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서

가상공간의 정화 의식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와 소포클레스 비극, 디지털 게임의 감정 체험

by 신영

최근 약 2~3달간 그리스 고전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브런치에 글을 못쓴 핑계라면 핑계다. 짬짬이 시간 날 때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잡기보다는 오롯이 텍스트에 집중했다. 이 기간 동안 읽은 책 목록은 글의 맨 뒤에 붙여놓겠다.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은 책을 꼽으라면 소포클레스의 비극인데, 그중에서도 『오이디푸스왕』이었다.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의 충격과 끔찍한 결말을 읽고 난 후의 묘한 해방감까지, 이 모든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임을 깨달았다. 동시에 이는 내가 평소 게임을 플레이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경험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현대 게임은 복잡한 서사 구조와 상호작용을 통해 플레이어가 가상 인물이 되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매체다. 어려운 게임에서 반복 실패 후 성공했을 때의 해방감, 감동적 스토리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그리스 비극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유사해 보였다.


왜 인간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가상으로 반복 추구하는가? 약 2,500년 전 그리스 비극의 감정 정화 기능이 현대 게임에서도 작동한다면, 이는 가상 체험을 통한 감정 해소가 인간의 보편적 욕구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개념이 현대 디지털 문화에서 어떻게 변주되는지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제6장에서 비극을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함으로써 그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를 이루어내는 행동의 모방으로 정의했다. 카타르시스는 원래 의학적, 종교적 맥락에서 사용되던 정화 개념으로, 몸속 불순물 배출이나 영혼의 더러움 제거를 뜻했다. 카타르시스의 핵심은 연민과 공포의 상호작용이다. 연민은 사람이 부당하게 대접받는 모습을 볼 때 생기고, 공포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불행해지는 모습을 보며 생긴다.


이 두 감정(연민과 공포)이 단순히 배출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수준으로 조화를 이루며 정화된다. 이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중용 개념과 연결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마땅히 그래야 할 때,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서,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감정을 갖는 것은 중간이자 최선이며, 바로 그런 것이 탁월성(덕)에 속하며, 비극은 이러한 감정 교육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감정도 이성처럼 교육 가능한 영역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미메시스)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학습 방식으로 보았다. 인간에게는 어릴 때부터 이미 모방 본능이 있으며, 모방을 통해 배운다고 했다.


이는 플라톤이 『국가』에서 모방을 현실의 그림자라며 비판한 것과 정반대 입장이었다. 비극의 카타르시스는 모방을 통한 학습과 직결된다. 관객은 비극적 인물의 행동과 결과를 관찰하며 안전한 거리에서 극한 감정을 체험하고 교훈을 얻는다. 실제 상황을 겪지 않고도 간접 경험을 통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정치학』에서도 음악이 격정적 성격의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여 해방감을 준다고 했듯이, 예술 전반이 정신 건강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 치료적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왕』의 완벽한 카타르시스

『오이디푸스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최고의 비극으로 꼽은 작품이다. 테베 역병의 원인을 찾으려는 오이디푸스의 노력이 자신의 정체 발견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완벽한 카타르시스를 만든다. 관객은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의 살인자임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살인자를 반드시 찾아 처벌하겠다"라고 선언할 때, 관객은 전율을 느끼지 않았을까?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당신 자신이 그 오염의 근원"이라 할 때, 오이디푸스는 분노하며 거부하지만 관객은 진실을 안다. 이런 극적 아이러니가 지속적 긴장감을 만든다. 이오카스테가 라이오스가 "삼거리에서 강도들에게 죽었다"라고 말할 때 오이디푸스가 불안해하는 것도, 코린토스 사자와 늙은 목동의 증언을 통해 진실이 드러나는 것도 모두 계산된 서스펜스다. 관객은 진실 발견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갈망한다.


클라이맥스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장본인임을 깨닫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식과 반전이 동시에 일어나는 순간이다. 오이디푸스의 절규와 자해, 그리고 장님이 되어 나타나는 참혹한 모습을 보며 관객은 극도의 공포와 연민을 느낀다. 공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끔찍한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이고, 연민은 ‘진실을 알고자 했을 뿐인데 왜 이런 벌을?’라는 안타까움이다. 그런데 이 끔찍한 장면 후에 관객이 느끼는 것은 묘한 해방감이다. 극도의 감정적 긴장이 해소되면서 정신적 정화가 일어나는 것, 이것이 카타르시스다.


