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꼭대기에 주홍색 감 두 개가 파란 하늘 아래 선명했다. 추운 겨울, 먹이 찾기가 힘든 새들을 위한 배려가 느껴지는 그 까치밥은 달랑 두 장 남은 올해의 달력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내 탁상 달력에도 빨간 두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친정 엄마와 시어머니의 기일이 있었기에. 친정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십여 년째, 슬픔도 이제는 희석되었지만 11월 셋째 주는 친정엄마가 고수한 김장날이었기에 이맘때면 새삼 부모님 생각이 절로 난다. 우리 형제들은 김칫통을 몇 개씩 들고 달려갔으니까.
시어머니도 작년 코로나 와중에 돌아가셨다. 다행히 확산세가 진정이 되던 때라 무사히 장례를 마칠 수 있어 얼마나 감사했던지. 그녀는 뇌출혈로 쓰러져 거동을 못해 십여 년이나 남양주에 위치한 요양병원에서 보내야만 했다. 가끔 문병을 가면 웃음 끝에 눈물을 보이셨다. 세월은 아들 다섯을 키우느라 강인했던 그녀의 얼굴을 아이의 모습처럼 순하게 변화시켰다. 면회를 마치면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곤 하셨다. 그런 시어머니의 옆에는 항상 투박한 북간도 말씨의 간병인이 같이 했고 난 그녀에게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며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여겼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모님과 시어머니의 면회를 다녔기에 부족함이 많았다. 혈육이 아닌 중국 연변이나 길림성 등에서 온 간병인들이 쪽잠을 자면서 잠시 왔다 가는 나를 대신했다. 십여 년 동안 간병인들이 자주 바뀌었다. 그중 쉽지 않은 성격의 시어머니를 잘 돌보았던 한 간병인이 떠오른다. 퉁퉁한 몸에 짧은 생머리, 칠십이 되어 보였던 그녀는 후덕한 인상에 성격도 무던했다. 어느 가을엔 요양병원 근처 산에서 주운 밤을 한 봉지나 건네주기도 하면서.
시어머니와 만나면 같이 사진을 찍곤 했는데 간병인은 그 모습을 부러운 듯 쳐다보았다. 난 가족과 떨어져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묵묵히 일하는 그녀에게 웃으라면서 장미가 그려져 있는 복도를 배경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리곤 다음 면회 때 사진을 현상해 선물했더니 쑥쓰워하면서도 얼마나 좋아하던지. 요양원에 찾아갈 때마다 시어머니의 상태를 물어보면서 그녀의 사정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녀 어머니의 친정은 경상도였는데 함경도 출신 남편을 만났고 얼마 뒤 시댁이 모두 간도로 가게 되었단다. 책에서나 읽었던 간도가 그녀의 고향이었고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북간도, 그곳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아니었던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한 가족사이지만 민족사를 다루며 작품 속에는 을사늑약, 청일 전쟁과 간도협약 등 우리 근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등장한다. 또한 일제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아프게 고민하던 청년, ‘별 헤는 밤’을 비롯한 주옥같은 시를 썼던 윤동주의 고향 용정도 그곳에 있다. 그녀와의 만남은 지금은 잃어버린 우리 땅 간도에 대해 관심을 갖게 했다.
