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하얼빈>을 읽고
요즘 가을 운동회가 한창이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심지어는 동네 주민자치회가 주관하는 잔치마당까지. 코로나로 몇 해동안 건너뛸 수밖에 없었던 행사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듯하다. 우리 집 주방 창문으로 보이는 초등학교도 며칠 전부터 만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본관 옥상에서부터 운동장으로 길게 내건 다양한 국기들이 다가올 잔치의 기대감을 자아냈다. 드디어 오늘 아침부터 선생님의 마이크 소리와 아이들의 함성소리가 크다. 단체 티셔츠도 맞춰 입고 시합을 하느라 시끌벅쩍하다. 점차 일상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이것이야 말로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까.
푸른 하늘에 펄럭이는 만국기를 보니 문득 한 장면이 떠올랐다. 만주 하얼빈으로 가기 위한 경유지인 청나라 대련의 공회당 마당과 봉천의 로터리마다 이토를 환영하기 위해 내걸었다는 일장기와 만국기가. 얼마 전 미루고 있던 김훈의 소설 <하얼빈>을 읽었기 때문이리라. 일본 초대 총리가 되어 메이지 유신을 이끈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에겐 너무나 뼈아픈 고통을 준 인물이다. 조선 통감을 지내며 한일합방의 원흉으로 외교권 박탈과 고종황제의 퇴위 등 조선의 식민지화를 주도했던 그가 특급열차를 타고 개인자격으로 러시아 방문을 나선 길이었다. 만주에 휘날렸다던 만국기는 너무나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책의 앞부분에는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이동 경로가 표시된 지도가 있었다. 이 소설은 이토를 저격한 순간과 그 전후의 나날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이 각각 하얼빈으로 향하는 행로를 따라간다. 시모노세키를 출발한 흰색과 황해도 해주를 출발한 검은색의 화살표가 만주 하얼빈 역에서 만났다. 이 지도 한 장으로 상당 부분이 이해되었다. 한 챕터만 읽었을 뿐인데도 벌써 작가의 이야기에 빠져버렸다. 책은 이십 세기 초, 국운이 기울어가는 안타까운 대한제국으로 나를 데려갔다. 고종이 퇴위되고 순종이 황위에 오른 정지적 상황과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협약에 도장을 찍는 안타까운 그 시대로. 책의 전반은 안중근이 하얼빈으로 향하는 과정과 저격을 후반은 재판 과정과 빌헴 신부에게 고해성사 후 죽음까지를 다룬다. 그리고 후기와 주석을 통해 미처 몰랐던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안타까운 사정까지 소상하다.
이 책을 읽고서 영웅이 아닌 청년 안중근의 시대적 고민을 깨닫게 되었다. 집안의 장남으로서 무게와 가장의 무거운 짐을 뒤로하고 거사를 실행으로 옮기려는 것의 의미를. 설령 거사가 성공하더라도 가족과 형제들이 겪게 될 일의 참혹함은 자명한 일이다. 또한 그는 천주교 영세를 받은 신앙인으로서 살인은 계명에 어긋났다. 그러니 갈등이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 여정이 될 하얼빈 기차를 타고 동양평화의 대의로 거사를 마친 후 ‘코레아 후라(만세)’를 외치며 세계열강에게 조선의 실상을 알렸다. 그의 외침은 독립을 위한 민족의식에 방아쇠를 당겼으리라.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나는 그를 단순히 영웅의 모습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 그동안 간과했던 청년 안중근의 모습을 다시 만나 보게 되었다. 서른한 살 밖에 되지 않았던 그가 권총 한 자루와 백 루블만 가진 채 하얼빈으로 간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가장 귀한 목숨 마저 기울어가는 국운을 위해 바쳤다. 독일의 본 훼퍼 목사님도 나치 정권하에서 목회자들이 바른말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미친 운전사에게서 핸들을 빼앗아 운전을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며 히틀러 암살 계획에 동참했다. 비록 발각되어 그는 사형에 처해졌지만, 아마도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를 제거하는 것은 신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겠다. 목사님과 안중근의 고민 또한 다르지 않다 여겨진다.
