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들이 표현한 대중매체 속 태종 이방원
실제 역사를 기반 삼아 창작자들이 자신들이 대중에게 전하고픈 이야기로 각색돼 탄생하는 사극. 기록된 이야기이기에 현실성이 매우 강하고, 현재와 맞닿아 있는 현실과 소망 등이 녹아있어 몰입도 또한 높다.
고대사부터 개화기까지 다양한 시대를 배경 삼아 작품으로 나온다. 다양한 시대 중 창작자들의 원픽은 여말선초(고려말 조선초)다. 어느 역사에서나 기존 왕조의 쇠퇴 및 새 왕조의 건국이 맞물리는 시기가 가장 스펙터클하다. 여말선초가 삼국통일전쟁이나 후삼국시대보다 각광받는 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 이외 사상의 대립도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또 사료가 풍부하기에 창작자 입장에선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제 '우려먹기' 수준에 접어들었음에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다.
창작자 간 선호도 차이가 있겠으나, 여말선초 배경 사극에서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조선 3대 왕 태종 이방원. KBS 대하드라마 기준 총 6회 등장, 올해 하반기에 부활하는 대하드라마 주인공도 이방원이다. 다른 드라마, 영화 포함하면 출연 횟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시대 격변기였던 여말선초에는 한가닥 했던 인물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태종 이방원이 조명되는 이유는 그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물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함께 역성혁명을 일으키기 전부터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이후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쌓여있으니까 말이다.
고려 말 최고 무관이었던 이성계가 조선 초대 왕으로 오를 수 있었던 건 여러 가지 원동력이 있었다. 그중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고려 말 혁명가 이방원으로 그리는 모습이 많다.
제작진 시선으로 바라본 고려 말 이방원의 행적은 '정의와 방벌'이었다. 자기가 옳다고 굳게 믿는 정의를 위해서라면 무리한 일이라도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물로 묘사됐다. 위화도 회군을 대비해 자신들의 가족을 먼저 피신시키고, 정적인 정몽주와 하여가와 단심가를 나눈 뒤 살해했던 것도 자신만의 정의를 앞세워 방벌한 것이었다.
SBS '육룡이 나르샤' 속 이방원(유아인)은 다소 인상 깊었다. 유년 시절부터 조명한 점도 이례적인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력한 실행력으로 밀어붙이는 성향에 가려진 다른 이면을 그려냈다는 점이다. 정몽주를 살해한 뒤 살인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때, 이후 정도전과 이방석을 죽인 후 혼자 괴로워하는 등 거사의 후폭풍에 흔들리는 속마음을 표출하며 냉혹하다는 평을 받았던 이방원의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는 순간이다. 앞서 방영했던 KBS 1TV '용의 눈물'에서도 친혈육을 향한 깊은 정으로 표현한 바 있다.
보위를 향한 야망과 패도 정치 등 이방원의 사상을 두고 창작자들마다 해석과 시각이 다르다는 점 또한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실제 역사에 가장 근접하게 묘사한 캐릭터는 '용의 눈물' 이방원(유동근)이다. 냉혹하고 무자비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선택을 드러내며 공감대를 형성해 주목받았다.
'정도전' 속 이방원(안재모)의 패도도 '용의 눈물'과 비슷한 것 같으나, 좀 더 공격적인 느낌이다. 이는 주인공 정도전(조재현)의 대척점에 서 있는 최종보스 같은 위치 때문일 것이다. 첫 만남서 천복이의 죽음에 "사람 목숨은 사람에 달린 것이다"고 일침을 시작으로 정도전을 저지하는 빌런 같은 면모를 풍기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현실주의자의 표상이다.
