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가 지나자 바람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게다가 잦은 비로 더위는 완전히 기세가 꺾였다. 절기의 법칙이었다. 보고 싶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던 영화의 종영이 가까워진 것을 알았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던 저녁, 오전부터 볼일을 보느라 피곤했지만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작품성 있다고 소문난 영화에 몰입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생의 정오를 지난 나에게 요즈음 가장 귀한 것은 후회와 미련을 남기지 않고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었으니까.
영화는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화제작이었다. 각종 매체에서도 기사화되었지만 선입견을 갖게 될까 봐 읽지 않았다. 하지만 스크린에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자 주제곡 ‘안개’처럼 이해의 가시거리를 확보하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배우들의 연기며 독특한 시나리오와 영화음악 등 여러 가지가 뇌리에 남았지만 그다지 감동이 없었다. 영화 마니아인 지인은 너무나 좋아서 몇 번씩 보고 대본집까지 샀다고 했는데… 독서광이기도 한 그녀에게 영화란 수고한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며 작은 사치라 했다. 일주일에 한 편 이상을 보는 그녀는 자신이 들인 시간과 관심에 비례해 영화를 볼 줄 아는 단단한 근육이 생겼으리라.
감독은 얼마나 작품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고민을 했을까. 시나리오 작업부터 촬영까지 긴 기간과 막대한 제작비용 등도. 하지만 투자한 것에 비해 상업적인 성공은 보장할 수 없기에, 이것이야말로 많은 창작자의 딜레마가 아닐까. 내 좁은 소견으로 한 번 보고 영화를 폄하하지는 말아야겠다. 까뮈의 <이방인>을 읽고 내가 한 번에 이해를 했던가. 인간의 실존과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작가의 주제를. 이제는 명성과 권위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비록 영화는 나를 혼란스럽게 했지만 내 이해력의 한계와 부족함을 깨달았기에 만족한다. 게다가 늦은 밤 시도한 외출만으로도 내겐 의미가 있었으니까.
얼마 전 동창들과 나들이를 계획했었다. 코로나로 만나지 못한지도 몇 년이 되고 있었다. 일상을 벗어나 북한강 바람도 쐬면서 수다와 맛난 음식을 생각하니 설렜다. 인원은 몇 명밖에 되지 않지만 서로 가능한 날짜를 잡기는 언제나 결코 쉽지 않았다. 하루 전에는 다시금 확인 문자가 서로 오갔지만 소박한 그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출발하기로 한 아침,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인근에 사는 동창이었다. 갑자기 손주가 고열이 난다며 병원에 갔다 와야 하니 시간을 조금 늦추잖다. 들떴던 나의 마음은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옷을 챙겨 입고 친구의 연락을 기다렸다. 초조했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고 있었으니까. 난 다른 일정도 취소하고 가기로 했었는데.
인간이 아무리 계획을 세운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는 분은 따로 있다는 성경말씀을 떠올렸다. 속상했지만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기에 마음을 내려놓았다. 못 가도 괜찮다고. 친구는 시어머니를 모셨고 근처에 아들 내외가 살았다. 찬찬한 그녀는 할머니가 되고 나니 변수가 더 많이 생겼다. 난 그저 그녀의 손주가 코로나가 아니길 바랄 뿐.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고 외출복을 벗으려 할 때 연락이 왔다. 가까스로 우리는 차에 올랐고 도로변의 황화 코스모스는 가을바람에 살랑거렸다.
통유리 밖으로 의암호의 풍경이 동양화 같았다. 산 위로는 케이블카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고 하늘은 가을색을 물씬 풍겼다. 동창들과의 만남은 아련한 학창 시절로 돌아가게 하기에 들뜨는 것이 아닐지. 우리는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결혼을 하고 아이들의 입시를 마친 후에야 만남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작 일 년에 두서너 번. 그동안 우리의 부모는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남편과 사별한 친구들도 생겨났다. 누군가 앞으로 십 년 정도가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시간이지 않겠냐는 말에 모두 격하게 공감했다. 이젠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자주 만나자며 또 다음을 기약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요즈음, 얼마 전 들었던 한 작가의 강연이 떠올랐다. 나의 독서습관을 돌아보게 했으니까. 그에게 독서는 끝장을 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멈추기 위해서 읽는 것이란다. 의아했다. 그는 책을 읽다가 와닿는 문장 앞에 서게 되면 왜 그 지점에서 멈추었는지, 어떤 생각이 났는지 그리고 일상에서 어떻게 그것을 적용을 할 것인지를 고민한단다. 필사와 낭독을 하면서. 또한 일 년에 한 권의 책을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 권의 책을 쓴다니, 아마도 작품의 배경지식과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사색을 통해 치열하게 자기만의 의미로 재해석하지 않을까. 다독과 다작도 중요하지만 다상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내 인생의 가을, 뒤늦게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경험만으로 글을 채워가기에는 한계가 보였다. 육아와 직장생활을 하느라 오랫동안 손에서 책을 놓았었으니까. 조급함이 몰려왔다. 폭넓은 독서가 필수였지만 처음엔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방향도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끌리는 대로 책을 읽다 보니 신기하게도 다음에 읽어야 할 책 제목이 그 속에 숨어있었다. 독서의 법칙이랄까. 그렇게 나만의 독서목록은 쌓여갔지만 꼼꼼하게 읽기보다는 완독에 목표를 두면서. 인문학의 지혜가 가득한 책들을 읽기엔 내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고 달리듯 읽었다. 하지만 이젠 내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완독보다는 가슴에 와닿는 글, 감탄할 문장을 찾아서 나도 멈추고 서성이리라. 작가의 글과 생각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내면화의 과정이 절실한 시기이기에.
추천할 만한 책을 선정하는 기준이 되는 세 가지 질문을 기억해 본다. 읽으면서 재미있었는가, 새로 알게 된 것이 있었는가 마지막으로 생각의 변화가 있었는지. 앞으로도 이 질문을 충족시킬 귀한 책들은 수없이 만날 수 있으리라는 바람을 가져본다. 사색이 깊어질수록 언젠가 내 언어의 정원도 청명한 가을바람 속에 영글어 갈 수 있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