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별책부록> 영웅 난세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림책 <영웅을 찾습니다!/차이자오룬 글그림>

by 장소영

수많은 히어로물 영화들을 보면 한결 같이 비슷한 공식을 가지고 있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주인공이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명을 받게 되고, 주인공은 사명을 거부하며 그 역할을 수행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조언자를 만나 결국 모험을 떠나게 되고, 그( 그녀)에게는 현실 세계에서 취할 수 없는 초인적인 능력(슈트, 방패, 망치 등)까지 주워진다. 갖은 시련을 겪던 주인공은 죽음에 직면한 상황을 극복하고, 마침내 귀환하여 일상으로 복귀한다.

보통의 히어로물 영화들이 대부분 이처럼 출발-입문- 귀환의 영웅스토리 구조 공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크리스토퍼 보글러의 영웅스토리 12단계)

우리가 알고 있는 스파이더맨, 슈퍼맨, 아이언맨이 그랬고, 해리포터 시리즈도 이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식상할 법도 한 이러한 영웅 스토리가 계속해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판타지나 히어로물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 마블과 같은 히어로물 영화들이 계속해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 분석적인 의견을 내놓을 수는 없다.

다만 좁은 소견으로 생각해보자면, 점점 각박해져 가는 세상살이에서 언젠가는 영화 속 영웅들처럼 세상을 바꿔줄 영웅이 나타나 주길 바라는 갈망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정권이 바뀌고, 제도가 바뀌어도 먹고 살기 팍팍한 서민들의 삶은 여전하고, 흙수저, 금수저를 논해봐야 태어난 출신에 따른 삶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으니, 거기서 오는 박탈감으로 가상의 세계에 몰입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영화를 통해 대리 만족함으로써 개탄스러운 시대의 불만을 통쾌하게 날려버리고 싶은 '같은 마음'에서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절대 영화와 같지 않다. 우리에게는 멋진 능력의 슈트도, 방패도, 번개도 없다.

극장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모든 것이 한낮 허상에 불과한 것 같아, 허망한 영화 속 영웅의 잔상만을 간직한 채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영웅은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영웅은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주변을 돌아보니 지식이 뛰어난 사람은 많은 것 같은데, 지혜가 뛰어난 사람은... 글쎄?

요즘 사회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내 앞의 태산은 보지 못한 채, 남의 티끌만 태산만 하게 부풀려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나만 아니면 돼지.' 하는 생각으로 기회만 되면 물어뜯고, 끌어내리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치 손가락질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신이 혹시 무슨 영웅이나 되는 듯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어 진다.


'누군가의 흠을 들춰내는 당신은 얼마나 도덕적인 사람인가!'
'타인을 짓밟는 것이 과연 영웅의 자세인가!'


소크라테스는 지혜롭다는 것을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식만을 뽐내는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 채, 모두 안다고 착각하며 아는 체만 하려 한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으니 타인을 이용하고 짓밟고 서 있는 그 자리가 고매하고 높은 자리라 착각하는 것이겠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진정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무엇이고, 해내기 어려운 일은 과연 어떤 일인지 돌이켜보게 된다.


아이들과 '인권'에 대한 수업을 한 적이 있다. 신문에서 '인간답게 살 권리'를 지켜가지 위해 노력한 사람들에 관한 기사를 찾아 그들에게 줄 '인권상'을 직접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신문을 뒤져 인권상을 만들어주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냈다.


평생 모은 돈 1000만 원을 기부한 할머니
도로에서 부상당한 할아버지를 도운 고등학생
120원을 주워 경찰서에 가져다준 어린 3형제
미용기술을 배워 독거노인들 미용을 해준 조선족 할머니
고속도로에서 고의 추돌로 2차 사고 막은 40대 의인


매일 좋지 않은 일들로 가득한 뉴스만 접하다 보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선행을 베풀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아이들이 찾아낸 기사에 나온 사람들은 그냥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누군가의 아버지, 형, 동생,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그들은 슈트를 착용하지도, 어마 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아 그런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더더구나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절대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저도 남들에게 따뜻한 도움을 많이 받고 살았으니까 베풀어야죠.


라며, 입을 모아 말했다.


<학생들이 만든 인권상 사례>


당연히 해야 할 일, 받은 도움을 베풀고 돌려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말하는 그들의 모습에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받은 만큼 베풀고 사는 것도 쉽지 않지만, 받은 것을 받았다고 인식하지도 않았다는 것에 스스로 더 놀랍다. 누군가에게 받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고, 베푼 것은 은근히 생색을 내며 살고 있지 않았던가!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라는 그들의 말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남보다 잘나고 뛰어난 겉모습과 능력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요즈음, 낮은 곳에서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 영웅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대만 작가 차이자오룬의 그림책 <영웅을 찾습니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기존에 보이던 히어로물 영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의 영웅을 만날 수 있기에 신박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야기는 컵 나라의 전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작가는 왜 영웅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주인공을 '컵'으로 정했을까?

