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세계 사이에서

-<토니오 크뢰거>를 읽고

by 가을장미

<토니오 크뢰거>는 토마스 만의 중편소설이었다. 그는 20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로 1929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토니오 크뢰거>를 읽으면서는 험한 등산로에서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괴테와 실러, 헤세와 카프카 등 내가 아는 독일작가의 작품들도 읽기가 만만치 않았던 것처럼. 아마도 문학뿐 아니라 철학까지 아우르며 예민한 예술가와 정상적인 시민으로서의 두 세계에 사이에서 갈등하며 방황했던 작가의 깊은 탐구와 사색이 담겨 있어서였을까. 완독에 의미를 두었지만 소설의 내용과 작가의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하기까지는 몇 번의 되새김질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왜 이렇게 작가의 문장이 어려울까? 그는 결국 토니오 크뢰거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가? 이 책을 통해서 새로 알게 된 내용을 내게 어떻게 적용하면 좋을지 등등. 거대한 독일문학의 산맥에서 토마스 만이란 또 하나의 산을 접해 본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그에게 노벨상을 준 대표적인 작품인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나 ‘바이마르의 양심’이라 불리게 된 <마의 산> 등 장편의 험한 독서 등반은 당분간 미뤄둔다. 나는 아직 그의 장편소설을 읽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시민’ 임을 깨달았기에.

소설의 주인공 토니오 크뢰거, 소설은 그 제목만으로도 내용을 암시하고 있었다. ‘크뢰거’란 아버지 쪽의 독일 성씨이었고, ‘토니오’란 어머니 쪽의 이탈리아식 이름으로 이국적이고 유별한 이름이었으니까. 푸른 눈의 훤칠한 그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독일인으로 북독일의 부유한 상인가문으로 고위직 영사였고, 검은 머리카락의 정열적인 어머니는 피아노와 만돌린을 잘 연주하는 남쪽 나라 출신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토니오는 어머니를 닮아 남국적인 갈색 얼굴에 거무스레한 두 눈과 입 그리고 턱은 말할 수 없이 연약해 보였다고. 십 대의 소년인 그는 어머니의 예술가적 기질을 받아 남몰래 시를 끄적거리는 아이였다. 푸른 눈의 금발소년 한스 한젠이란 친구를 좋아했지만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이므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다.”는 말처럼 자신의 사랑과 관심만큼 되돌아오지 않는 짝사랑에 괴로워한다. 잘 생긴 한스는 토니오와는 정반대 성격으로 승마를 좋아하고 수영을 잘하는 우등생으로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토니오는 실러의 <돈 카를로스>를 읽고 감동을 받는다. 한스에게 외로운 왕이 믿었던 사람에게 배반을 당해 운다는 책의 내용을 말하지만 한스는 그런 책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토니오의 깊은 외로움이 묻어 나오는 대목이었다.

몇 년 후 토니오는 금발의 아름다운 잉에보르크란 소녀가 발레 하는 모습에 반한다. 금발의 교만함이 묻어나는 예쁜 모습, 그러나 자신에게 무관심한 그녀의 푸른 눈을 볼 때면 그녀에게 자신은 낯선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쓰린 고통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풍요롭고 생기에 넘치는 사랑을 동경했다. 자신의 시가 출간되는 날이 와도 아무런 감명도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한스와 잉에는 자신의 창조력이 닿지 않는 저 반대편에서 마주 보고 서 있는 것에 가슴 아파한다. 그가 쓰는 언어가 그녀가 쓰는 언어와 달랐기 때문이라 여겼지만 그럼에도 행복했단다. 토니오는 변치 않고 잉에를 사랑할 거라고 마음먹지만 한스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자신을 깨닫는다. 그리곤 이 지상에선 변치 않는 마음이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움과 환멸감을 느끼게 된다. 어린 나이에 벌써 자기 존재의 한계와 절망을 경험한다. 잉에에 대한 사랑은 독일의 서정시인인 슈토름의 아름다운 시 <난 자고 싶은데 넌 춤을 추겠다는구나>을 인용하며 서로 너무나 다름을 느끼며 첫사랑은 끝이 난다.

그 후 유서 깊은 크뢰거 가문의 붕괴가 시작된다. 집안 어른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또 아버지의 죽음이 뒤따른 후 저택은 팔리고 회사는 청산 절차를 밟게 된다. 어머니는 상을 당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탈리아 연주자와 재혼을 하고 남쪽으로 가버린다. 토니오도 어린 시절 친근한 벗이었던 정원의 분수와 호두나무 그리고 사랑했던 바다와도 작별하면서 고향을 떠났다.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남쪽나라로 간 그는 그곳에서 육욕의 뜨거운 죄악의 구렁텅이로 깊이 추락했으나 또한 그 때문에 번민한 것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면서. 그리곤 지상에서 가장 숭고하다고 생각되는 힘, 삶에 군림하는 정신과 언어의 힘에 완전히 젊은 날의 열정을 품고 몸을 바친다. 자신에게 맞는 길을 달려갈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이제부터 토마스 만은 토니오를 통해 자신이 작가로 겪은 내면의 갈등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그 힘은 그의 시선을 예리하게 해 주었고 위대한 단어를 꿰뚫어 보게 해 주었고 영혼을 들여다보게 해 주었지만 결국 그가 본 것은 우스꽝스러움과 비참함이었단다. 인생의 본질은 그다지 고상하지 못하다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적인 철학이 묻어났다.

