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100일 no.1
제주 100일은 골목을 걷는 시간들이었다
제주에서 골목길에 눈을 뜨게 되었다. 똑같은 골목길이어도 마을마다 느낌이 다르다. 같이 스텝 했던 언니 중에 바다를 너무 사랑하는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는 바다 사진만 보여주면 여기는 함덕, 여기는 김녕, 이런 식으로 구분을 해냈다. 하지만 나는 골목길이다. 바다는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골목으로는 마을을 구분할 수 있다. 하늘이 펼쳐진 정도, 집의 촘촘함, 길바닥 느낌 같은 게 다 다르다. 그래서 골목길을 첫 테마로 잡기로 했다.
파란 지붕 집, 숯 색 돌담, 깃털 구름, 부드러운 바람소리, 할망
종달리를 걷다 보면 자연스레 이런 단어들이 떠오른다. 우리 스텝들도 친구가 놀러 오면 꼭 한 번씩은 데리고 갔다. 그만큼 제주스러운 환상을 간직한 곳이다. 스텝을 시작한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그리고 스텝을 마치기 일주일 전. 이렇게 두 번 종달리를 다녀왔다. 종달리 여행은 '종달초등학교 정류장'에 내리면서 시작된다. 시간이 잘 맞으면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아득한 소리로 뭐라 뭐라 소리치면서 뛰어다니는데 그 모습이 어쩐지 마음에 안정을 준다. 어느 날은 버스에서 내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배가 고파질 때까지 바라보기도 했다.
제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했다. 평생 서울밖에 몰랐던 나는 3개월 간 제주도민으로 살면서 제주 토박이들이 부러웠다. 뭔가 특별한 행운을 지니고 태어난 이들처럼 보였다. 제주 땅에서는 내가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향수(nostalgia)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주에 살면서 자주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슬리퍼 하나 가지고도 까르르 터지고, 흙장난하는 유치원생이 되기도 했다. 길 강아지가 더러운 줄도 모르고 마냥 쓰다듬고 뽀뽀했다. 뉴스나 예능, 드라마와도 거의 차단된 상태에서 지내다 보니 내 주변의 작은 것들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런 마음을 누군가는 퇴화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나는 정화라고 생각했다.
따스한 밥 한 끼
종달리에는 밥집, 술집, 카페 등 은근히 먹을 곳이 꽤 있다. 첫 여행에서는 '종달 수다뜰'에 갔다. 제주에서 맞는 첫 혼밥 시간. 바람을 너무 많이 맞아 졸도 직전이었기 때문에 뜨끈한 성게 미역국을 시켰다. 이 날 진짜 바람이 너무 많이 불었다. 골목길을 걷는데 맞은편에서 또 홀로 여행 오신 분이 바람에 눈도 제대로 못 뜨며 걸어오길래 동질감을 느끼면서 쓱 지나쳤다. 바람에 얼굴이 구겨진 채 서로를 지나치는 모습이 웃겼다. 사실 하하하 웃었어도 바람소리 때문에 들리지도 않았을 것 같다. 여하튼 식사는 성공적이었다. 손님이 아무도 없어서 좀 뻘쭘했는데 상이 꽉 차게 나오는 반찬과 너무 맛있는 미역국 덕에 금방 잊었다. 몰입하면 주변의 것은 다 사라지는 내 버릇이 좋을 때도 있다. 노래도 안 나오는 극 조용한 분위기에 내 숟갈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따뜻한 국으로 천천히 속을 채우고 나와 작은 힐링을 선사해준 그곳의 사진을 찍었다. 또 먹고 싶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다시 조그만 골목길로 들어섰다. 앞에 걸어가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자꾸만 뒤를 돌아보시다가 아예 돌담에 걸터앉아 지나가는 나를 멀뚱히 보셨다. 할머니 안녕하세요-하고 말을 걸까 말까 하다가 결국 걸지 못했다. 사실 제주살이를 하면서 가장 후회하는 부분이다. 내가 제주에 여행이 아니라 살러 간 것은 해녀, 돌담집, 제주 설화 같은, 겉만 핥아서는 알 수 없고 진득하게 살아야만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알고 싶어서였다. 3개월 만에 모든 걸 알기에는 욕심일 수도 있지만..