간도는 만주 길림성 동남부 지역으로 중국에서는 연길도라 부르는 지역이었다. 18세기 초, 청나라와 이 지역을 두고 분쟁이 생기자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면서 서로 국경을 확정지었다. 서쪽으로 압록강과 동쪽으로 토문강 유역으로 청나라의 남방한계선을 명백히 하면서. 그러나 세월이 흘러 토문강의 해석을 두고 영유권 분쟁이 다시 생겨났고 국운이 기울어간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겨버렸다. 그 후 1910년 일제가 만주 탄광권과 철도 부설권을 교환하는 조건으로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체결하면서 이 땅을 청나라에 할양해버렸다. 이는 우리 정부가 간여하지 않은 가운데 취해진 불법적 협약으로 고종 황제의 도장이 없었기에 국제법상 무효이고 실효성이 없다고 했지만…
일제 침략의 손길을 벗어나고자 애국지사들은 신민회를 조직해 간도를 항일운동의 새로운 기지로 구체화했고 가난과 억압을 피해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를 탈취당한 농민들의 이주가 계속되었다. 고국의 독립을 위해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했고 명동촌을 비롯한 북간도에서는 교육기관을 설립해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며 독립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준비를 했단다.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을 일으킨 덕분에,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게 되면서 우리나라는 독립이 되었다. 하지만 그 후 한국 전쟁과 분단으로 지난한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신음해야 했기에 간도의 조선인들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해버렸다. 지금도 중국은 정치적 목적과 국가적 이익을 위해 동북공정이란 이름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리랑도 자국의 소수민족이 부르고 있기에 유네스코 무형문화재 유산으로 등재를 시도하며 자신들의 것이란 억지를 쓰면서.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힘들고 위험해 꺼리는 일들을 이주 노동자들이 담당하고 있는 것을 본다. 건설일과 서비스직 특히 요양원에서 투박한 이북 사투리를 듣게 된다. 같은 말을 쓰는 한 겨레였지만, 어쩌면 지금도 그들은 자신들이 자란 중국에서 또 고국에 와서도 이방인의 삶으로 차별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부터도 그러했으니까. 까지밥을 남겨 놓는 조상들의 따스한 시선으로 그들의 아픔을 보듬을 수 있는 마음은 가져야 하지 않을까. 나를 대신해서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은 사람들이기에. 백여 년 전 빼앗긴 우리 땅 간도, 다시 찾을 수는 없어도 기억해야 한다고,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란 주장을 가슴에 담는다.
그동안 수필을 쓰면서 몇 해를 보냈다. 그런데 이제야 ‘에세’라는 말의 어원이 시작된 몽테뉴의 <수상록>에 이르렀다. 에세는 시험과 시도 등을 의미하는 시론(試論)으로 그리스 로마의 정치, 역사로부터 종교계혁과 신성로마제국 등 고금의 서적 중 단편을 인용하고 윤리적 주제와 역사적 판단을 소개했다. 거기에 몽테뉴 자신만의 비판과 고찰을 더했단다. 난 역사와 시대적 배경지식이 부족해 이해하기 어렵고 지루했지만 중수필에 해당하는 그의 책에서 깊은 사색과 통찰력이 부러웠다.
하지만 차츰 내 독서가 너무 서양 위주의 책들에만 치우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한다. 동양과 우리 문학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소홀히 했다는 자책과 함께. 마치 내 존재의 근원이 되는 부모와 모국을 귀히 여기지 못했듯이. 이제 이 둘의 간극을 좁히고 균형을 맞추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일본에는 하이쿠라는 특유의 단시가 있고 중국에는 한시가 있다. 우리나라 작가들도 하이쿠의 섬세한 감성과 정형성을 높이 사는 듯, 그것을 인용하는 책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각자의 모국어를 쓰는 인구와 경제력의 문제일 뿐 한글과 우리말이 타 언어에 비해 부족하단 생각은 하지 않는다. 국력과 실력을 길러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요즘 K컬처, 대한민국의 문화 예술이 세계로 점점 퍼져나가고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정말 뿌듯하다.
몇 년 전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소감을 말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며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 뜻은 가장 한국적인 것, 고유한 나만의 것을 타인이 공감하도록 고민해서 창작해야 한다는 말이리라. 나 역시 깨닫지 못하고 잃어버린 것, 되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고심하는 작품을 쓰고 싶단 마음도 살짝 가져보면서.
다시 달력을 넘겨본다. 내가 정신없이 살아온 세월, 미래를 계획하고 현재를 누리고 그리고 과거의 추억으로 돌아간 삶의 결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써놓은 약속과 잊지 말라고 그려놓은 동그라미로 빼곡한 기록들. 이런 하루하루가 쌓여 내 한 해의 또 다른 나이테가 될 것이다. 좀 더 성숙하고 확장된 나이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만추의 하늘을 올려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