『오이디푸스왕』의 깊이는 운명과 자유의지의 복잡한 관계에서 나온다.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피하려 코린토스를 떠났지만, 바로 그 행동이 신탁을 성취시켰다. 인간의 노력이 오히려 운명을 완성시키는 역설이다. 관객은 인간 존재의 한계와 운명의 불가항력성을 깨닫는다. 동시에 끝까지 진실을 추구하는 오이디푸스의 의지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한다. 이런 복합적 감정이 단순한 공포나 연민을 넘어선 깊은 카타르시스를 만든다.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가 전장에서 영웅적 죽음을 맞는 것과 달리, 오이디푸스는 지적 탐구 과정에서 파멸한다. 무력이 아닌 지혜에서 탁월함을 보이지만, 바로 그 탁월함이 파멸의 원인이 되는 그리스적 비극성을 완벽하게 구현한다.


『안티고네』의 도덕적 갈등과 복합적 카타르시스

『안티고네』는 개인 운명보다 도덕적 원칙들의 충돌에서 비극이 발생한다. 안티고네는 오빠 매장이라는 종교적 의무를, 크레온은 반역자 불매장이라는 국가 명령을 고수한다. 두 정의가 정면 충돌하는 상황이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에게 말한다: "제우스가 그런 포고를 한 것도 아니고, 죽은 자들과 함께 사는 정의의 여신이 인간들 사이에 그런 법을 정한 것도 아닙니다." 이는 자연법과 실정법의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론에 비추어 보면 안티고네와 크레온 모두 극단적 선택을 했다. 안티고네는 종교적 의무에만 매몰되어 정치적 현실을 무시했고, 크레온은 국가 권력에만 집착하여 인간적 정감을 저버렸다. 두 주인공의 파멸은 이런 극단성의 필연적 결과다. 하이몬은 아버지와 연인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그는 아버지에게 신들이 인간에게 준 가장 귀중한 선물인 이성을 언급하며 합리적 설득을 시도하지만, 크레온이 받아들이지 않자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한다. 기성세대의 완고함이 젊은 세대까지 파멸로 이끄는 비극성을 보여준다. 테베 원로들로 구성된 코러스는 관객과 무대 사이의 매개 역할을 한다. ‘인간보다 더 신기한 것은 없다’는 유명한 제1코러스 가는 인간의 양면성을 노래한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문명을 건설하지만, 그 힘이 자기 파멸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코러스는 처음 크레온의 권위를 인정하다가 점차 우려를 표한다. 이런 집단적 목소리를 통해 관객은 개인적 감정을 공동체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현대의 개인화된 미디어 소비와 대조적으로, 그리스 비극의 카타르시스는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는 기능도 했음을 보여준다.


현대 게임의 몰입과 카타르시스의 디지털 변주

1) 안전한 실패와 반복적 정화

현대 게임이 제공하는 가장 독특한 경험은 '안전한 실패'다. 그리스 비극에서 주인공의 파멸은 되돌릴 수 없지만, 게임에서는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카타르시스를 만든다. 플레이어는 실제 위험 없이 죽음, 배신, 상실 등 극한 상황을 경험한다. 어려운 구간에서 수십 번 실패하더라도 실제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미메시스의 현대적 구현이다. 가상 경험을 통해 실제 상황의 대처 능력을 학습하는 것이다.


그런데 게임의 실패-재시도 시스템은 비극과 다른 패턴을 만든다. 비극의 일회적 강렬한 카타르시스와 달리, 게임에서는 좌절감과 성취감이 반복 교차한다. 감정의 고조-해소-재고조 사이클이 현대인의 만성적 스트레스와 지속적 감정 관리 필요성에 더 적합할 수 있다. 높은 난이도 게임에서 같은 구간을 반복 도전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처음 자신감으로 시작하다가 실패가 거듭되면서 좌절감이 누적된다. 그러나 성공 순간의 해방감과 성취감은 오이디푸스의 진실 깨달음만큼 강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매번 실패할 때마다 더 나은 전략을 개발하며 학습한다는 점이다.


2) 선택과 책임의 인터랙티브 경험

서사 중심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단순히 이야기를 관람하지 않고 직접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이는 그리스 비극의 수동적 관람과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많은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누구를 구할 것인가?’, ‘진실을 말할 것인가?’, ‘복수할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와 같은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한다. 이는 『안티고네』의 안티고네와 크레온이 직면한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갈등이다.


그런데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직접 선택하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책임감이 훨씬 크다. 『안티고네』를 읽을 때는 ‘안티고네가 다르게 행동했으면’이라고 3자 적인 연민을 느끼지만, 게임에서는 상황의 주체가 되어, ‘내가 다른 선택을 했으면’이라고 후회한다. 몇십 시간에 걸쳐 가상 인물들과 모험하고 대화하며 위기를 함께 극복하면서, 가상의 캐릭터가 마치 나 자신인 것처럼 동일시하고, 친구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래서 게임 속 인물이 배신하거나 죽을 때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가 진짜 슬픔이나 분노를 느낀다. 이는 그리스 비극의 연민과 비슷하지만 훨씬 개인적이고 직접적이다.