나도 학창 시절 가을이면 낙엽을 책갈피에 넣고 <목마와 숙녀> 같은 시를 필사하던 소녀였건만. 결혼과 육아를 시작하며 생활인으로 더욱더 ‘철저한 시민’으로 변하지 않았던가. 가계부를 쓰면서 허리띠를 졸라맸었다. 문학을 잊고 살아도 지장이 없었으니까. 세월이 많이 흐르고 지금에서야 서리가 내리는 가을에 핀 장미처럼 뒤늦게 글을 끄적이는 사람이 되어있다. 내 안에도 숨죽이고 있던 토니오의 기질이 조금은 있었나 보다. 아마도 그건 아버지의 영향이었으리라. 직업군인으로 예편한 아버지,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었기에 생존을 우선해 살았을 사람. 아버지는 팔순을 앞두고 갑작스러운 암 판정을 받고 몇 개월 투병을 하다가 하늘로 가셨다. 직업군인으로 엄격하고 무뚝뚝한 아버지였지만 근면하게 살아오신 분. 그런데 말년 병상에서 자신은 하기 싫은 일만 하며 살았다고 너무나 가슴 아픈 말씀을 하셨다. 충격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숨겨진 외로움이 느껴졌다. 어릴 적 다른 식구들은 다 잠이 들어도 아버지와 나는 <명화극장>을 밤늦게 까지 보곤 했었다. 또 나의 성장하는 모습을 담은 앨범에는 애정을 담아 딸에게 쓴 단정한 손글씨가 건재하다. 지금도 내 책상엔 아버지가 거금을 들여 사서 쓰시던 <국어대사전>이 놓여있다. 아버지, 아버지는 과연 어떤 일을 하고 싶으셨을지 죽음 앞에서 속마음을 드러낸 회환에 가슴이 아려왔었다.

마침내 창작자로 근면하게 몰두했던 토니오는 탁월한 작가로 성공한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등지고 눈에 보이지 않게 일하면서, 재능을 남과 어울리기 위한 장식품으로 생각하는 소인배들을 한없이 경멸했다. 훌륭한 작품이란 곤궁한 삶의 압박에 시달릴 때에만 생겨나고 생활하는 자는 창작할 수 없으며 완전한 창작자가 되려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서···.” 여자 친구인 러시아 태생의 화가 리자베타에게 자신의 이런 창작의 고민들을 토로한다. 예술가와 시민사이에서 예술가로서의 <인식>과 <언어>에 대해서 작가가 가지는 갈등을 자의식 과잉일 정도로 깊은 사유로 풀어놓는다. 토마스 만처럼 자신의 화두를 소설을 통해 이렇게 세밀하게 언어화할 수 있는 것은 알릴 수 있는 것은 소설가만의 특권 같이 여겨졌다. 부러웠다.

토마스 만은 예술가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그들이 갖는 고민을 깊이 파고들어 갔기에 이 책이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명작의 반열에 들어 있으리라. 토니오는 끊임없이 관찰해야 하는 ‘인식의 문제’ 심지어는 ‘인식의 구토’란 단어를 쓰면서 햄릿을 예를 든다. 작가는 눈물 젖은 감정의 베일을 뚫고 통찰해야 하고 해야 한다고...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의 입술을 더듬는 순간에도 미소 지으며 관찰한 것을 옆에 챙겨두어야 한다고. 이는 비열한 짓이라서 분노가 치민다고. 공감한다. 나도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항상 관찰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또한 ‘언어의 문제’를 자세하게 말한다. 언어는 어쩌면 인간을 구원한다기보다는 감정을 차갑게 만들어야 표현이 되기에 냉혹하고 허영심이 강한 사기꾼과 같다고 그래야만 구원되어 처리된다고, 하지만 자신은 허무주의자는 아니며, 예술가는 평범한 것이 주는 희열에 대한 은밀하고도 애타는 그리움을 알아야만 한다고. 난 항상 밖을 향해 눈으로 두리번거리고 촉수를 뻗었으나 토니오는 소박하고 작고 평범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토니오의 긴 이야기를 들은 리자베타는 예술에 헌신하면서도 시민의 삶 또한 동경하는 토니오를 보고 ‘길을 잃은 시민’이라며 냉정한 언어로 정의하고 처리해 준다.

