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비혼이지만 하고 싶습니다 10화
10월 소연이 일하는 방송국에서 공개방송이 잡혔다. 공개방송을 하려고 치면 출연진 섭외에서부터 출연자 매니저와의 소통, 초대권 발부 및 확인, 초대손님 식사와 간식, 동선 체크, 큐시트와 대본 작성 등 자질구레한 일에서부터 굵직한 일까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소연은 마음이 어수선하던 차였는데, 이럴 때 일이라도 바빠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하다 보면 안 좋았던 감정도 어느 정도 희석되고, 그러다 보면 무언가 다른 의욕이 생길 거라는 걸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은 연애나 결혼하고는 거리 두기를 좀 해야 할 때라고 결론 내렸다.
오늘은 출연진이 정해진 이후, 첫 스태프 미팅이 잡힌 날이었다. 한 출연자가 사전에 튠 작업(가수가 부른 노래의 음정과 박자를 나중에 맞추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해서 음향팀도 처음으로 미팅에 참석했다.
소연은 회의 때 볼 자료를 준비하고 테이블 위에 놓고 있었다. 한 남자가 회의실 앞쪽에서 머뭇머뭇하더니 소연에게 물어봤다.
“여기가 음악 FM 스튜디오 회의실이 맞나요?”
소연이 맞다고 대답하며 어디서 왔는지를 묻자 “현대음향에서 왔습니다”하면서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 찍힌 이름을 보니 김종수 실장. 소연도 인사를 하고 김 실장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안내하며 그가 앉는 걸 지켜봤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실장님. 그 실장님을 실제로 보네요.”
소연이 농담을 던졌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괜한 농담을 던졌나 하고 후회하던 찰나, 김 실장이 “그럼 작가님은 실장이 좋아하는 캔디 같은 여주인공인가요?”하며 웃으며 받아쳤다.
“외로워도 슬퍼도 우는 나이 든 캔디네요.”
그러고 둘은 웃었다. 그때 마침 피디가 들어왔고 피디가 종수와 인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소연은 다시 한번 종수를 봤다.
키는 175센티미터 정도. 옷은 상의는 군청색 니트에 바지는 베이지색 면바지, 야상 재킷을 입었는데 방송국 내부에선 좀처럼 만나기 힘든 분위기였다. 종수는 재킷을 벗어서 의자 뒤에 걸어놓고 앉았다. 귀옆머리가 살짝 희끗한 것을 보니 나이는 오십 초 중반쯤으로 보였고, 그다지 크지 않은 눈은 서글서글했다. 살짝 반곱슬 같은 머리는 풍성했지만 단정했다.
소연은 이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대략적인 분위기를 알고 있다. 살짝 능구렁이 같은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어쩐지 종수는 담백했다.
“저희가 그 그룹 쪽 하고는 따로 연락하겠습니다. 서로 파일을 주고받으면 될 것 같아요. 다른 가수 분들은 튠 작업이 필요 없으니 그다지 복잡할 것 같지 않습니다. MR 파일만 받아서 저한테 주세요.”
그러면서 누구한테 받아야 하는지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보길래 소연이 얼른 “제가 드릴게요”하려던 찰나, 총감독을 맡은 피디가 자기가 주겠다고 답했다. 순간, 왠지 아쉬운 느낌이 들어서 소연은 잠시 스스로에게 놀랐다.
회의를 마치고 배웅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가는데, 종수가 소연에게 말했다.
“작가님. 제가 혹시 연락해야 할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명함 있으면 한 장 주세요.”
프리랜서여서 따로 명함이 없다고 하자, 종수는 자기 전화를 꺼내더니 번호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다지 작가와 음향팀이 소통할 일은 많지 않아서 순간 멈칫했으나, 소연은 굳이 안 가르쳐 줄 이유도 없어서 번호를 찍어 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깍듯이 인사하며 가는 그를 보면서 생각하나가 소연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 남자도 임자가 있겠지?’
그날 이후 종수에게서는 연락이 따로 오지 않았다. 사실 업무적으로는 따로 연락할 일이 없어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종수를 다시 만난 건 공개방송 당일이었다. 음향 실무팀이 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종수도 공연장에 와 있었다.
