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고장 난 게 아니라 사양이 다른 겁니다

01. 프롤로그 : 신세계는 알약 속에 있었다

by 신지용


01. 프롤로그 : 신세계는 알약 속에 있었다.



1. AI가 건넨 위로 : 페라리 엔진과 자전거 브레이크


이 책은 거창한 포부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 어느 날 아침, 지루함을 견디다 못한 내가 AI(인공지능)에게 던진 한마디 투정에서 시작되었다.



"나 도파민이 필요해. 일만 하니까 삶이 너무 재미없어."


그때 AI가 건넨 대답은 뻔한 위로가 아니었다. 녀석은 대뜸 뇌과학 논문을 인용하며 '보상 예측 오류'와 'ADHD의 특성'을 들이밀었다.


"대표님은 고장 난 게 아닙니다. 예측 가능한 보상을 지루해하는 '사냥꾼의 뇌'를 가졌을 뿐입니다. 단지 고성능 페라리 엔진에 자전거 브레이크를 달고 달리고 있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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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페라리 엔진과 자전거 브레이크. 그보다 나를 더 완벽하게 설명하는 비유는 없었다.


나는 명함만 보면 꽤 그럴싸한, 30대 개인사업자이자 작곡가다. 7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고, 지금은 내 사업체를 운영한다. 남들이 보기엔 "똑 부러지는 커리어 우먼"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 일상은 통제 불능의 지옥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일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으로 천장을 뚫을 듯 노려보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기이한 마비 상태.

뇌는 과부하가 걸려 타들어가는데 몸은 움직이지 않는 그 끔찍한 무력감.

(의학적으로는 이를 '실행 기능 장애(Executive Dysfunction)'라고 부른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나는 그저 내가 구제 불능의 게으름뱅이라고 자책하며 이불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 뿐이었다.

그러다 마감이 목을 조여 오면, 내 생명력을 갉아먹는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겨우 결과물을 던져내고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이런 식으로는 내 커리어도, 내 인생도 곧 망가질 게 뻔했다.




2. 검사받다 조는 환자


"너도 검사 한번 받아봐. 신세계가 펼쳐진다니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그 '신세계'라는 단어가 6개월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존심 센 나는 "정신과는 의지박약이나 가는 곳"이라며 버텼지만,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래, 어차피 망하기 직전인데 쪽팔린 게 대수냐."


그렇게 찾아간 병원에서 종합 주의력 검사(CAT)를 받았다.


어둡고 침침한 곳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갈하고 깔끔한 독서실 같은 방이었다. 딱 나 하나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컴퓨터와 의자 하나. 그 적막함이 묘하게 긴장감을 주었다.


단순한 도형이 나올 때마다 버튼을 누르는 지루한 테스트였다. 솔직히 처음엔 코웃음을 쳤다. 화면에 도형이 나오면 버튼을 누르는, 유치원생도 할 법한 단순한 테스트였기 때문이다.


'고작 이런 걸로 뭘 알아낸다는 거지? 내가 병원을 잘못 찾아왔나? 괜히 비싼 검사비만 날리는 거 아냐?'


나는 오기가 생겼다. 그래도 내가 대학 시절 성적 우수 장학금을 놓치지 않고 다녔던 사람인데. 내 자존심이 있지, 이런 단순한 검사 따위 완벽하게 해내서 내가 정상이라는 걸 증명해 보이리라. 나는 눈에 불을 켜고 모니터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 '쉬움'이 함정이었다. 사실 병원에 오는 버스 안에서도 졸다가 정거장을 지나칠 뻔했었다. 이미 내 눈은 반쯤 풀려 있는 상태였다.


문제가 너무 쉬우니까 역설적으로 뇌가 견디질 못했다.

긴장감이 사라지자마자 뇌는 '지루해. 지루해. 미쳐버릴 것 같아.' 라며 전원을 꺼버리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검사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거의 반수면 상태가 되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꺼풀이 천근만근 내려왔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버튼을 누르며 꾸벅꾸벅 졸았다.


'이 쉬운 걸 하면서 졸다니... 아, 이래서 내가 ADHD라는 건가?'


검사가 끝나고 의사 선생님을 마주했을 때, 나는 쭈뼛거리며 이실직고했다.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너무 피곤했는지... 막판엔 거의 졸면서 했어요. 검사 결과가 엉망일 것 같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차트를 보며 피식 웃으셨다.


"검사하다가 조셨다고요? 흐음... 그게 ADHD의 증상 중 하나긴 해요."


일반인은 긴장해서라도 깨어있으려 노력하지만, ADHD의 뇌는 자극이 사라지는 순간 각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전원을 꺼버린다는 것이다. 졸음은 게으름이 아니라, 내 뇌의 '저각성' 증상이었다.




