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베컴'으로 바라본, 데이비드 베컴이 전 세계에 끼친 영향력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고 대중적인 스포츠는 축구다. FIFA(국제 축구 연맹)에 가입한 회원국 수(6대륙 211개국)가 IOC(국제올림픽위원회) 회원국 수(6대륙 206개국)보다 더 많고, 월드컵 시청률과 흥행성은 이미 동·하계 올림픽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그래서인지 현시점 축구 선수들의 영향력 또한 막강하다. 축구 룰을 잘 몰라도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알고 이들의 오래된 라이벌리는 전 세계에 소문이 났다.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도 공식 계정(@instagram)을 제외하고 축구선수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의 투톱 체제다. 축구선수라는 직업이 웬만한 슈퍼스타, 유명인사보다도 강력한 파급력을 자랑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오늘날의 영웅들이 그에 대한 기대와 명성에 부응하려면, 젊은 팬들에게 더 많은 모범을 보여야 한다."
- 1997년 2월 6일 '우먼스 렐름'에 실린 금주의 독자 편지 中 -
그래서 축구선수들이 자라나는 어린이, 청소년들에게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게 됐고, 언론을 필두로 공인이라고 일컫는 사람들까지 "도덕적 모범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을 꺼내게 됐다. 축구 선수들, 범위를 넓히면 스포츠 스타들이 청소년의 역할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스포츠 스타의 부정적인 행실이 각종 미디어에 대서특필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되는데 "그들은 훌륭한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는 혹평을 받는다. '역할 모델'로서 스포츠 스타라는 개념은 청소년, 매체, 스포츠 스타 간 관계를 허술하면서도 지나치게 단순화된 모델로 단정 짓고 있다. 스포츠 스타 이미지는 남성성 및 도덕성 담론의 복합적인 응축물을 수반하고, 이러한 응축물은 '영향력'의 자기 지시적이고도 간텍스트적인 구성물로 형성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메시 대 호날두를 비롯해 오늘날 축구 선수들이 전 세계인들의 슈퍼스타로 군림하게 된 근원을 추적하다 보면 이 사람이 시초일 것이다. 전 세계적 축구계 유명인사 1세대이자 잉글랜드 축구계에 한 획을 그은 레전드 데이비드 베컴. 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덕하게 된 계기도 1998/99 시즌에 '축구 클럽 최초 트레블(리그, FA컵, 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 달성이라는 업적이 아닌, 데이비드 베컴 때문이었다.
데이비드 베컴, 글로벌 인기를 자랑하는 거대 축구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한 스타플레이어이자 잉글랜드 삼사자 군단의 주장 완장을 찼던 선수다. 잘생긴 외모에 영국 최고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의 포시 스파이스(빅토리아 아담스 / 빅토리아 베컴)가 부인이며, 남성들의 패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는 남자다.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네빌 형제(게리 네빌-필립 네빌), 니키 버트와 함께 '맨유 황금 유스'로 주목받았던 베컴이 영국 전역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사건이 있었으니, 1996/97 시즌 개막전인 AFC 윔블던 원정에서 기록한 59m 장거리골이었다. 이 골을 계기로 베컴은 '골든보이(Golden Boy)'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베컴의 등장은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전 세계 최고의 리그로 사랑받는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는 당시 노동자 계급들이 즐기는 스포츠에 불과했다. 이에 맞물려 리그를 대표했던 선수들인 로비 파울러나 앨런 시어러 또한 '신식처럼 보이는 구식 남자'의 전유물로 여겼고 당연히 상품화되지 않았다. 그에 반해 베컴은 거친 남성성으로 대변하던 잉글랜드 축구선수들에게서 볼 수 없는 이미지를 지녔다. 베컴의 상업성이 본격 부각되기 시작되면서 미디어와 대중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 가지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아담스와의 열애부터 첫 아이 출산 소식, 여자친구와 함께 커플룩으로 착용한 사롱 패션(허리에 치마를 두르는 패션), 그리고 베컴의 화려한 헤어스타일 변천사가 그 예다. 수많은 가십에 오르내리면서 일부 매체에게 조롱당하기도 했지만, 데이비드 베컴이라는 인물의 영향력이 브리튼 섬을 넘어 유럽 대륙에 엄청나게 끼치고 있다는 것을 반증했다. 데이비드 베컴과 일찌감치 스폰서 계약을 맺은 아디다스의 선구안이 대단할 따름이다.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던 만큼, 베컴을 향한 언론의 공격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잉글랜드 대 아르헨티나의 16강전에 퇴장당하면서 영국 언론에 집중포화를 맞았다.
