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년을 관통하는 귀향의 서사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를 오랫동안 좋아해왔다. <메멘토>부터 <오펜하이머>까지, 그의 작품들이 지닌 깊이 있는 서사와 구조적 실험성은 항상 나를 매료시켰다. 그의 모든 작품을 다 본 팬으로서, <덩케르크>를 처음 관람했을 때 특별한 인상을 받았다.
최근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를 작년에 읽은 후 2회차로 읽으면서, 약 3000년의 시간차를 두고 만들어진 이 두 작품 사이에서 유사한 지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특히 '귀향'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두 작품이 보여주는 다층적 플롯 구조와 바다를 통한 귀환의 여정은 놀라울 정도로 공명한다.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는 트로이 전쟁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오딧세우스의 10년 여정을 그린다. 작품은 세 개의 뚜렷한 서사선을 따라 전개된다.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찾아 나선 텔레마코스의 여정이, 다른 한편으로는 귀향을 위해 투쟁하는 오딧세우스의 모험이 진행된다. 동시에 이타카에서는 페넬로페가 구혼자들의 압박에 지혜롭게 대응하며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는 서사가 병렬적으로 전개된다. 페넬로페가 낮에 짠 베를 밤에 다시 풀어내는 지혜로운 지연 전술은 귀향을 기다리는 시간의 확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세 서사선은 작품 후반부에서 극적으로 합류하며, 가족의 재회와 왕국의 회복은 귀향 서사의 정점을 이룬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는 이와 유사한 다층적 구조를 채택한다. '하늘'(비행기 조종사, 한 시간), '바다'(민간 구조선, 하루), '잔교'(좌초된 병사들, 일주일)이라는 세 가지 시간축과 공간에서 진행되는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전개되다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하나로 수렴한다. 이 비선형적 시간 구조는 귀향의 절박함을 각기 다른 층위에서 강조한다. 한 시간의 시간축에서 움직이는 파일럿에게는 분초를 다투는 생존의 문제인 반면, 일주일의 시간축에서 움직이는 병사들에게 있어서 구조는 지속적인 책임과 헌신의 문제가 된다.
두 작품 모두 파편화된 시점에서 출발해 단일한 순간으로 수렴하는 구조를 통해 귀향의 복잡성과 운명적 만남의 순간을 극대화한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한 선형적 귀환이 아닌, 다양한 경로와 시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귀향의 복합적 의미를 강조한다.
전통적 영웅담이 고향을 떠나 모험을 시작하는 '출발'에 초점을 맞춘다면, <오딧세이아>와 <덩케르크>는 모두 '귀환'에 방점을 둔다. 오딧세우스의 여정은 트로이 전쟁이라는 영웅적 서사 이후의 이야기다. 그의 진정한 시련은 승리 후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키클롭스, 세이렌, 스킬라와 카립디스 등의 위험을 극복하며, 오딧세우스의 귀향은 그 자체로 새로운 영웅담이 된다.
이 과정에서 오딧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의 명장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한 인간으로 변화한다. 칼립소의 섬에서의 7년간 체류나, 거지로 변장하여 자신의 왕국에 들어가는 모습은 영웅의 정체성이 외적 영광이 아닌 내적 지혜와 인내로 재정의됨을 보여준다.
<덩케르크> 역시 전통적 전쟁 영화의 문법을 뒤집는다. 승리나 정복의 서사가 아닌, 퇴각과 생존, 그리고 귀환의 이야기를 그린다. 패배 속에서 찾은 작은 승리, 즉 33만 명의 병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 영웅담의 핵심이 된다. 처칠의 유명한 연설("해변에서, 우리는 싸울 것이다")은 이러한 귀향의 가치를 역설한다.
영화 속 병사들, 특히 톰 하디가 연기한 파일럿 패리어는 전통적 의미의 영웅적 행위보다는 생존과 타인의 귀환을 위한 희생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영웅상을 제시한다. 귀환 후 병사들이 대면하는 민간인의 시선—적에게서 도망쳐 온 비겁한 자들이 아닌 "집으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인정—은 귀향 자체가 지니는 가치를 강조한다.
두 작품은 영웅의 정의를 재고하게 한다. 진정한 영웅은 정복자가 아닌, 역경 속에서도 귀향의 의지를 잃지 않는 자, 혹은 타인의 귀향을 가능케 하는 자임을 시사한다.