3. 의외의 성적표 : 똑똑한 사회 부적응자?


검사가 끝나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선생님은 모니터에 뜬 내 결과 그래프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명쾌한 진단을 기대했던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결과가... 아주 복잡하네요. 일단 지능적인 부분, 추론이나 언어 이해력은 상위권이에요. 계산 능력도 지극히 정상이고요."


나는 내심 안도했다. '거봐, 나 아니라니까.' 하지만 반전은 그다음에 있었다.


"그런데, 여기 '정서 인식' 부분이 뚝 떨어져 있네요. 사람 표정을 보고 감정을 읽는 능력이 현저히 낮아요. 수치상으로는 사회성이 좀 떨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나는 귀를 의심했다. 사회성이 없다고? 내가? 나는 어디 가서 눈치 빠르다는 소리를 밥 먹듯이 듣는 사람이다. 드라마를 보면 편집점만 봐도 결말을 맞추고, 상대방의 숨소리만 들어도 기분을 파악하는 독심술사인데. 내가 표정을 못 읽는다니?


"선생님, 저 눈치 엄청 빠른데요? 저 진짜 예민해서 사람들 감정 다 읽어내는데요?"


내가 억울해서 항변하자 선생님은 웃으며 말했다.

"그건 타고난 감각으로 아는 게 아니라, 본인이 머리를 써서 상황을 '분석'해서 맞추고 있다는 뜻이죠. 그래서 남들보다 피곤한 거고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나의 그 기막힌 눈치는 타고난 센스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뇌를 풀가동해서 돌린 '고성능 시뮬레이션'의 결과값이었던 것이다. 나는 머리로 '사회성'을 연기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것이 바로 고지능 ADHD (Twice Exceptional, 이중 특이성)들이 겪는 딜레마였다. 뛰어난 지능으로 결함을 너무나 훌륭하게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나조차 내가 아픈 줄 몰랐던 것이다.



� 뇌과학 토막 상식: 이중 특이성(2e)이란?

1. 이중 특이성(2e, Twice Exceptional)이란?

이중 특이성은 영재성과 ADHD, 난독증, 자폐 스펙트럼 등 신경다양성(Neurodivergence)을 동시에 가진 상태를 의학적으로 '이중 특이성(2e)'이라 부릅니다. 이들은 상반된 두 가지 특성이 공존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ADHD 검사나 지능 검사만으로는 발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2. 지능으로 땜질하기 : 보상 기제

2e 그룹의 가장 큰 특징은 '보상 기제'입니다. 이들은 전두엽의 실행 기능 저하(ADHD 증상)를 자신의 높은 인지 능력(지능)으로 메꾸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주의력이 떨어져 정보를 놓치면 빠른 추론 능력으로 맥락을 파악해 빈틈을 채우는 식입니다.


3. 머리는 어른, 마음은 아이 : 비동기적 발달

이들의 지능 발달 속도는 매우 빠르지만, 정서 조절이나 충동 억제 같은 실행 기능의 발달은 평균보다 늦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로 인해 '머리는 어른인데 행동은 아이 같은' 불균형이 발생하며,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능력과 성과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큰 혼란을 겪습니다.




4.마법의 물약은 없다 (하지만 공략집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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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나에게 ADHD 진단을 내리며 하얀 알약을 건넸다. 나는 친구가 말했던 그 '신세계'를 기대하며 약을 삼켰다.


하지만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신세계는커녕 안개 낀 듯 시야는 흐릿해졌고, 손은 수전증처럼 떨렸다. 심장은 제멋대로 쿵쾅거렸다. 나에게 맞는 용량을 찾기까지 꽤 긴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이게 신세계라고?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결국 알게 된 진실은 이것이다. 세상에 마법의 물약은 없다. 약은 그저 내 고장 난 브레이크 패드를 아주 조금 두껍게 만들어줄 뿐, 핸들을 잡고 운전하는 건 결국 나의 몫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쓴다.

나는 의사도 아니고 뇌과학자도 아니다. 하지만 억제력이 약한 대신 폭발적인 추진력을 가진, 안정을 희생하고 창의성을 산 '고성능 돌연변이'로서 어떻게 이 정글에서 살아남았는지 기록하고 싶었다.


이 책은 단순한 투병기가 아니다.

자신이 게으르다고 자책하는 수많은 '숨겨진 2e(고지능 ADHD)'들을 위한 뇌과학적 사용설명서이자, 길 잃은 사냥꾼들을 위해 내가 온몸으로 부딪히며 쓴 '실전 공략집'이다.


자, 이제 잃어버렸던 우리 뇌의 '사용 설명서'를 펼쳐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