당시 아르헨티나 대표팀 소속으로 출전했던 디에고 시메오네는 경기 내내 데이비드 베컴에게 거친 플레이를 선사해 그의 신경을 제대로 긁었다. 시메오네의 도발에 흥분한 베컴은 결국 그의 다리를 걸었고, 시메오네는 영악하게 시뮬레이션 액션을 취해 베컴에게 레드카드를 선사했다. 잉글랜드는 승부차기 끝에 탈락했고,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글렌 호들이 "베컴 퇴장이 경기에 영향을 끼쳤다"라고 기름을 부었다. 이후 영국인들은 "잉글랜드의 월드컵 탈락의 모든 책임은 베컴 때문이다"라고 일제히 공격하며 '멍청하고 아둔한 영국인'이라고 강도 높은 비난을 했다. 덤으로 아내인 빅토리아 베컴까지 한 데 묶여서 비판받았다.
사정없이 흔드는 여론 속에서도 베컴은 프랑스 월드컵에서 남겼던 오점을 만회하고자 노력했고, 결국 1998/99 시즌 소속팀 맨유의 트레블 달성의 주역으로서 활약과 2002 한일 월드컵 진출을 확정 짓는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이로 인해 베컴은 스스로 한 단계 성숙했다고 증명했고, 대중에 용서받고 복권되는 착한 주인공의 서사를 만들게 됐다.
이와 함께 베컴 부부가 몰고 다녔던 폭풍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평소 스포츠에 대해 칼럼을 쓰지 않던 칼럼니스트조차 베컴 부부를 분석하기 위해 직접 펜을 집어 들었을 정도였다. 특히나 1999년 베컴 부부의 결혼식은 영국에서 두고두고 회자 중이다. 검소하게 진행된 영국 왕실의 결혼식과 대조적으로 궁극의 화려함을 뽐냈기 때문.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왕실의 위엄이다"라는 평을 비롯해 각종 언론들이 다루는 워딩이 제각각이긴 했으나, 두 사람의 결혼식이 몰고 왔던 파장은 상당했다.
재밌는 건, 베컴 부부가 공개한 적이 없었던 기부 내역 및 자선 활동이 화제가 되었다. 아이를 얻은 뒤 "아버지가 되는 일 또한 중요하다"는 베컴의 발언으로 인해 과거 고액 주급으로 장식했던 사치스러운 과거의 과시는 가족에 대한 책임과 부성애를 지니기 이전에 낭비하는 일반적인 예이자 풍족함으로 정당화됐다.
또 데이비드 베컴은 각종 패션 잡지를 통해 패션, 스타일, 나르시시즘 대상화의 가능성 등에 대한 남성들의 관심을 꾸준히 증가하던 환경에서 성장했다. 이 시기 스포츠와 패션이 점점 긴밀하게 연결되던 시점이었으며, 축구선수와 팝스타들이 서로의 매력에 강하게 이끌려 명성 자체가 상품화되었다. 즉, 베컴은 스스로의 이미지에 포섭되어, 그의 '스타 페르소나'는 곧 실체가 되어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강력한 상품이 되었다. 말 그대로 베컴은 스포츠 스타를 넘어서 하나의 상품이자 아이콘이 됐고, 단순히 축구에만 뿌리를 내리는 사람이 아니게 된 것이다. 쉽게 표현하면, 그는 '어떤 것을 걸쳐도 어울릴 수 있고, 입을 수 있는' 개체가 되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건, 베컴의 존재 자체가 곧 하나의 트렌드가 됐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베컴을 후원하고 있는 아디다스는 스포츠 선수들 중 처음으로 베컴을 상품화시켜서 새로운 상품들을 만들어서 판매했고, 그것은 날개 달린 듯이 팔려나갔다. 스포츠 용품을 떠나서, 정장, 구두, 향수, 심지어 속옷까지도 그러했고 베컴이 걸쳤다는 이유만으로 흥행하였다. 이를 발판으로 베컴은 독보적이고 상징적인 브랜드로 자리 잡은 것이다.