이제 그는 오랜만에 다시 고향을 찾아간다. 자신이 살았던 저택이 공공 도서관이 된 것을 본다. 처음 시를 써서 서랍에 몰래 넣어두었던 책상이 벽 쪽에 붙어 있는 것을 본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고 도리어 시인은 범죄자로 오해가 되는 일을 당한다. 고향을 뒤로하고 그는 전형적인 고뇌하는 인간 햄릿의 땅, 덴마크로 다시 여행을 떠난다. 발트해가 보이는 호텔에서 어느 날, 그는 어릴 적 짝사랑했던 한스와 잉에가 손을 잡고 들어오는 것을 본다. 그들은 연인이 되어있었다. 예전처럼 잉에와 춤을 추었듯이 무도회가 열렸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 나서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하다 그곳을 떠난다. 그리곤 리사베타에게 약속대로 편지를 쓴다. “자신은 남다른 가능성과 남다른 위험성을 내부에 지닌 부모의 혼합물이었고, 그분이 결합해서 예술의 길로 잘못 들어선 시민, 훌륭한 가정교육에 대한 향수를 지닌 보헤미안,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예술가가 나오게 되었다”라고 인정한다. “자신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며 한 세계에 질서와 형상을 부여해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사람들의 밝고 생기에 넘치며 평범한 사람들을 깊이 사랑을 담아, 그곳에 그리움과 우울한 질투와 아주 조금의 경멸과 순결하기 짝이 없는 충만한 행복감의 결실을 맺는 유익한 사랑을 하겠다고 끝을 맺는다. 시민에게 조금의 경멸을, 그는 그들과 자신과도 화해하는 것 같다.

토마스 만의 소설들은 시민, 즉 나와 같은 대중들에겐 어려울지라도 그에게 노벨상의 영예와 권위를 주며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름대로 그 까닭은 생각해 보면 방대한 신화와 예술 그리고 심오한 철학까지도 다 아우르며 인간의 본성과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고찰을 담고 있어서 일 것이다. 어찌 보면 문학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 귀족적인 면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야 뛰어난 지성들의 시대를 읽는 역할이 크리라 생각한다. 토마스 만의 경우 자전적인 이 소설에서 예술가가 얼마나 고뇌하는지. 목숨을 걸 정도로 치열해야 하는 일인지를 느끼게 했다. 아마도 그런 인식과 언어에 대한 고뇌가 또한 창작가들에게는 보편적인 일이었을 것인데 토마스 만이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소설화하여, 형상화했다는 후한 점수를 준 것일까. 고작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집필한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 노벨상의 영예를 차지하다니. 백여 년을 훌쩍 뛰어넘어선 지금도 이 작품이 명작의 목록에 여전히 들어 있다는 것은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깊은 문학 산봉우리에 비밀이 많이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다.

노벨문학상으로 선정되는 이유를 간단히 생각해 본다. 아마도 당대의 문학의 흐름을 대표하는 작품들이었으리라. 80년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은 환상과 현실이 융합된 마술적 리얼리즘, 90년대에 귄터그라스는 역사의 어두운 얼굴을 우화적으로 묘사, <채식주의자>를 쓴 최초의 아시아 여성 수상자 인 한강작가의 <채식주의자>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 선정의 이유였다. 수상작들은 전문가로 이루어진 수많은 심사위원들의 엄격하고 까다로운 심사의 과정에서 대체로 인간본성과 그 시대의 고민을 담고 있고, 문화에 대한 거울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고로 내게는 난해하더라도 <토니오 크뢰거>가 명작으로 사랑받는 문학적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아마도 창작의 고뇌와 갈등이 너무나 처절할 정도로 잘 묘사했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 언어로 형상화하는가에 관해서도 그만의 치열한 과정들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통했다.

내 결혼생활이란 산, 생각지도 못했던 낭떠러지도 있었고 가끔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었다. 그런 고통의 시절을 지나서야 뒤늦게 내 안의 그 무엇이 꿈틀거린 것일까. 토마스 만과 같은 천재는 토니오의 입을 통해 “문학이란 결코 천직이 아니라 저주라고, 예술이 서민적인 <직업>이 아니라 운명으로 미리 정해진 저주 같은 직업이라고” 했지만 난 그 단계까지 가기는 너무나 소박한 시민일 뿐. 지금 내 계획에는 전혀 없던 작가의 길로 들어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내 안의 것들을 길어내려 하고 있다. 나의 두 세계, 창작과 독서 그리고 아내와 엄마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시간과 건강의 문제로 고민한다. 시간이 아깝다고. 그리곤 내 인생에서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사소한 것들을 찾는다. 그것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면서 고통을 즐기고 있다. 생각해 보니 모든 시기가 다 아름다웠다. 내가 몰랐을 뿐. 지금이 또한 가장 아름답다는 걸 이젠 알아간다. 그리고 ‘길을 잘 찾아든 시민’이라 여긴다. 어설픈 문사의 흉내쟁이인 내게 따끔한 충고와 메시지를 주는 <토니오 크뢰거>, 그동안 이 소설의 산을 등반하느라 길을 헤맨 시간들을 충분히 보상해 주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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