특히 "피 흘리지 않는 대업은 몽상입니다. 숙부님께서 추구하는 선위는, 요순시대에나 가능한 것이란 말입니다! 대업은 새로운 권력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권력은 칼! 정적의 선혈이 배인 칼에서 나오는 것이란 말입니다!"라고 외치는 대사는 이방원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상황을 읽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의 나라'에선 이방원의 권력욕과 왕위를 향한 야망을 가장 적나라하게 담아냈다. 이방원(장혁)은 언제나 자신이 만인지상이 되어야 했고, 두려운 존재들을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다. 무술 스승 서검(유오성)을 군량미 착복에 누명 씌워 죽인 것처럼, 자신의 나라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선 누구든 희생시킬 수 있다는 잔혹함이었다. 그러다가도 자기 사람을 위해선 기꺼이 자기 손에 피를 묻힐 줄 아는 리더십까지 선보이며 나라를 차지해야만 하는 정당성을 심어줬다.
반면, '육룡이 나르샤' 이방원에게 패도와 왕위는 "꿈"이었다. 그러나 이성계(천호진)는 아들의 꿈을 욕심이라며 접어두라고 일침 했다. 멘토였던 정도전(김명민)도 그의 사상을 경계했다. 이에 이방원은 "헌데 왜 제 꿈만 욕심이냐"고 물었다. 마치 부조리한 체제에 꿈이 번번이 좌절되는 오늘날 청춘을 반영하는 듯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던 1392년에 이방원 나이 만 25세였으니 불안정한 청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도 납득되는 지점이다.
이방원과 그의 가족 간 관계가 작품들마다 서로 다른 시각으로 담아냈다는 점도 흥미롭다. '용의 눈물'서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김무생)에게 최악의 불효자이면서 동시에 최고의 효자였다. 2차례 왕자의 난으로 형제들을 직접 처단하는 등 아버지 심장에 대못을 박으면서도 항상 공손한 저자세로 일관해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갈망했다. 아버지 앞에서 춤을 추거나 임종 뒤 오열하는 장면, 이성계가 죽기 전 궁 안에 승려들을 불러들여 염불하고 스스로 연비하겠다며 팔뚝을 지지며 아버지를 향한 효심을 여실히 드러냈다.
'나의 나라'는 정반대다. 부자 간 자신들의 나라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팽팽한 기싸움을 벌였다. 심지어 자신들을 둘러싼 주변 인물까지 희생시키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으르렁거렸다. 그들에겐 사람보다 권력과 나라가 더 중요했고, 드라마 제작진도 이방원의 야망에 더욱 포커싱하며 부자를 원수지간처럼 표현하기도 했다.
자신의 아들이자 훗날 왕위에 오르는 세종과의 관계 묘사도 조금씩 달랐다. 아들이 왕으로서 견고한 위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직접 나서는 건 동일하나, '용의 눈물'에선 세종(안재모)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는 부성애 면모가 강조됐다.
그러나 SBS '뿌리 깊은 나무'에서 이방원(백윤식)은 세종(송중기)의 아버지보다 그를 가르치는 엄격한 스승 같은 면을 보여줬다. 실제 역사와 다르나, 철혈군주로서 태종과 앞으로 세종이 잘 해낼 것이라는 신뢰, 그리고 아들을 향한 부정(父情)을 다른 각도로 함축 표현한 점이다.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건국하는데 앞장선 역성혁명의 공신, 왕을 꿈꾼 야심가이자 동시에 냉혹한 카리스마를 내뿜은 리더. 그러면서 가족을 매우 아끼던 아들이면서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걸어온 길 자체가 입체적이고 극적이기에 그를 주인공, 혹은 그가 살았던 시대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그리며 조명하고 싶은 건 창작자들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오지 않은 면이 하나 있다. 바로 백성을 매우 아끼고 한없이 너그러웠던 왕 태종의 면모는 어떤 작품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철권군주로서 면모가 워낙 강한 인상을 심어줬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 다가오는 KBS 대하드라마에서 등장할 태종 이방원이 어떤 캐릭터로 묘사될지 궁금하다. 이전 작품들처럼 강력한 카리스마 군주를 또 다른 시각으로 해석할지, 아니면 아직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면을 발굴해 이야기를 만들어 갈 것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