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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미 Feb 10. 2023

한 사람의 세계를 끊어낸다는 것, <결혼의 풍경>

2021년 HBO 5부작 드라마

HBO에서 2021년 방영된 5부작 시리즈. 10년 차 부부 미라(제시카 차스타인)와 조너선(오스카 아이작)이 헤어지는 과정을 담은 드라마로, 이스라엘 출신 하게이 레비가 감독과 각본을 맡았다.


다섯 편짜리 짧은 시리즈지만 하루에 한 편 이상을 보기가 힘들었다. 10년 이상 이혼하지 않아 '성공한 커플'로 분류되어 연구 인터뷰까지 진행한 미라와 조너선.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 사실은 전혀 성공적이지 않음을 신랄하게 보여준다. 원제는 Scenes from a marriage. 결혼의 '풍경'보다는 '광경'이라는 건조한 어감이 훨씬 어울리는 드라마다. 혹은 '조각'도 좋을 것 같다.


대비되는 두 캐릭터의 예정된 갈등


가만히 보면 두 사람은 너무 다른 에너지를 가졌다.


미라는 자유롭다. 너무 독립적인 나머지 문제를 인식한 순간부터 혼자 모든 생각을 다 하고 결과만을 통보한다. 낙태를 포함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홀로 감내한 후 어느 날 갑자기 조너선에게 '이 결혼생활을 견딜 수 없다'며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당장 내일 떠나겠다'라고 선포한다. 


독립적인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미라도 자신의 판단을 과신하는 사람이다. 이야기 나눠봤자 결과는 변하지 않고, 서로의 시간을 아끼기 위해 자신이 떠나버리는 게 낫다고 말한다. 본인에겐 최고의 해결책으로 보이겠지만 상대의 감정에 틈을 주지 못한 반쪽짜리 배려다. 내연남 폴리의 평가에 따르면 미라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게 뭔지 모른다. 아마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대는 법을 모른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성격과 삶의 방식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에 집착하는 워커홀릭이 됐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조너선에게 돌아와 자신은 이제 연애에 관심이 없다며 '고독은 곧 강인함'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하는 걸 보면 그 믿음을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독립적인 그녀는 10대부터 40대가 된 지금까지 싱글이어본 적이 없다. 원하는 걸 쟁취해내는 성격 때문일까? 아니면 내면은 의존을 강하게 원했기 때문일까? 문득문득 튀어나오는 집에 있어도 '집에 오고 싶다'는 대사, 새로 이사 간 화려한 집에 아무런 애정도 느끼지 못하고 예전 집에 있는 낡은 소파에 애착을 보이는 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조너선은 종교적 믿음이 강한 집안에서 자랐다. 미라와 달리 날 때부터 의존하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규율이 있었다. 쾌락에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일생동안 자신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이 존재한 것이다. 어찌 보면 그도 미라처럼 자신만의 방향성이 강한 사람이다. 가정을 파탄 낸 쪽은 미라, 지키려던 쪽은 조너선이라 언뜻 그가 피해자처럼 보이지만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내내 '우리'가 아닌 결혼이라는 제도를 지키는 것에 큰 방점을 찍으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종교에서 남녀가 이혼하려면 길고도 모욕적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설명적인 씬이 굳이 나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미라가 집을 감옥처럼 느끼며 그토록 지독하게 외로워 하진 않았을거다. 극 중 '내가 누굴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있었는지, 아니면 사랑받은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조너선의 대사가 나오는데 아마 그도 '진정으로' 미라를 사랑해서 붙잡은 게 아님을 은연중에 깨닫지 않았나 싶다. 