종수는 소연을 보고 반갑게 인사하고는 공연장 크기며 관객석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소연도 맞장구치며 지나갔다.
그날은 출연가수 챙기랴 관객 챙기랴 소연은 정신이 반쯤 나갈 만큼 바빠서 사실 종수의 존재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하는 공개방송인만큼 피디들도 초예민 상태라 모든 순간이 살얼음판 같았다.
관객 입장 시간까지 1시간 정도 남았을 무렵, 가수 김민수가 도착했다. 소연이 맞이하러 나가보니 매니저 없이 혼자였다. 매니저와 사전에 이야기할 땐, 김민수 씨가 노래할 때 가사를 적은 프롬프트를 매니저가 해주기로 했는데 안 오다니. 그렇다면 그 일은 할 사람은 지금 상황에서는 소연밖에 없었다. 그 일 외에도 할 일이 많은 상황에서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얼른 김민수 씨가 부를 4곡의 가사를 찾아서 폼을 만들고 프롬프트와 연결했다.
가사는 잘 보였지만, 스태프 중 누군가 한글이 아닌 파워포인트로 옮겨서 띄우는 게 좋다고 했다. 다음 화면으로 깔끔하게 넘어가서 가수가 보기에 훨씬 좋다는 거였다.
그동안 거의 한글로만 작업을 하고 파워포인트는 거의 해보지 않았던 소연은 두 번째 멘붕상태에 빠져버렸다. 때마침 다른 출연 가수들의 매니저들은 도착했다고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얼른 다른 피디에게 전화해서 의전을 부탁했는데, 문제는 파워포인트였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다들 자기 할 일 하느라 바빠서 도움을 요청할 수가 없었다. 절박한 상황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종수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뭔가 도움이 필요한 얼굴 같아요.”
소연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종수에게 파워포인트를 할 줄 아냐고 물었다. 종수는 간단한 건 할 수 있다면서 슬쩍 노트북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더니 가사 옮기는 정도는 할 수 있다면서 자리에 앉았다.
소연은 그 순간, 너무 고마워서 종수를 껴안을 뻔했다. 구세주라는 표현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종수는 뚝딱뚝딱 마우스를 움직이더니 가사를 파워포인트에 다 옮겨놓았고, 깔끔하게 줄까지 맞춰주었다. 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계속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너무 감사합니다”하고는 소연은 가수들을 맞이하러 달려 나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리허설이 끝났고, 관객들이 입장했다.
공연이 시작되고, 가수가 노래 부르는 동안 다음 가수 대기를 시키고, 사이사이 MC의 멘트를 수정해서 알려주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다니는 동안 공연은 차질 없이 진행됐다.
소연의 발바닥에선 불이 날 지경이었지만, 공연이 중반쯤 이르자 여유가 생기면서 마음은 안정을 찾아갔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잠깐의 틈에, 어느 가수인가 임영웅의 <이젠 나만 믿어요>를 부르는 걸 듣는데 갑자기 그 가사가 소연의 귀에 꽂혔다.
그댄 편히 걸어가요
걷다가 지치면 내가 그대를 안고 어디든 갈게
이제 나만 믿어요
나만 두고 가던, 나만 스쳐 간 행운이 모여
그대가 되어서 내게 와준 거야
궂은비가 오면 세상 가장 큰 그대 우산이 될게
그댄 편히 걸어가요
감성적이 되면 안 되는 타이밍에 주책맞게 눈물이 나오는 걸 소연은 꾹 참았다. 이제 나만 믿으라는 말, 궂은비가 오면 세상 가장 큰 우산이 되어줄 거라는 말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걸까. 그 가사가 소연의 마음을 건드렸고, 고단함과 서러움이 봇물 터지듯 터지기 직전이었다. 소연 자신도 너무 당황스러운 감정이어서, 그동안 너무 지쳐있었던 탓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머리채를 세게 흔들었다.
‘이 세상에 믿을 존재가 어디 있어. 근데 나 갱년기인가. 정신 차려~!!!’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한 시간 반 동안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가슴을 졸이다 보니 어느덧 공연이 끝나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