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의 원형을 찾아서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시학>에 이어 네 번째로 만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었다. 역시나 그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구성과 정밀한 문체로 무장해 있었다. <범주론>, <명제론>의 논리학적 기초 위에서 전개되는 실용 논리학으로서의 성격이 뚜렷했는데, 이 두 책을 읽지 않고 시작하다보니 도입부부터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았다. 이미 두 책을 읽었다는 전제로 서술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수사학>에서는 개연적 전제들로부터 출발하는 논증을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도입부의 개념 정의들을 지나 2권의 감정론, 3권의 문체론으로 나아가면서 점차 읽기가 수월해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을 통해 설득이라는 인간의 근본 행위를 해부한다. 2300년 전 아테네에서 시작된 이 작업이 여전히 유효한 까닭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욕구 자체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방식과 맥락이 달라졌을 뿐이다.
이 책은 설득을 기술로 규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수사학은 감각이나 직관에 의존하는 예술이 아니라, 학습과 분석이 가능한 체계적 지식이다. 그는 설득의 수단을 에토스(화자의 성격), 파토스(청중의 감정), 로고스(논증 자체)라는 삼분법으로 정리하면서, 각각의 작동 원리를 세밀하게 분석한다. 이러한 분류법은 현대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출발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도 그 설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이 삼각구조는 <정치학>에서 논한 정치적 설득과도 일맥상통하며,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실천적 지혜 개념과 연결되어 하나의 통합된 사유 체계를 보여준다.
감정을 다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은 체계적이면서도 엄밀하다. 플라톤이 감정을 이성의 대척점에 놓고 경계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 자체를 논리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분노, 두려움, 연민 등 각각의 감정이 발생하는 조건과 그것이 판단에 미치는 영향을 마치 자연과학자처럼 관찰하고 기술한다. "분노는 우리 자신이나 우리 친구에 대한 명백한 경시로 인해 생기는 고통을 수반한 복수 욕구"라는 정의하고, 연민에 대해서는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마땅치 않은 불행을 당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규정하며, 연민이 일어나는 세 가지 조건—고통이 심각할 것, 부당할 것,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을 것—까지 제시한다.
논증 구조에 대한 분석 또한 정교하다. 완전한 삼단논법 대신 일상 담화에서 주로 사용되는 생략 삼단논법에 주목한 것은 수사학이 학교 논리학이 아닌 실용적 설득술임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가 완전한 삼단논법이라면,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니까 죽을 거야"는 생략 삼단논법이다. 사람들은 모든 전제를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으며, 청중이 생략된 부분을 채워넣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 책을 21세기에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한계도 분명하다. 우선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제를 배경으로 한 공적 연설 중심의 논의는 현대의 다층적 미디어 환경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바이럴 확산, 알고리즘에 의한 정보 필터링, 멀티모달 커뮤니케이션 같은 새로운 변수들은 고전 수사학의 틀로는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상정한 화자와 청중은 기본적으로 동질적인 시민 계층이었다. 여성, 노예, 외국인은 수사학적 실천의 주체로 고려되지 않았으며, 이는 현대의 다원주의적 소통 환경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제다. 문화적 다양성과 가치관의 충돌이 일상화된 오늘날, 보편적 설득 원리를 찾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이 책이 여전히 읽힐 만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설득의 본질적 구조를 꿰뚫는 통찰 때문이다. 2024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Make America Great Again" 슬로건이나 해리스의 "We're Not Going Back" 메시지를 대입해보자. 전자는 과거에 대한 향수(파토스)와 현재 체제에 대한 불만(로고스), 그리고 화자의 강인함(에토스)을 결합했고, 후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파토스)과 진보의 논리(로고스), 그리고 안정성의 이미지(에토스)를 활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삼각형 안에서 모든 정치적 설득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수사학>을 읽는 것은 결국 인간의 소통 행위에 대한 메타인지를 기르는 일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설득하려 할 때 어떤 전략을 구사하는지, 우리 자신은 어떤 방식으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려 하는지 성찰할 수 있게 된다. <정치학>에서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규정했듯이, <수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설득하는 동물'로 파악한다. 설득은 폭력의 대안으로서 문명이 고안한 소중한 도구다. 그 도구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더욱 절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