스포츠를 비롯한 각종 대회에 우승 트로피 모양이 컵이라는 것에 착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왜 챔피언에게 컵 모양의 트로피를 수여하게 되었을까?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축제 기간에 아테네 여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스포츠 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때 대회 우승자에게 상으로 암포라(amphora)라는 항아리에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담아주었는데, 우승자는 그 항아리에 들은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마시며 우승의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이 전통이 부활한 것은 17세기 무렵이었는데, 경마 경기 우승자에게 은으로 만든 '킵컵(Kyp Cup)'을 주기 시작하면서 각종 스포츠 경기에서 컵모양의 챔피언 트로피를 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월드컵' 축구의 이름도 여기에 유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지금 월드컵의 트로피는 컵모양이 아니지만 말이다.


대회의 우승자는 사람들에게 영웅과 같은 존재였을 테니, 그 영웅에게 주었던 우승컵을 생각하며 <영웅을 찾습니다!> 그림책의 주인공을 컵으로 설정한 것이라면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다양한 모양의 컵들이 살고 있는 컵 나라에 전해 내려오던 전설은 광장 중앙에 있는 높은 탑 꼭대기에 올라가 영웅 컵을 차지하는 컵이 진정한 '영웅'이라는 것이다.

광장에는 영웅이 되고 싶은 수많은 컵들이 매일같이 찾아들어 북새통을 이룬다.

다양한 모양의 컵들은 '진정한 영웅은 ~이래야 한다.'며 영웅 컵을 차지하기 위한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영웅이라면 나처럼 이렇게 튼튼하고 힘이 세야지!
영웅은 무엇보다 재주가 뛰어나야 해!
무조건 이기기만 하면 되는 거지.
영웅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영웅은 끝까지 꿈을 포기하면 안 되는 거야!


그림책 <영웅을 찾습니다! 中>


자신들이 생각하는 영웅의 조건을 내세우며 매일매일 끊임없이 광장 탑 꼭대기에 있는 영웅 컵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컵들을 짓밟기도 하고, 편법을 쓰기도 하고, 서로를 이용하는 컵들!!


과연 누가 영광스러운 영웅 컵의 주인이 될까?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책 곳곳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두 영웅을 부르짖으며 탑 꼭대기만을 바라보고 있을 때 주인공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다른 컵들은 그런 그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고, 그가 거기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림책을 보는 우리도 아마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한 채 책장을 넘겼을 것이다.

진짜 영웅을 찾고 싶다면 숨은 그림 찾기 하듯 곳곳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찾아보라. 진짜 영웅을 찾는 재미와 반전이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묘미가 아닐까 싶다.


작가는 광장에 모인 수많은 컵들을 통해 우리들의 모습을 유머러스하고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복잡한 광장의 여러 컵들 중에는 아마 나도 있고, 그대들의 모습도 있을 것이다.




가끔 SBS 생활의 달인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붉어질 때가 있다. 일을 저렇게 숙련되게 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좌절과 실패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그들의 모습을 마냥 웃으면 재미있게 볼 수만은 없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마르고 닳도록 묵묵히 해내 결국 달인이 된 그들, 그래서 그것이 재능이 되고, 거기서 삶의 지혜를 깨달은 사람들!!

그들은 누구를 짓밟지도, 누군가를 이용하지도 않고, 당연히 해야 할 제 일을 계속해서 해왔을 뿐이다.


그림책에서 보여주는 진정한 영웅의 모습도 바로 그런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그저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생활 속에서 부단한 노력으로 달인이 된 우리 주변의 보통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특별한 재능과 거창한 능력을 가진 슈퍼 히어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있는 듯, 없는 듯 제 자리를 지키며 미련하리만치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보통의 그들이 진정한 이 시대의 영웅이 아닐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영웅 컵을 받아 마땅한 영웅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영웅인지 모른 채 살아간다. 그림책 속의 주인공도 자신이 영웅인 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왜?

그들은 자신이 하는 그 일을 누구나 하는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만두 파는 일이 자신의 일이니까 맛있는 만두를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만두를 빚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도배지를 바르는 일이 자신의 일이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도배지를 바를 뿐이다.

그들이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꾸준히, 열심히 해왔기 때문에 달인의 경지에 이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저 '남들도 다 하는 일인데 뭐...' 하면서 자신을 낮춘다.

키가 작아도, 몸이 약해도, 가난해도, 상관없다. 그런 조건이 그들의 길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영웅은 난세에만 나는 것이 아니.

자신이 맡은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그 일로 인해 자신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까지 이롭게 하고 있다면, 나도, 당신도 어쩌면 이미 영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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