능성을 남겨 두는 것만으로도 플레이어는 전투 반복을 멈추기 어렵게 된다. 이 시스템이 구조적으로 가챠와 닮았다고 지적하는 견해도 많다.
(1) 사냥 → 돈 → 강화 → 더 강한 적
몬스터가 돈을 뿌리는 또 다른 이유는 게임 내부 경제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플레이어가 전리품으로 번 돈을 상점에 쓰고, 더 세진 전투력으로 다시 대형 몬스터를 상대해 더 많은 돈을 벌며, 그 흐름이 캐릭터 성장과 경제 순환을 동시에 촉진한다. 라그나로크 온라인에서 초반 포링 등을 잡아 소액 제니를 모으고, 싼 무기를 구입한 뒤, 점차 강한 몬스터로 옮겨 가며 벌이를 늘리는 구도가 대표적이다. 이 과정이 플레이어의 레벨업과 동시에 마켓(아이템 거래소)이 활발해지도록 만들기까지 한다.
(2) 인플레이션 문제와 통화정책
그러나 몬스터가 무한정 돈을 풀면 게임 내 화폐 가치가 붕괴해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수 있다. 실제 온라인 MMORPG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인데, 메이플스토리 사건이 대표적이다. 특정 몬스터가 버그로 과도한 메소를 떨어뜨리면서 갑자기 거부가 된 유저들이 시장을 교란했고, 개발사 측에서 긴급 패치와 골드 회수 작업을 해야 했다. 이는 현실 세계에서 정부가 돈을 마구 찍으면 인플레이션이 치솟고 경제가 흔들리는 것과 유사하다.
에드워드 캐스트로노바(Castronova, 2005)는 가상 세계에서도 실제처럼 통화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게임 회사가 골드 소모처(아이템 강화비, 탈것 구매 등)를 도입하고, 확장팩마다 새로운 대규모 비용을 마련해 돈을 계속 끌어들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설명한다. 대형 게임회사에서는 한국은행에서 통화정책을 담당하던 전문가를 영입해서 게임 경제 관리를 맡긴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몬스터=재화 공급원으로부터 파생되는 가상의 경제와, 경제 밸런스는 원활한 게임 운영에 핵심 요소다.
몬스터가 화폐만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게임 장르나 세계관에 따라 탄약, 허브, 로봇 부품, 설계도 같은 형태로 바뀌기도 한다.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에서는 좀비에게서 골드 대신 생존 자원을 얻고, 보더랜드 시리즈나 SF 슈팅에서는 적 로봇이 부품, 회로를 파바박 떨어뜨린다. 결국 형태만 다를 뿐 “전투로 뭔가 유용한 것을 얻고, 그걸로 성장한다”는 본질적인 구조는 그대로 유지된다. 드래곤 퀘스트 초반의 슬라임이 2~5 골드를 주는 것도, 몬스터를 잡으면 돈이 생긴다는 기초 학습을 플레이어에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몬스터를 잡으면 동전이 우르르 떨어지는 뻔한 장면 뒤에는, 의외로 다층적인 설계와 심리가 어우러져 있다. 테이블탑 RPG 시절부터 적을 물리치고 보상을 얻는 전통이 디지털로 이어졌고, 게임 디자이너들은 이를 행동 강화와 무작위성으로 확장해 플레이어 몰입을 극대화했다. 심리학적으로는 도박과 유사한 중독성을, 경제적으로는 가상 세계를 굴리는 주요 동력(화폐 공급)이 되고, 때론 통화정책을 고민해야 할 만큼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왜 몬스터가 금화를 갖고 있지?”라는 질문은, 단순 농담이 아니라 게임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현실 논리와 거리가 멀지만, 바로 그 덕분에 RPG와 액션 게임에서 전투가 계속 이어지고, 플레이어는 다음에 더 대단한 뭔가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이다. 작은 동전 한 줌이지만, 그 안에는 개발자의 치밀한 기획, 플레이어의 파밍 욕구, 가챠적 중독성, 그리고 “화폐란 무엇인가”라는 경제학적 고민까지 담겨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은가? 결국 이 작은 전리품 하나가 게임 세계를 움직이는 큰 엔진이 된다는 점은, 우리가 RPG나 핵앤슬래시 게임을 통해 매일 경험하고 있는 장대한 이야기의 동력원이다.
Behavioral Game Design - Hopson, J. (2001)
- 부분 강화와 보상 설계를 통해 플레이어의 행동을 강화하는 게임 기획 이론을 분석한 글
Video game loot boxes are psychologically akin to gambling - Zendle, D., & Cairns, P. (2018)
- “루트박스는 구조적·심리적으로 도박과 상당히 유사한 면을 지닌다”라고 주장하며, 무작위 보상의 위험성을 지적
Synthetic Worlds: The Business and Culture of Online Games - Castronova, E. (2005)
- 가상 세계 경제에 대한 대표적 연구. MMORPG에서도 통화정책과 인플레이션 관리가 현실과 비슷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