두 작품에서 바다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오딧세이아>에서 바다는 오딧세우스의 귀향을 방해하는 주요 장애물이다. 포세이돈의 분노, 바다 괴물, 폭풍 등은 끊임없이 그의 귀향을 지연시킨다. 특히 포세이돈이 일으킨 폭풍으로 오딧세우스가 파이아케스 족의 해변에 표류하게 되는 장면은 바다가 지닌 위험과 운명의 무작위성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다는 그가 이타카로 돌아갈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다.
<덩케르크>에서도 바다는 이중적 존재다. 영국 해협은 독일군의 포위망에 갇힌 병사들에게 탈출구인 동시에 극복해야 할 장벽이다. 깊은 바다는 대형 군함이 접안할 수 없게 만들어 구출을 어렵게 하지만, 결국 민간 소형 선박들의 거대한 함대가 이 바다를 건너 귀향의 다리를 만든다. 석유에 뒤덮인 바다에서 불이 붙는 장면과 물에 빠진 병사들이 몸부림치는 장면은 바다가 생명의 통로이자 죽음의 장소임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전달한다.
두 작품에서 바다는 단순한 지리적 공간을 넘어 삶과 죽음, 망명과 귀환, 절망과 희망 사이의 경계로 기능한다. 바다를 건너는 행위는 물리적 이동을 넘어 정신적, 실존적 여정을 상징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두 작품 모두에서 바다가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운명적 힘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오딧세우스는 신의 도움 없이는, 덩케르크의 병사들은 민간인들의 협력 없이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
<오딧세이아>에서 오딧세우스의 귀향은 단순히 공간적 복귀를 넘어선다. 20년의 부재 후,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립하고, 왕국의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물리치는 장면은 단순한 복수가 아닌 혼란에서 질서로의 회귀를 상징한다. 귀향 이후의 삶 역시 작품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오딧세우스가 늙은 아버지 라에르테스를 만나는 감동적인 장면과 이타카의 질서 회복 과정은 귀향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임을 보여준다.
티레시아스의 예언대로 오딧세우스는 귀향 이후에도 다시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점은 귀향이 영웅 서사의 종결이 아닌 순환의 일부임을 암시한다. 이는 영웅의 여정이 본질적으로 끝나지 않는 순환적 구조임을 시사한다.
<덩케르크>의 귀향 역시 물리적 귀환을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병사들의 귀환은 패배의 상징이 아닌, 새로운 투쟁을 위한 재생의 순간이 된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이다"라는 처칠의 연설이 암시하듯, 이 귀향은 순환적 서사의 일부이자 새로운 시작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생존한 병사가 신문을 통해 자신들의 귀환이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모습은 역사 속에서 귀향의 의미가 재구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작품은 귀향이 결코 단순한 종착점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 정체성의 재확립, 공동체의 재건을 위한 필수적 과정이다. 진정한 귀향은 단순히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변화된 자아로 고향을 재발견하는 과정임을 두 작품은 강조한다. 지혜로워진 오딧세우스, 전쟁의 본질을 체험한 덩케르크의 병사들은 모두 귀향을 통해 새로운 자아와 공동체적 의미를 발견한다.
3000년의 시간차를 두고 창작된 두 작품은 인간의 근본적 열망으로서 '귀향'의 보편성을 증명한다. 호메로스가 그린 고대 그리스의 영웅이나 놀란이 포착한 현대 전쟁의 익명의 병사들이나, 모두에게 귀향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닌 존재론적 완성을 향한 여정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차기작은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를 원작으로 한 <오디세이>라고 한다. 덩케르크를 통해 이미 '귀향'의 서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바 있는 놀란이 이번에는 고전 중의 고전인 <오딧세이아>를 어떻게 해석할지 많은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그의 특기인 비선형적 시간 구조와 다층적 플롯 전개는 <오딧세이아>의 복잡한 서사 구조와 완벽하게 어울릴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오딧세이아>와 <덩케르크>는 단순한 과거의 텍스트가 아닌, 현대인의 귀속과 정체성, 그리고 공동체적 회복에 관한 영원한 질문을 던지는 살아있는 이야기로 남아있다. 한창 제작이 진행 중일 놀란의 신작 <오디세이>가 고전의 현대적 재해석을 통해 우리 시대의 '귀향'에 대한 또 다른 통찰을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