두 사람은 결국 자신의 가치관을 양보하지 못했다. 사랑에 대한 서로 다른 정의를 내린 채, 맞춰 주지 못하는 상대를 보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고 나면 답답한 질문이 내려앉는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걸까. 결혼은 근본적으로 지속 가능한 것인가. 드라마가 답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한 사람과의 연을 끊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은 알 수 있다. 현실에서도 인연의 끈은 생각보다 질기다.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설정하니 두 사람이 겉으로 보여주고 싶어하는 모습과 속마음의 충돌, 그것을 드러내는 대화만으로도 극을 끌고 갈 수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기억에 남는 장면들

1. 미라와 조너선의 첫 인터뷰

카메라는 고정된 채 인터뷰이 부부를 흔들림 없이 정면에서 응시한다. 지금부터 시청자는 관찰자가 되어 그들의 삶을 낱낱이 보게 될 것이다, 하는 느낌. 또한 미라와 조너선 각자가 말로써 본인 스스로를 정의하도록 하는데, '저는 여자이고, 결혼했고, 엄마이고,~'를 말하는 동안 앵글은 점점 가까워진다. 어쩐지 그들이 입으로 말하는 내용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곧 그 너머의 진실을 보여줄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게이 레비의 인터뷰 내용 중 흥미로운 게 있었다. 레비는 극 내내 집 안에서 대화하는 미라와 조너선의 모습만 비춘다. 그들이 일터에서 어떤지, 외출해서 어떤 일상을 보내는지는 일체 보여주지 않는다. 시청자는 그저 서로의 대화 내용을 통해 그런 일이 있었겠구나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보통 드라마는 ‘설명(telling)하지 말고 보여(showing)줘라’고 가르치는데, 레비는 보여주지 않고 대사로만 풀어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때로 진실 그 자체보다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말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말을 통해 오히려 보여주고 싶은 것과 감추고 싶은 것을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할 텐데, 위 인터뷰 장면과 연결되는 듯해서 재밌었다. 자신을 설명하는 미라와 조너선이 자신들을 설명하는 대사를 통해 오히려 그들이 감추고 있는 욕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 점진적으로 폭로하는 극의 구성을 강조하기 위해 인터뷰라는 장치를 사용한 것일 수도 있겠다.



2. 진심으로 마음이 떠났을 때의 고요함

하루 종일 기분이 예민해져 있던 미라는 조너선에게 사실 자신이 해고당했음을 고백한다. 그러자 조너선은 말한다. “만약 상황이 달랐다면, 난 미친 듯이 화를 냈을 거야. 애커먼(미라의 상사)에게 복수할 시나리오를 끝없이 펼쳐놨겠지. 하지만 지금 들을 때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어. 아까 당신과 사랑을 나눌 때도 ‘이게 마지막이라면? 당신을 다시는 볼 수 없다면? 견딜 수 있을까?’ 상상해봤어. 없어도 살 수 있겠더라고. 난, 당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거야.”


사랑했던 상대에게 이보다 더 잔인하게 말할 수 있을까? 지긋지긋하다며 짜증내는 것도, 엉엉 울며 화를 내는 것도 아닌. 그저 무의 감정. '널 사랑하지 않아, 그냥 그게 전부야'라는 노래가사처럼, 믿었던 사랑에 사실은 실체가 없다는 허무함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3. 프로덕션 오프닝

매 화가 시작할 때마다 실제 촬영 준비 중인 스탭/배우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슛이 들어가면 그대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감독은 단순히 보스턴에 사는 이 부부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 보여주는 이야기는 쇼일 뿐이니 이들의 서사에 집중하기보다는 결혼이 뭔지, 일부일처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해보자고. 그래서 드라마 자체가 굉장히 연극적이지만 워낙 깊은 감정을 다루니 오히려 환기시켜주는 장치가 있는 것도 좋은 선택인 것 같다. 리메이크작이니 차별점을 두는 것도 필요했을거고.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감정에 푹 빠져들게 만드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이라, 원작의 연극적 요소를 살리기 보다는 차라리 두 사람이 일터에서 겪는 에피소드까지 좀 더 확장시켜서 서사를 풍부하게 각색해봤으면 어떨까 싶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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