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스트하우스 선정 (feat. 까탈 보스)
나를 둘러싼 safe zone을 깨고 싶었다. 제주 한 달 살이를 결심한 가장 큰 이유다. 매일 같은 루틴으로 돌아가는 일상이었다. 안주할수록 마음이 병약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건강해지고 싶었다. 부딪히고 상처 받고 아물어서 단단해지는 경험이 필요했다.
2019년을 맞이하며 새로운 환경에 대한 갈증도 극에 달했다. 사소한 시선조차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의 걱정, 친구들의 잡담, 안부 인사까지 작은 관심도 부담스러웠다. 자기 전 지친 몸으로 침대에 누우면 ‘아무 말도 안 들렸으면’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춘기 중2병 같지만 진심이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혼자 충전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곳.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곳.
시기가 적절하기도 했다. 12월 말쯤 딱 인턴이 끝나고, 상반기 채용까지는 몇 달이 남았다. 온전히 나와 세상에 집중하는 시간으로 쓰고 싶었다.
막연히 제주도민이 되어 책 읽고, 글 쓰고, 가끔 파티도 하고 여행도 하는, 그런 삶을 기대하고 계획하기 시작했다. 신문 끊기, 정기 모임 정리, 학원과 운동 스케줄 조정 등 작은 것부터 조금씩 준비했다. 한 달간 비워 둘 내 자리를 정리하는 일은 생각보다 낯설었다. 이 세상에서 잠시 훌쩍 사라지는 느낌도 들었다.
게스트하우스는 그다음에 찾기 시작했다. 순서가 조금 뒤바뀌긴 했다. 대표 카페에서 2주 정도 거의 밤낮으로 게스트하우스들을 검색했다. 사실 카페 들락거리는 건 1-2달 전부터 해왔지만 본격적으로 각 잡고 검색한 건 2주 정도였다. 예약자들 한줄평, 리뷰, 지도 거리뷰, 스텝 후기 등등을 참조했다. 한 30개 정도 검색한 것 같다. 처음에는 뭘 따져야 하는지 감도 안 잡혔다. 하지만 검색할수록 내가 원하는 조건들이 뚜렷해졌다.
-제주도 느낌 물씬 나는 건물과 주변 환경 (시골 느낌 단독주택, 골목길, 바다까지 도보 가능 등)
-버스 정류장과 편의점/마트 근처
-식사를 매번 인심 좋게 챙겨주는 곳
-소소한 파티를 여는 곳
-휴무 많은 곳
-스텝이 3명 이상이고 방을 따로 주는 곳
이 외에도 공고가 너무 자주 올라오지 않는 곳, 강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등의 자잘한 조건들도 염두에 뒀다. 가장 중요한 건 인간적이고 좋은 사장님이었다. 급여는 우선순위에 없었다. 내 제주생활이 행복할 수 있다면 돈은 받지 않아도 좋았다. 당연히 저 조건들을 전부 만족하는 곳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사람 욕심이 끝이 없는지라, 어느 정도 조건을 충족하는 곳을 찾아도 일단 킵해두자.. 하며 연락하기를 미뤘다. 이러다 못 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폭풍 검색 후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
부모님이 반대한다고 안 갈 건 아니었다. 하지만 최대한 평화롭게 설득하기 위해 3장짜리 보고서를 써서 보여드렸다. 제주에서 한 달을 살아야 하는 이유부터 스텝 문화, 왜 그 게스트 하우스여야 하는지 등등.. 그러고 보면 참 논리적인 거 좋아하는 것 같다. 읽어보시곤 의외로 담담하게 갔다 오라고 하셨다. 생각 많이 한 것 같다고. 아마 과거에 언젠가 '나 제주도 가서 한 달 살 거야. 정말로.' 하며 몇 번 언질을 줘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출국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해당 게스트하우스로부터 스텝을 더 이상 쓰지 않기로 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너무나 허망하고 실망스러웠다. 내게는 도전이었고, 큰 맘먹고 세운 계획이었다. 그만둘까, 운명이 아닌가, 며칠을 고민하다가 실낱같은 희망으로 찜 해두었던 다른 게스트하우스에 연락을 넣어보았다. 기적처럼 함께 일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역시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일이 풀린다.
사장님과의 카톡을 끝내자 비로소 실감이 조금 났다. 지금은 맘 놓고 비행기 표를 검색 중이다. 짐도 부쳐야 하고, 할 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