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받지 않은 손님

제주살이 100일 no.2

by 치즈미

제주살이 100일 no.1

2019년 1월 2일


처음 스텝으로 일하러 왔던 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제주공항에서 내려 101번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내 온실을 찢고 나온다'. 그 간 우물 안 개구리 콤플렉스가 심했다. 주변 친구들은 대부분 나처럼 모범생이었다. 부모님은 그 흔한 아르바이트라도 한 번 할라치면 그런 걸 왜 하냐고 불같이 화를 낼 정도로 걱정이 많은 성격이셨다. 그 덕에 안전하고 순탄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숨이 막혔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소리겠지만 답답했다. 내가 아는 세상 말고도 분명 뭔가 있는데, 뭔가가 있을 텐데. 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혼자서 뭘 찍고 인턴을 하고 남미 여행을 다녀와도 깰 수 없는 막이 있었다. 세상을 모르는 바보로 살다가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제주로의 독립은 내게 중요했다. 부모님께는 A4 3장짜리 제안서를 빼곡히 적어 제출했다. 내가 왜 제주에 가야 하는지, 뭘 하는 곳이고 어떻게 살 것인지. 독립에 대한 열망이 극에 달한 상태였기 때문에 상의할 생각은 없었고 거의 통보였다.


마침내 버스에서 내린 곳은 불빛이 거의 없는 깜깜한 도로였다. 게스트하우스의 간판만 반짝거렸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깜깜한 하늘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고요. 이 고요가 제주구나. 드디어 나는 집에서 벗어났다. 짜릿함과 동시에 정신이 깨어나면서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게스트 하우스 문을 열고 새로 온 스텝이라고 하자 카운터에서 일하던 스텝 오빠가 앉아서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한창 파티 진행 중인지라 바빠 보였다. 그렇게 5분, 10분, 15분. 점점 뭔가 예상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고립된 곳에서 심심하게 보내고 싶지 않아서 스텝이 많은 게하로 지원을 했었다. 그래서 내가 도착하면 우르르 나와서 소개도 하고 반겨줄 줄 알았는데 누가 스텝이고 누가 대기 중인 게스트 인지도 모를 만큼 다들 쌩하게 모른 척을 했다. 어정쩡하게 앉아 있는데 하다 못해 ‘어, 누구세요?’라고 묻지도 않았다. 그 날 다른 스텝의 송별회가 있었는데, 송별회 자리에 가서야 아, 아까 구석에서 얘기 중이었던 저분도, 슬리퍼를 끌고 하릴없이 돌아다니던 저분도, 다 스텝이었구나, 알 수 있었다.



돌아가야 하나?

일주일쯤 지났을 때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미 몇 달을 함께 먹고 자며 가까워진 스텝들은 새로운 사람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어쩌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단 한 명과도 어느 정도 이상으로 가까워지기가 힘들었다. 쉬는 날에 혼자 어딜 갔다 와도 '어, 왔어?'정도만 하고는 다시 자기들 놀던 얘기로 돌아갔다.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내 하루, 그리고 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 이 곳에서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일도 아닌데 그땐 그게 그렇게 심각했다. 잠깐 보다 마는 사이가 아니라 앞으로 24시간 붙어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거의 생존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제주에서 참 배운 게 많다. 스스로 자유를 조절하는 법, 일과 생활 사이에 애매하게 걸친 조직에서 스스로를 지켜내는 법, 여행을 짜는 주체성, 낯선 곳에서 감정을 조절하는 법과 정 붙이는 법. 이미 친해진 사람들 사이에 녹아드는 법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스텝들과 가족처럼 느낄 정도로 서로를 좋아하게 된 후에도 새로 오는 스텝들을 보면 항상 어느 기간 동안은 겉돌았다. 처음엔 나도 당황하고 서운했던 경험이 있기에 새로운 스텝이 오면 꼭 친근하게 해 줘야지, 마음먹고 챙겨줬다. 그래서 내 뒤에 온 언니들은 나를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런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스텝이 예닐곱 번씩 바뀌게 되자 나도 초심을 잃어갔다. 노력을 들이는 게 힘들었다. 새로운 스텝이 육지에서 뭘 하다 왔는지 보다 친해진 스텝들의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더 궁금했다. 우리가 원래 알던 이야기를 하는 게 재미있고, 굳이 새로운 사람을 내 마음에 들이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면서 내가 처음 왔을 때도 다들 이런 감정이었겠구나 생각했다.



결국 필요한 건 시간이다.

하루하루 얇은 시간이 쌓이면서 가족이 된다. 물들어 간다. 내가 빨리 그룹의 일원이 되고 싶은만큼, 기존 사람들에게도 내 자리를 마련할 시간이 필요하다. 쉬는 날 함께 바다 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 마감 후 무드등 아래서 마시는 맥주 한 잔. 자기 전 방바닥에 앉아 나누는 소소한 웃음들. 그렇게 서서히 '우리'가 된다. 함께 움직이는 기분. 그 자체로 유대감이 형성된다. 그러니 급할 것 없다. 그저 주어진 시간에 마음을 다하면 언젠가는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세상 만사가 그렇다. 가끔 매일 챙겨보는 웹툰의 초반 회차를 보면 '아니, 이렇게 못 그렸다고?' 싶을 때가 있다. 매일 보는 동안 뭐가 변하는지도 몰랐는데 1화와 263화의 그림은 달라져 있다. 그렇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다음 레벨로 넘어가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애매하고 어색한 적응기간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리라. 마음을 열고 그 때가 올 때까지 편하게 기다리자. 오히려 급하게 친해지려고 가면을 쓰거나 서두르면 내 마음이 체할 수 있다.


24시간 함께 있으면 본모습을 숨길 수가 없다. 그래서 좋다. 꾸미지 않은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뭐랄까, 온전하게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하게 된다. 스탭 한 명 한 명이 다 다르고 특별하게 다가온다. 다들 둘러 앉으면 그런 얘기를 자주 했다. 너는 이런 점이 참 좋아, 너는 이럴 때 이렇게 하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몰랐던 매력을 발견하기도 한다. TV도 잘 안 보고, 외부와의 접촉이 별로 없이 게스트하우스가 하나의 세상이 되어서 그럴 수도 있다.

다음은 한 달쯤 지났을 때 일기 내용의 일부다.


이 사람들 앞에서 편해졌다는 걸 새삼 느낀다. 조금씩 이상하고 솔직하게 변해가는 나를 받아주는 사람들이 낯설고 고마웠다. 낯가리지만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내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 준다. 각자의 고유한 매력에 집중할 수 있는 신기한 곳이다.


이제 그 낯설었던 사람들은 단순한 스텝을 넘어 가족이다. 사실 ‘가족 같다’는 말을 별로 안 좋아했다. 가족이란 의무적으로 묶여있는 개념 같기 때문이다. 가족 같다고 하면 자발적으로 서로를 지켜주고 아껴주는 것보다 ‘희생’이라는 이미지가 더 먼저 떠올랐다. 안정보다는 무력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게하 스텝으로 지내면서 얼핏 좋은 의미의 가족이란 이런 느낌일까,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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