가끔 내 글쓰기의 이유를 생각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조지 오웰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를 떠올린다. 그는 책에서 글쓰기의 네 가지 주요 동기를 말한다. 첫 번째는 순전한 이기심, 두 번째는 미학적인 열정 세 번째는 역사적 충동 마지막은 정치적 목적으로 쓴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평화로운 시대가 아니었다며 정치적인 동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었기에 예술은 정치와 상관없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도 정치적 태도라고 하면서.
거의 매주 한 편씩 글쓰기를 시작한 지 3년이 되어간다. 나는 어떤 욕구로 글을 쓰고 있는가. 순전한 이기심과 미학적인 열정으로 달려왔던 것도 같다.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박완서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전쟁의 참상을 언젠가는 꼭 쓰리라고 마음을 먹었고 전쟁 당시의 상황을 다룬 <나목>과 자신의 일생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이자 대표작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집필했단다. 그녀의 작품들은 날카로운 시대 정신과 사회의식이 가득함을 느낀다.
또 김훈 작가의 글은 기자 출신이기에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줄 정도로 묘사와 서술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을 영웅이 아닌 인간적인 고뇌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남다르다. 그의 문체는 단문이다. 남성적인 힘이 넘치며 주어와 동사로 승부하라고 했듯이 간결하다. 형용사와 부사를 부리지 말라고 했던가. 매일 원고지 5장을 쓰는 성실한 작가이기에 또한 존경스럽다. <칼의 노래>에서는 성웅이 아닌 고뇌하는 인간 이순신의 모습을, <남한산성>에서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뼈대 위에 소설적 상상력으로 십만 대군에 에워싸여 척화파와 주화파 그리고 삼전도의 치욕을 겪는 인조의 이야기를 펼친다.
역사물을 많이 집필했던 김훈 작가의 젊은 시절 소망이 고단했던 안중근의 청춘을 쓰는 것이었단다. 엄두가 나지 않아 미루다 아프고 나서 이제 여생의 시간을 생각하니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절박감에 시작했다면서. 나는 하드보일드 한 그의 문체가 끌린다. 계란을 완숙하다는 뜻인 이 단어는 감정을 절제하고 수식을 배제하며 묘사로 일관한다. 감정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배제한 건조한 스타일, 헤밍웨이의 초기 작품도 그러하단다. 그래서일까 내 글도 약간은 그런 문체를 닮아가는 듯하다.
앞으로 내 글의 행로는 어떠해야 할까. 글의 방향성에 대해서 고심하게 된다. 개인적이고 서정적인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시대를 증언해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하는 듯하다. 그러자면 시대를 보는 안목을 기르고 역사를 읽을 줄 아는 나만의 가치관이 있어야만 하겠다. 아마도 앞에 언급한 선배 작가들이 걸었던 길을 잘 따라가면 되리라. 훌륭한 독자가 되어서 꼼꼼하게 읽고 통찰력을 기르면서. 김훈의 <하얼빈>은 역사 속의 인간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런 훌륭한 작가와 동시대를 살고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가.
책이 주는 감동은 크다. 그래서 감동받은 작가의 생가나 묘지,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 가고 싶은 바람을 갖는다. 카뮈의 <이방인>을 찾아 알제리로,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생각하며 크레타 섬을 동경한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산초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스페인의 라만차 지역 또한 밟아보고 싶다. 그러나 이제는 가고 싶은 길을 하나 더 추가하련다. 하얼빈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청년 안중근이 갔던 그 길을 찾아가고 싶다. ‘안중근의 총은 그의 말과 다르지 않다’며 작가는 책을 마무리했다. 스스로 시대의 아픔을 지고 자신의 몸을 던진 그 청년을 기리며 험난한 길을 선택하고 어깨에 짊어진 짐의 무게를 생각해본다. 내 말을 대신하는 내 펜의 무게도 조금씩 느껴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