흥미롭게도 많은 게임이 그리스 비극과 유사한 운명론적 구조를 가진다. 플레이어에게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어떤 선택을 하든 비슷한 결말로 수렴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는 『오이디푸스왕』에서 오이디푸스가 운명을 피하려다 오히려 완성시킨 것과 같은 구조다. 자유의지의 착각을 통해 현대인의 삶에 대한 은유를 제공한다.


3) 디지털 공동체와 새로운 코러스

현대 게임의 독특한 특징은 개인적 경험이면서 동시에 집단적으로 공유된다는 점이다. 플레이어들은 온라인 포럼, 소셜미디어, 스트리밍을 통해 게임 경험을 나누고 토론한다. 충격적인 스토리나 어려운 구간에 대해 수많은 플레이어가 비슷한 감정 반응을 보인다. "이 장면에서 울었다", "이 보스 때문에 밤새웠다", "이 선택 때문에 고민했다" 같은 경험담이 광범위하게 공유된다. 이는 그리스 극장에서 관청들이 함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것과 유사하다. 차이점은 물리적 공간이 아닌 가상공간에서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특히 게임 스트리밍 문화는 그리스 비극의 관람과 매우 유사하다. 시청자들은 스트리머의 플레이를 보며 긴장하고 함께 기뻐하고 좌절한다. 실시간 채팅을 통해 수많은 시청자가 동시에 반응을 공유하는 모습은 그리스 극장의 집단적 반응과 본질적으로 같다. 스트리머가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 할 때 시청자들이 활발하게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하는 것은 『안티고네』의 코러스가 사건에 논평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린 것과 유사한 기능을 한다.


4) 개인화된 카타르시스의 가능성과 한계

현대 게임 카타르시스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화 가능성이다. 그리스 비극이 모든 관객에게 동일한 경험을 제공했다면, 게임은 각 플레이어의 성향과 능력에 따라 다른 경험을 만든다. 많은 게임이 적응형 난이도 조절 시스템을 사용한다. 플레이어가 너무 많이 실패하면 은근히 난이도를 낮추고, 너무 쉽게 성공하면 높인다. 이는 플레이어가 항상 적절한 긴장감과 성취감을 느끼도록 돕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감정의 중용과 매우 유사한 개념이다.


그러나 명확한 한계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중독성이다. 그리스 비극은 1년에 몇 번의 축제 때만 공연되어 강렬한 일회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반면 게임은 언제든 접근 가능하고 반복적 자극에 의존하기 때문에 과도한 몰입의 위험이 있다. 또한 가상 경험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현실의 감정 대처 능력이 약화될 수 있다. 게임에서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는 플라톤이 『국가』에서 예술의 모방이 현실 인식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 것과 유사한 문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중용의 관점에서 적절한 게임은 감정 정화에 도움이 되지만 과도한 게임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가상 경험을 현실 도피가 아닌 현실 대처의 연습장으로 활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스 고전을 통한 배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관 대립은 현시대의 게임 관련 논쟁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게임(예술)을 현실 도피나 시간 낭비로 보는 시각은 플라톤의 입장(모방의 모방)과, 교육적 도구로 보는 시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유사하다. 개인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 쪽에 무게가 실린다. 게임에 과하게 몰입할 경우 부정적 측면도 분명히 있지만, 적절히 활용하면 감정 정화와 학습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 금지나 허용이 아닌 건전한 활용 방안을 찾는 것이다.


앞으로도 틈날 때마다 아직 읽지 못한 그리스 고전을 집어들 것 같다. 특히 서양철학의 뿌리인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계속 읽어나갈 계획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처음 읽었을 때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은 그 당시 쓰였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논리와 설득력 있는 서술 방식에 감탄하며 읽었다.


그리스 고전을 읽으며 현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도 한층 넓어졌다. 이전에는 게임을 유희적 관점으로 주로 바라봤지만, 이제는 인간의 근본적 감정 욕구를 충족시키는 문화적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시대가 변하며 그 형식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안전한 공간에서 극한 감정을 체험하고 정화되고 싶은 인간의 욕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인간다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읽은 책들>

KakaoTalk_20250608_172239151.jpg 고전이 왜 고전이라 불리는지 알게 되었다. 아직 읽기를 망설인다면 강력히 추천한다. 꼭 읽어보시라.

- 호메로스, 『일리아스』,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2015 <재독>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2015 <재독>

-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강철웅 역, 아카넷, 2020

- 플라톤, 『플라톤전집 1』中 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2017

- 플라톤, 『플라톤의 국가·정체(政體)』, 박종현 역, 서광사, 2005 <재독>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김재홍, 강상진, 이창우 역, 길(도서출판), 2011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박문재 역, 현대지성, 2022

-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박문재 역, 현대지성, 2021

-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박문재 역, 현대지성, 2024

- 헤로도토스, 『역사』,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2009

- 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2011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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