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을 만큼 부끄러웠던 그날의 기억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학창 시절 학교 선생님에게 혹은 주위 어른들에게 자주 듣던 말이다. 하지만 살아갈수록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느낀다.
고등학교 시절 어느 날 고모가 말했다.
“목욕탕에서 일하라고 제안이 왔는데, 한 번 해볼까?”
당시 고모는 다니던 식당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던 중이었다. 동네의 마당발이었던 고모는 매일매일 목욕탕에서 운동도 하고, 사우나도 하고, 가기 싫다는 나를 질질 끌고 가서 떼미는 침대에 눕혀 구석구석 떼를 밀어줬다. 목욕탕에서 고모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자주 오는 단골손님들도,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가 고모를 알았고, 덕분에 나도 알았다. 나랑 고모가 목욕탕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나와 고모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사춘기 시절 발가벗고 인사하는 것이 영 뻘쭘하고 민망해서 나는 수건에 몸을 가리고 눈인사만 하고는 얼른 탕 안에 몸을 숨겼었다.
성격이 밝고 호탕한 고모는 주위 사람들에게 항상 인기가 많았다. 목욕탕뿐만 아니라 고모가 자주 가는 곳에서 고모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고모에게 목욕탕 측에서 일손이 필요하니, 일해 보는 것은 어떤지 제안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본 사람에게도 넉살 좋게 말도 잘 걸고 상대방을 편안하고 웃을 수 있게 만드는 고모의 성격은 목욕탕 주인이 탐낼만한 좋은 인재였다. 하지만 그런 제안을 받은 고모가 나에게 의견을 물어본 것은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목욕탕에서 어떤 일? 떼밀어 주는 일?”
내 말을 듣자마자 고모는 노발대발 화를 냈다.
“야! 무슨 떼밀어 주는 일!?! 내가 아무리 궁해서 밥을 굶어도, 떼밀어 주는 일은 안 한다!”
나는 다짜고짜 화를 내는 고모가 당황스러웠다.
“떼 밀어주는 일이 뭐가 어때서? 그것도 그냥 돈 받고 하는 노동일 뿐이잖아.”
고모는 나를 째려보고 뭐라고 말을 하려다 말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그 일이 아니라, 카운터 보는 일이라고 하고는 혼자서 홱 먼저 가버렸다.
그리고 며칠 뒤 고모는 동네 어느 식당에 취직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목욕탕 일에 대해서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고모였지만,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여기는 고모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도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었고, 취직을 했다. 어느 날 내가 일하고 있는 곳에 대학교 시절 친했던 언니가 손님으로 온 적이 있다. 처음에는 얼굴이 많이 변한 언니의 모습에 긴가민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쳐다보니, 그 언니가 맞는 것 같아서 반갑게 인사를 하려던 찰나, 갑자기 나는 아는 체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 동안 그 언니도 나를 못 알아봤는지, 그냥 매장을 나가버렸다. 그렇게 나는 언니에게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냥 보냈다.
그날 밤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그 언니에게 나는 왜 아는 체 못했을까? “혹시 그 언니 아니에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는데, 왜 뱉지를 못했을까? 그냥 나를 못 알아볼까 봐 그랬던 걸까? 아니면, 내가 하는 일이 창피했던 걸까?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창피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
그날 나는 처음 입사했을 때 나보다 한참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선배는 그곳에서 일한 지 10년도 넘는 베테랑이었고, 일처리도 깔끔하고 성격도 좋아서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그 선배랑 같이 단 둘이 밥을 먹게 된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신입시절, 나는 하루 종일 생각 없이 멍하게 서있는 것이 너무 싫었어. 그리고 손님으로 오는 대학 동기들을 보면 그렇게 창피할 수가 없었지. 그런데, 십 년이 지나고 30대 후반이 되었을 때, 일을 구하고 있는 다른 친구들을 보니, 이 일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어.”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인지, 혼동이 왔던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만 있었다. 그런 내게 그 선배는 다시 말했다.
“그냥. 너도 혹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봐 말하는 거야.”
그 날 밤, 나는 그 선배가 했던 말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친했던 언니에게 아는 체 하지 못했던 것이 창피해 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했던 언니와 손님과 직원으로 만나니, 어쩐지 움츠러들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이 직업을 창피해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지 않은, 세상을 상대로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내가 창피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창피해했다는 것 자체가, 오랜만에 만난 친한 언니에게 반갑게 인사하지 못한 내가 부끄러웠다.
그동안 청소부 아줌마에게 험한 말을 한 여대생 사건, 인천 공항에서 높으신 사람이 오면 숨어야 했던 청소노동자의 파업 이야기, 이외에도 판사, 검사, 의사 혹은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을 우러러보는 이 사회의 풍토들을 보며 분개하고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끔찍이도 싫어했었다.
그런데, 그랬던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당당하게 밝히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나 자신을 직접 대면하자 너무나 부끄러웠다.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을 만큼.
그 뒤로 나는 다짐했다. 나 자신에게 떳떳해지기로. 내가 왜 창피해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나 스스로 내가 하는 일을 떳떳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잠시 쉬어가는 것일 뿐이라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기회가 온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니, 나는 언제든 퇴사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으로 인해 나는 대충대충 설렁설렁 일했다. 그로 인해 나는 회사에서 혼나는 일이 잦았고, 그럴 때마다 당장 그만둬야지 하며 구직사이트를 뒤적였다.
하지만, 그 날 이후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지금 현재 내가 하는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하자.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그런 노력은 해보자. 그것이 내가 스스로를 떳떳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고, 내가 하는 말 혹은 생각이 위선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 그날의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커버 : tvn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