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하고 쿨한 하도리

제주살이 100일 no.3

by 치즈미

제주살이 100일 no.3

제주 뚜벅이는 버스에서 굉장히 많은 시간을 보낸다. 차로 가면 20분 거리도 버스를 이용하면 한 시간씩 돌아간다. 시내를 두 번만 왔다 갔다 하면 하루가 끝나 있다. 장기 렌트는 몇 십만 원씩 비용이 드니, 자차를 사지 않는 이상 버스는 우리의 숙명이다. 하지만 버스도 타다 보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소소한 재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싸우는 듯 아닌 듯 거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제주 방언을 듣거나, 마이크로 승객들과 소통하려고 애쓰시는 버스 아저씨의 노력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나는 정류장 방송에 재미를 붙였다. ‘금붕사’, '00리 취락구조’, ‘고망난돌입구’ 등 특이한 정류장 이름들이 꽤 있다.


비밀의 문으로 입장

가장 인상 깊은 이름은 ‘하도리 동동’이었다. 동동!

너무 귀여워서 ‘이번 정류장은 하도리 동동, 하도리 동동입니다’ 하는 안내방송을 따로 녹음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도리는 한 번도 목적지가 아니었다. 평대, 세화, 김녕, 종달리의 길목에 있는 어떤 곳일 뿐이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도무지 감이 안 왔다. 그러다 제주를 떠나기 며칠 전 괜찮은 에어비앤비를 발견했다. 워낙 궁금했던 곳이라 여행해 보기로 했다. 딱 하도리에 내려 걸어갈 때 약간 9와 ¾ 승강장에 들어서는 것 같았다. 미지의 세계.






Vintage

하도의 첫인상은 빈티지였다. 잡초가 무성한 넓은 골목길, 여기저기 긁혀 방치된 파란 트럭과 갈색 트럭. 픽사 애니메이션 <Cars> 같았다. 황폐한 걸 좋아하는 우리는 냅다 셔터를 눌렀다. 게다가 이 마을에선 뭔가 알 수 없는 자유분방함이 느껴졌다. 아무렇게나 쌓은 탑이 예술이 되듯, 그런 종류의 쿨함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그냥 뻥 뚫린 밭 옆에 길인지 아닌지도 모를 흙 줄기가 이어져 있다. 그 조그만 길로 내려가 보면 작은 기념품 가게가 나온다. 그냥 가정집들 사이에 태연하게. '발견한 사람은 오고 말 사람은 마쇼~'하는 듯하다. 주인 분도 집 마당에서 반려견과 노시다가 내가 들어가니 ‘둘러보세요’하며 반기는 그런 푸근하면서도 쿨한 분위기. 뭘 사진 않았지만 나가는 길에 흙밭 조심하라고 따뜻하게 일러주셨다.

길을 걷다 보면 시원하게 쭉 뻗은 나무도 만나고, 생뚱맞게 빛깔 좋은 말도 볼 수 있다. 하도의 골목을 다른 마을과 구분 지을 수 있게 해 준 것은 이런 황량한 쿨함이었다.


억새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가 억새 밭에 둘러 쌓인 비밀 스팟을 발견했다. 사실 물억새인지 갈대인지는 잘 모르겠다. 제주에 살면서 5번은 넘게 그 차이에 대한 설명을 들었지만 도저히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어감이 더 좋은 억새로 명했다. 여하튼 어린 시절 친구와 모험가가 되어 호수공원을 탐험하던 느낌으로 척척 헤쳐 들어갔다. 바닥이 약간 늪 같아서 신발이 푹푹 빠졌다. 안으로 들어서니 지미봉이 떡 보였다. 비밀스러운 뷰 포인트 발견, 또 뚜벅이 여행이 즐거워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끼리 새 땅을 개척한 것처럼 작은 흔적도 남겼다.

산굼부리나 아끈다랑쉬 오름 등 제주에도 몇몇 억새 스팟이 있다. 그러나 나에겐 역시 이름 모를 곳에 자연스럽게 자라 있는 억새가 제일 예쁘다. 유채꽃이나 벚꽃도 마찬가지다. 제주에 살아서 좋은 점은 그런 비밀 스팟을 하나씩 메모해둘 수 있다는 것. 바닥에 떨어진 억새 한 줄기를 주워 가방에 꽂고 돌아다녔다. 자유로운 방랑자가 된 기분이었다.

방랑의 흔적/ 걷다가 발길이 닿은 카페 지미. 분위기 좋다!


마을 방송

나는 어릴 때부터 이야기 쓰기를 좋아했다. 중학교 때 친구가 내 글을 재미있어해서 아예 연재소설을 써 준 적이 있다. 완전한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건 처음이었다. 그때 배경이 시골마을이었다. 마을 이장 딸의 이야기였다. 마을 전체에 쩌렁쩌렁 울리게 '아아 주민 여러분...' 하는 게 이 소설의 첫 대사였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그 방송을 실제로 하도리에서 들었다.

마을 주민 A씨, B씨, 그리고 꽃

숙소 도착 후 저녁거리를 사러 마트로 내려가는데 별안간 어디선가 지지직 소리가 들리더니 ‘아아.. 다들 제초 작업을 위해 내일 12시까지 바다로 내려오세요…’하는 구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좋아한 제주는 대부분 시골 마을이었지만 여긴 진짜 마을 공동체였다. 이런 폐쇄적 사회는 내가 무의식 중에 가지고 있던 노스텔지아였다. 꽤 짜릿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 나중에 돈 벌면 꼭 하도리에 집 짓고 살겠노라고 다짐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걷기만 한 하도리 여행.

오히려 그래서 마을 본연의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가장 힐링이 되었던 여행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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