베컴의 상품성 가치가 높아지는 것에 소속팀 수장이자 그의 스승인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우려를 표했다. 개인보다 팀을 우선시하고 규율을 매우 중시하는 그의 시각에선 베컴이 딴 데 정신 팔려 경기에 집중하지 못할까 신경을 곤두세워왔다. 이에 베컴은 공과 사를 구분해 왔지만, 주변 동료들도 경기장 밖 일정에도 부단히 신경 쓰는 모습에 걱정을 표했다. 결국 두 사람 간 엇갈린 입장은 '축구화 사건'으로 터져버렸고, 퍼거슨 감독은 베컴을 다른 구단으로 팔기로 결심했다.
이적시장에 내놓은 베컴을 누구보다도 낚아챈 구단이 바로 레알 마드리드다.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 호나우두, 호베르투 카를로스, 라울 곤잘레스, 이케르 카시야스 등 '지구방위대'로 일컫는 갈락티코 군단이지만 신임 회장으로 부임한 플로렌티노 페레즈에겐 구단 수익을 대폭 상승시킬 카드가 필요했던 것. 베컴을 영입한 뒤 레알 마드리드는 베컴을 앞세워 본격 장사에 나섰고, 단기간에 무려 900억 원의 수익을 냈다. 베컴 덕분에 슈퍼스타들을 영입하느라 적자에 허덕이던 레알 마드리드가 한 시즌만에 흑자로 전환했다.
베컴을 영입한 뒤 레알 마드리드의 구단 자산 가치도 달라졌다. 갈락티코 군단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2003년까지 맨유에게 줄곧 1위를 내줬다가 2004년에 자산 가치 33억 달러를 기록하면서 맨유를 제치는 데 성공했다. 선수로서 기량은 하락세에 접어들었음에도 베컴은 레알 마드리드에게 잭팟을 안겨다 준 셈이다. 이와 맞물려 아시아권에서 레알 마드리드 인지도도 상당히 끌어올렸다.
베컴이 가져다준 경제적 효과는 대서양 건너 미국 프로축구리그(MLS) 소속 클럽팀인 LA 갤럭시의 레이더망에도 포착됐다. 구단의 인지도, 그리고 미국 내 축구의 인기를 끌어올리겠다는 구단주의 야심 찬 플랜의 일환으로 미국으로 건너온 베컴은 1964년 미국 투어를 하면서 미국인들을 매혹시켰던 록밴드 비틀즈에 비견될 인파를 몰고 다녔다. 비록 팀 우승 횟수는 적었으나, LA 갤럭시 또한 베컴 효과를 톡톡히 봤다.
데이비드 베컴이 축구화를 벗은 뒤에도 그의 행보를 따르는 이들이 생겨났다. 가장 비슷한 케이스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인데 그 또한 베컴처럼 축구선수라는 틀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대중 언론에 의해 실패자가 되었다가 영웅이 되었다가 쉽게 조절이 가능한 하나의 유기적인 브랜드이자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선수로서 커리어는 호날두가 압도했을지 몰라도 축구를 넘어 전 세계, 전 장르에 끼친 파급력은 '그래도 아직은 베컴'이다. 그만큼 베컴의 영향력은 전 세계적이며 축구를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열광하는 수준이다. 축구를 잘 모르는 여성들도 베컴 하면 다 알고 있지 않던가. 베컴은 지금도 대중과 언론의 입맛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형됨과 동시에 자신의 이미지를 공공연히 판매하고 있다.
참고 문헌 : '스포츠스타(13인의 스포츠 아이콘으로 읽는 문화, 문화정치)' 中 데이비드 베컴 편 by 게리 워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