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가 식어도... 좋아

식은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점점 성숙해졌다.

by 보나

나는 식은 커피를 좋아한다. 모든 종류의 커피를 좋아하지만 특히 카페라떼를 즐겨 마시며 그중에서도 식은 라떼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식은 커피를 무슨 맛으로 먹느냐고 하지만 식은 커피를 입안에 물었을 때 맴도는 달달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나는 더 좋다. 갓 추출한 에스프레소와 뜨겁게 데운 우유가 더해진 맛도 물론 훌륭하지만 너무 뜨거워서 그 맛을 제대로 느끼기 힘들 때가 있다. 하지만 커피가 조금 식으면 그 본연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런 나의 취향 덕분에 나는 커피를 굉장히 오랫동안 마신다. 그래서 커피숍에서 몇 시간 씩 앉아 있을 계획 이 아닌 이상은 늘 테이크아웃 잔으로 주문해서 한 손에 들고 다니며 식은 후 까지도 버리지 않고 다 마신다.

이런 나의 습관을 늘 지켜보는 친구들은 내가 그래서 사랑도 그렇게 오래 한다며 비아냥거린다. 사랑이 식어도 버리지 않고 오랫동안 손에 쥐고 다니는 커피처럼 질질 끈다며.


그렇다. 나는 벌써 6년 째 한 남자와 연애 중이다.

그는 나와 같은 대학 동기이며 아직 학생인 그와 반대로 나는 벌써 졸업하고 변변치 않은 일자리를 그냥 저냥 다니고 있는 직장인이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에게 아무 위기도 없었던 건 아니다. 그동안 그는 군대도 다녀왔고 미국으로 1년 동안 어학연수도 다녀왔다. 그 때마다 힘들고 지쳐서 헤어지자고 내뱉은 적도 있었지만 식었다고 가차 없이 버려지는 커피처럼 그를 내 손으로 버리지는 않았다.


사랑도 커피처럼 뜨거운 순간이 있다.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에게 가장 뜨거웠던 순간은 언제였소?”라고 묻는다면, 나는 가장 먼저 그가 입대하고 첫 외박을 나왔을 때라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매일해가 중천에 떠서야 눈을 뜨는 게으름뱅이인 내가 그날은 아침 일찍부터 가평으로 가는 무궁화호 기차에 몸을 실었다. 표가 없어서 입석을 해야 했던 나는 짧은 치마를 입고 기차 통로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서 어서 가평에 도착하기를 기도하고 기도했다.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벌써 마중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나는 한 달음에 달려갔고, 우리는 거기서 아무 말도 없이 한동안 꼭 껴안고 있었다. 기차가 승객들을 태우기 위해 잠시 정차하고, 승객을 다 태운 후 역장의 신호를 받으며 출발하고 저 멀리로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그대로 가만히 서로를 안고 있었다.

그 순간에는 기차 안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승객들도, 그의 외박을 함께하기로 한 부모님과 가족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그렇게 그 순간을 즐겼다.

지금은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손잡는 것도 ‘남사스럽다’고 꺼려하는 편안한 사이가 되었지만, 어쩌면 그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풋풋하고 열정적이었던 우리의 순간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 까지도 사랑을 이어 오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도 커피처럼 언젠가는 식는다. 이제는 며칠을 만나지 않아도 안 달나 지도 않고 때로는 혼자인 시간이 좋다며 약속을 미루기도 하는 오래된 연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끝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이이며, 힘든 일이 있을 때나 기쁜 일이 있을 때, 회사 상사 욕을 할 때, 친구에게 섭섭한 일이 있을 때 등등 사소한 일도 함께 나누고 가장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단 한 사람이다. 어쩌면 그는 가족보다도, 10년 지기 친구보다도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뜨거웠던 커피의 맛을 기억하기에 식은 커피 또한 견딜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커피도 맛있지만 식어 버린 커피 또한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는 것.

커피가 식었다고 해서 커피가 아닌 것이 아니듯이

사랑도 식었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것이 아니다.

커피가 언제나 뜨거울 수 없듯이 사랑도 항상 뜨거울 수는 없는 법.

식은 커피의 맛을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되면서 나는 점점 성숙해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