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착각하고 사나 봅니다, 엄마가 영원히 있어줄 거라고
"내가 좀 잘해주려고 하다가도 잘해줄 수가 없어."
2016년에 방영된 <디어마이프렌즈>라는 드라마에서 고현정이 엄마로 분한 고두심과 갈등하다가 내뱉은 대사다. 이 대사를 들을 때 속이 시원했다. 꼭 내 마음 같아서.
엄마와 가끔 싸운다. 물론 내가 삼십대나 사십대 때보다는 훨씬 덜 싸우는 편이다. 나이가 들수록 엄마도 나도 기운이 빠지니 싸울 일이 적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함께 살다 보면 충돌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엄마와 사이가 좋은 편인데도 그렇다.
불편함이 쌓이면... 나이가 들어도 싸운다
얼마 전에도 별것 아닌 일로 말다툼을 했다. 뉴스를 보다가 코로나 확진자와 위중증 환자가 너무 많이 늘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처가 너무 늦은 것 같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엄마가 한 마디 하셨다. "이제 나쁜 말은 그만~."
엄마가 내 입을 막은 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건강보험료가 갑자기 올라서 내가 투덜댔더니 그때도 엄마는 그만하라고 하셨다. '내가 집에서 내 의견도 이야기 못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엄마에게 항변했다.
"우리 집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살아? 엄마는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또 그러네. 내가 싫어하는 거 알면서."
그러자 엄마가 지지 않고 말했다.
"너가 그런 이야기할 때 화를 내서 그래."
나도 부아가 나서 대꾸했다.
"화가 나면 화도 내고 그러는 거지. 내가 엄마한테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말로 푸는 건데. 그럼 앞으로 집에서는 아무 말도 안 해야겠네."
나의 이 유치한 선언에 엄마도 질세라 대답했다.
"그래. 그럼."
그 말에 마음이 상한 나는, 진짜로 출근할 때까지 입을 닫았다.
사실 조금 떨어져서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다툼이다. 이 다툼은 그저 도화선이 된 것일 뿐, 그 전에 불편함들이 쌓여왔다. 엄마는 나이가 들수록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내가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오는 날, 다 들리는 혼잣말로 "커피는 우라지게 잘 사먹네"라고 하실 때가 있다. 커피는 기호식품이니 먹는 것 가지고 핀잔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해도, 엄마는 가끔씩 커피를 마시는 나에게 못마땅한 신호를 보내곤 한다.
"내가 오십 넘어서 커피 마시는 것도 엄마 눈치를 봐야 해?"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지 말기."
그렇게 몇 번이나 이야기해 봤지만 참는 듯 하시다가 또 튀어나오곤 한다. 사실 나도 엄마의 소비를 다 이해하는 건 아니다. 홈쇼핑을 보다가 엉뚱한 약에 꽂혀서 사려고 할 때나, 건강 프로그램을 보고 거기서 좋다는 영양제나 식품을 사려고 할 땐,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그래도 일단은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드리고, 그 상품과 판매처를 검색해 본 뒤 괜찮다 싶으면 주문하고 아니면 사지 말라고 말린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엄마와 갈등을 일으키는 건, 엄마가 사놓은 걸 나에게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나는 별 필요도 못 느끼고 귀찮기도 해서 성실하게 챙겨 먹지 못하는 편인데, 그런 나를 챙겨주고 싶은 엄마의 선의는 종종 분란을 일으키곤 한다.
"너 먹으라고 산 건데 왜 이렇게 안 챙겨 먹어?"
그런 성화를 부리실 땐 억울함이 밀려온다. 나는 그걸 먹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2016년에 방영된 <디어마이프렌즈>라는 드라마에서 고현정.ⓒ tvN
어리석은 자식은 늘 착각을 한다
밤마다 잠자리에 먼저 든 엄마를 확인하고 내 방으로 온다. 잠 자는 엄마를 볼 때마다, 그리고 점점 노쇠해지는 엄마를 볼 때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잘해드려야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엄마와의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엄마에게 남은 시간 동안 행복하고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들어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한다. 그러나 억울한 핀잔을 듣는 상황이 반복되면 드라마 고현정의 대사가 마음속에서 불쑥 올라온다.
"내가 좀 잘해주려고 하다가도 잘해줄 수가 없어."
옛말에, 여든 넘은 어머니가 육십 넘은 아들에게 차 조심하라는 말을 한다고 했는데, 그 아들은 아이처럼 대답을 했다지. 나도 오십 넘은 딸을 아이 취급하면서 선을 넘는 엄마를 그렇게 대하고 싶은데 그렇게까지 효녀 노릇을 하기는 어딘가 불편하고 어색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엄마나 나나 이제는 그런 냉전 시간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 집에서 엄마와 말을 안 하겠다고 선언하고 나간 그 날, 퇴근하고 들어오니 엄마가 부추전을 해 놓으셨다.
내가 먹고 왔다고 하자 엄마는 한껏 풀이 죽은 목소리로 "미리 말을 해주지"라고 하셨다. 다른 때 같으면 힘차게 구박을 하셨을 텐데, 그 풀죽은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져 버렸다. 엄마와의 냉전은 늘 그렇게 힘없이 끝나 버린다. 엄마의 진심은 때로는 나를 짜증나게 해도 나에 대한 사랑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진심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엄마와 나 모두 나이를 먹을수록 싸움의 빈도와 온도가 점점 줄어들었듯이, 요즘 하는 티격태격도 아마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런 뻔한 사실을 알면서도, 또 이렇게 엄마와 티격태격하는 이 시간조차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때가 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리석은 자식은 늘 착각을 한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부모가 자식을 더 사랑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아마 그 말은 부모 된 입장에 선 사람이 한 말일 거다. 우리 자식들의 잘못은 단 하나. 당신들을 덜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영원히 아니, 아주 오래 우리 곁에 있어 줄 거라는 어리석은 착각." - 드라마 <디어마이프렌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