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이중생활 (환경 편)
내가 "나 사실 ADHD야"라고 고백하면, 십중팔구는 반응이 똑같다.
"에이, 거짓말하지 마. 너처럼 성실하고 결과물 좋은 애가 무슨 ADHD야? 핑계 대지 마."
그들의 눈에는 내가 7년 차 강사이자 사업가, 그리고 일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해내는 '완벽주의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나는 마감을 여유 있게 칼같이 지키는 타입이 아니다. 마감 직전까지 미루고 미루다, 막판에 미친 듯이 몰입해서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밤을 새워서라도 붙잡고 늘어지는 쪽에 가깝다. 사람들이 보는 건 과정의 '혼돈'이 아니라, 그렇게 짜내서 만든 번듯한 '결과물' 뿐이니까.
생활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보기엔 내가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분 단위로 쪼개진 예쁜 스케줄러를 끼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오늘 해야 할 일을 까먹지 않기 위해, 스마트폰과 메모장에 투박한 '생존형 체크리스트'를 끊임없이 적어 내려갈 뿐이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보면, 영락없는 '성실한 노력파'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그들이 보는 나의 '성실함'은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구멍 난 뇌를 메우기 위해 이식한 '인공 근육'이기 때문이다.
우선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나의 '하드웨어'는 분명 결함이 있다. 심리학자 레이먼드 카텔(Raymond Cattell)은 지능을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그중 하나가 '유동성 지능(Fluid Intelligence, Gf)'이다. 이것은 학습과 무관하게 타고난 두뇌의 '기본 처리 속도'와 '직관력'을 말한다. 컴퓨터로 치면 CPU의 깡성능인 셈이다.
나의 Gf는 꽤 고사양이었다. 덕분에 남들보다 빨리 보고, 빨리 파악했다. 문제는 이 CPU가 제멋대로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나는 드넓은 초원을 목적지 없이 달리고 싶은 야생마였다. 트랙을 도는 규칙 따위는 질색이었다. 내버려 두었다면 나는 아마 재기 발랄하지만 무책임한, '천재적인 한량'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강력한 '환경'이 있었다.
폭주하는 고성능 하드웨어에 핸들과 내비게이션을 달아준 것, 그것이 바로 '결정성 지능(Crystallized Intelligence, Gc)'이다. 이것은 교육과 경험을 통해 후천적으로 축적되는 논리력, 언어 능력, 판단력을 의미한다. 즉, 뇌에 깔리는 '소프트웨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강제했던 혹독한 글쓰기 훈련과 규칙적인 생활은 내 뇌에 '논리 프로세스'를 강제로 설치하는 과정이었다. ADHD의 뇌는 생각이 팝콘처럼 사방으로 튀어 정리가 안 된다. 하지만 수년간 흩어지는 생각을 문장으로 붙잡아 '구조화'하는 훈련을 반복하자, 뇌는 생존을 위해 경로를 바꿨다.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지 말고, 논리에 맞춰 출력하라." 이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적 비계(Scaffolding)' 역할을 했다.
내 부실한 전두엽(충동 억제 기능)을 대신해, 훈련된 습관(논리적 사고)이 뇌의 지지대가 되어준 것이다. 덕분에 나는 야생마의 심장을 가졌지만, 겉으로는 훈련 잘된 '경주마 코스프레'가 가능해졌다.
남들이 보는 나의 '지성'은 타고난 천재성이 아니라, 훈련으로 만들어진 '방어기제'였다.
"와, 너 진짜 꼼꼼하다. 완벽주의자야?" 사람들이 내 결과물을 보고 감탄할 때, 나는 속으로 묘한 미소를 짓는다. 그들이 말하는 나의 '꼼꼼함'은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증상'이자 '전략'이기 때문이다.
나는 완벽을 추구하는 게 아니다. '실수'를 공포스러워하는 것이다. ADHD인 나는 내가 언제든 칠칠맞게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내 전두엽은 믿을 수 없는 녀석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믿는 대신, 끊임없이 의심하고 감시한다.
남들이 한 번 보고 넘길 문서를 열 번씩 다시 확인하고, 가스 밸브를 잠갔는지 현관을 나서다가도 세 번씩 되돌아간다. 메모장에 적힌 체크리스트를 강박적으로 긋는 행위는 계획성이 아니라, 구멍 난 기억력을 메우기 위한 처절한 '안전장치'다. 나의 완벽주의는 '더 잘하고 싶은 욕망'보다 '지적받지 않으려는 방어기제'에서 탄생했다.
그렇기에 나의 성실함에는 막대한 비용이 따른다. 일반인들이 '성실함'을 유지하는 데 에너지 10이 든다면, 나는 100을 태워야 한다. 전두엽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상태에서 질주를 제어해야 하기에, 나는 늘 '불안'과 '강박'이라는 연료를 들이부어야 했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더 명확해진다. 보통 사람들은 '도파민(성취감)'을 연료 삼아 "이걸 해내면 뿌듯하겠지?"라며 기분 좋게 시동을 건다. 하지만 도파민 회로가 고장 난 나의 뇌는 성취감만으로는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다. 대신 나는 '노르에피네프린(불안, 긴장)'이라는 다른 연료를 쓴다.
"이거 안 하면 망한다", "실수하면 비난받는다"는 긴박함이 주어질 때 비로소 뇌가 각성 상태로 돌입해 폭발적인 에너지를 낸다.
예전에는 이런 내가 싫었다. 불안에 쫓겨 사는 삶이 피곤하고 억울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이 '불안'이야말로 나를 남들보다 더 노력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나를 성장시키는 '고성능 연료'였다는 것을.
남들이 10만큼 노력할 때, 나는 불안하기에 100을 준비했다. 남들이 "이 정도면 됐어"라고 멈출 때, 나는 실수할까 두려워 한 번 더 검토했고, 그 덕분에 늘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처음엔 단점인 줄 알았던 나의 예민함이, 역설적이게도 나를 '대체 불가능한 전문가'로 만들어준 것이다.
나는 백조다. 물 위에서는 세상 누구보다 우아하고 침착해 보이지만, 물밑에서는 가라앉지 않기 위해 쉼 없이 발을 구르고 있는 백조. 나의 성실함은 여유가 아니라, 익사하지 않기 위한 야생마의 필사적인 생존 수영이었다. 그리고 그 치열한 발버둥 덕분에, 나는 오늘도 물에 빠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 [뇌과학 토막 상식] 유동성 지능(Gf) vs 결정성 지능(Gc)
• Gf (타고난 머리):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추론 능력과 암기력. 나이가 들면 감소합니다. (하드웨어)
• Gc (만들어진 머리): 학습과 경험으로 축적된 지식과 통찰력. 나이가 들어도 계속 발달합니다. (소프트웨어) • 작가의 생존법: 작가는 선천적으로 부족한 '충동 조절 능력'을, 후천적인 훈련으로 만든 '결정성 지능'으로 끊임없이 메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겉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고사양 ADHD들의 특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