종달리 비밀코스
원래 가려던 카페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급하게 '종달리 746'으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덕분에 지름길보다 조금 더 뺑 돌아갔는데, 이게 행운이었다. 자갈자갈 돌길도 걷고 숨겨진 저수지 같은 곳에서 오리 떼도 발견했다. 뚜벅이 여행이 가장 즐거운 순간이다.
'종달리 746'은 큰 나무 옆에 있어 언뜻 보면 마을회관 같기도 하다. 안에는 섬세해 보이는 젊은 여사장님이 계셨다. 신기하게 제주의 조용한 카페나 서점에는 딱 그 장소에 걸맞은 이미지를 가진 사장님들이 계신다. 그리고 책이 많았다. 독자들이 쓴 건지 사장님이 쓰신 건지 모르지만 간단한 추천평 메모지도 붙어있었다. 임경선 씨의 ‘태도에 관하여’를 골라 자리를 잡았다. '종달리 746'이 좋았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내가 너무 사랑하지만 찾기 힘든 좌식카페였기 때문이다. 자세는 생각을 좌우하는데,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으면 생각도 각이 잡히는 느낌이다. 그래서 풀어진 감정과 자유로운 생각을 마구잡이로 느끼고 싶을 때는 뒹굴거릴 수 있는 좌식 카페가 좋다.
한라봉 에이드를 시켰다. 일종의 강박관념이다. 호기심을 버릴 수 없어 꼭 시그니처나 제주에 관련된 것을 시키게 된다. 귤, 한라봉, 천혜향, 댕유자, 당근같은 단어를 보면 뿌리치기가 힘들다. 여담이지만 구좌는 당근이 유명하다. 하여 스텝으로 일하면서 '구좌는 당근이 유명해서' 당근 케이크 집을 추천한다고 하면 그냥 당근 케이크를 추천할 때보다 훨씬 사람들의 이목이 확 집중됐다. 특산물을 개발하는 것이 관광산업에 어찌나 중요한지 실감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00 축제 같은 걸 만들어 내나 보다. 여하튼 한라봉 에이드가 너무 맛있었다. 에이드 종류는 실패하기 힘들지만 간혹 가다 보면 이상한 잎 같은 걸 넣어서 입을 텁텁하게 만드는 음료로 만들어버리는 카페도 있다. 여기는 한라봉도 많이 들어가고 달달하고, 큰 빨대로 뽀글뽀글 올라오는 기포도 시원하고, 쭉쭉 빠는데도 양이 줄지 않아서 더 기분이 좋아졌다.
슬슬 해가 질 것 같아 얼른 카페를 빠져나왔다. 워낙 골목길이 많고 시골마을이라 불빛도 별로 없었다. 자칫하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까 봐 걱정이 됐다. 벌써 하늘에는 살구색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중간중간 사진 찍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노을이 말도 안 되게 예뻤다. 갈대밭 위에 떠 있는, 깃털에 살짝 색을 적셔놓은 듯한 구름은 고즈넉하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뛰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내뱉는 숨 안에는 이러다 깜빡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와 이 노을을 살면서 다시는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열망이 뒤섞여 있었다.
제주는 돌, 바람, 여자라고 하지만 나에게 제주는 골목길이다. 서울에서 골목은 무서운 이미지였다. 칼부림, 어둠, 살인이었다. 6시 이후로는 골목으로 다니지 않았다. 이 날도 제주에 온 지 일주일밖에 안됐었기 때문에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지레 겁을 먹고 후다닥 골목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지금의 나였다면 조금 더 천천히 걸을 수 있었을 거다. 골목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된 건 제주에서의 큰 수확 중 하나다. 특히 바람이 숭숭 통하는 제주의 돌담 골목은 왠지 자유롭다. 앞으로 제주에 갈 일이 있다면 골목을 잘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