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이 좋았지
집 떠나 개고생의 서막
주거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저 먼 이야기로만 느껴졌던 부동산이었는데 몇 년 전부터 실제로 투자를 하거나 실거주를 목적으로 집을 구매하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소개팅에 나갔다가 내내 부동산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왔다는 이야기부터, 데이트로 임장을 다닌다는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썰들을 들으며 웃으며 넘기곤 했지만 크게 나의 문제라고 와닿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약한 체력과 시간 절약을 이유로 집에서 나와 학교 근처에서 살기 시작한 것이 내가 기억하는 본가에서의 첫 독립이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이 나에게 얼룩을 남기지 않은 이유는 생활 전반에 들어가는 비용들이 부모님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는 것과 차를 타고 한 시간이면 만날 수 있는 가족들이 있는 집이 있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얼마나 온실 속의 화초였는가.
하지만 일을 시작하고 내가 내 밥벌이를 스스로 하게 되며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직장을 위해 서울에 올라오는 순간 고난은 시작되었다.
미래를 살포시 접어 마음 한 구석으로 치워버리고 머리가 꽃밭이 되면 조금 쉽기도 하다
갑자기 취직이 되어 집을 구하기에는 터무니없는 시간이었다.
서울-부산을 여러 번 이동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서 하루 날을 잡아 직장과 출퇴근이 쉬운 집 위주로 움직였다. 그 당시 집 구하는 어플을 사용했는데, 월세라 상대적으로 집을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복층'에 살겠다는 단호한 로망이 있었기 때문에 방문할 곳을 추리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다.
물론 월세는 상상 이상이었지만, 처음으로 혼자만의 공간을 가진다는 생각에 그 정도 지출을 괜찮다며 홀로 사는 삶에 대한 로망으로 들떠있었다. 그저 숨쉬기만 해도 100만 원 정도의 지출이 생기는데, 당장 올지 모르는 미래보다는 눈앞의 자유가 더 크게 와닿았고 내가 열심히 번 근로소득이라는 당위성도 현실에 대한 감각을 한층 무디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까운 돈이지만, 그때만 경험할 수 있는 기분이었기에 크게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렇게 1년을 살아내고 나니, 생각보다 돈을 모으는 것이 쉽지 않았다. 평소 소비행태를 보면 비단 집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근로소득자에게 100만 원가량의 고정적 지출은 꽤나 버거운 금액이었다. 부랴 부랴 1년의 계약기간이 끝나기 전에 전세로 들어갈 집을 구해보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나보다 빨랐다.
당시 결산을 담당했던 부서에 갓 들어간 나에게는 전세제도, 집, 대출, 이사 등의 프로세스를 알아볼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극악의 워라벨 속에서 집에 돌아오면 누워 잠자기 바빴고, 눈을 뜨면 부랴부랴 출근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람이 무얼 더 할 수 있었겠는가.
시간은 점점 가고,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는 시점이 왔을 때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얼마 없는 시간 안에 집을 구해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이사를 가는 것과 집주인 아저씨께 반전세 혹은 전세로의 전환을 빌어보는 것. 우선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하고 후자를 먼저 시도해보았다. 지금은 멋진 중개인이 된 언니가 준 아이디어.
타고난 외향인으로 보이는 나지만,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는 것은 잼병인 나였기에 생각도 해보지 못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멋쟁이 언니의 명쾌한 코칭과 멘트, 주인아저씨가 동향 출신에 좋은 분이었다는 점, 그간 월세를 꼬박꼬박 밀리지 않고 내며 쌓아둔 신뢰의 운 좋은 콜라보로 월세에서 전세로 전환을 해주시기로 하셨다.
그 덕에 2년 동안의 거주가 연장이 될 수 있었다. 월세에 비해 1/2 정도 줄어든 지출 덕분에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었고 잠깐 동안이나마 주거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딱 3년 차가 되는 순간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 복층의 단점, 그리고 월세 수익이 목적인 오피스텔의 투자목적 등 다양한 이유로 평화로운 전세살이에 시련이 닥쳐왔다. 집을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