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레이터 :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사울 레이터는 1950-60년대의 뉴욕을 담은 사진들로 ‘뉴욕의 전설’, ‘컬러 사진의 선구자’라 불리는 인물이다. 가족을 떠나 뉴욕에 정착한 23살 무렵부터 평생 사진을 찍어온 그이지만 60여년의 사진 경력을 마무리 지을 80세 무렵에야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번 전시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에서는 그의 대표 컬러 작품들과 함께 흑백 사진, 패션 화보 등을 감상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했던 이들을 담은 스니펫과 사진에 회화적 요소를 더한 페인티드 누드까지도 만나볼 수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그의 예술세계를 따라 거닐며 느꼈던 것들을 적어보려 한다.
사울 레이터는 스스로를 ‘별 볼 일 없는 사람(Nobody in Particular)’이라 소개하고, ‘잊혀진 사람(hoped to be forgotten)’이 되기를 소원으로 빌 정도로 명예 혹은 재능에 대한 믿음을 거부했다. 그저 자신이 찍는 대상의 배경으로, 카메라 뒤의 이방인으로 남기를 원했던 사람. 그는 자신이 주목을 받는 사람이기 보다는 그리 대단치 못한 사람이라는 쪽에 힘을 실었다.
“I was hoping to be forgotten, I aspired to be unimportant.”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 뉴욕의 풍경을 담아내는데 몰두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속에는 사울 레이터 자신이 비쳐 보인다. 그는 스스로를 배경 같은 존재로 여겼지만 사실 그 어떠한 사진작가보다도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내고 있었다. 거울에 반사된 사물, 흐린 유리창 너머의 인물을 찍을 때면 어쩔 수 없이 피사체뿐만 아니라 사진을 찍는 자신의 모습도 드러나게 된다. 카메라를 든 채, 열중한 모습 그대로.
평범함에 가려 제 빛을 내지 못한 대상을 찾아내는 능력은 삶에 대한 그의 애정에서 비롯된다. 그런 종류의 깨끗한 애정은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하기에 사진에도 비치게 되는 걸까. 그렇기에 그저 카메라 뒤의 이방인으로 남고자 했던 사울 레이터는 어떠한 사진작가보다도 더 선명히 사진 속에 자신을 드리우고 있었다. 때로는 검은 그림자의 모습으로, 때로는 거리의 불빛에 반사된 하얀 손의 실루엣으로.
‘초상화’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사진들도 거의 대부분이 그림자를 촬영한 것이거나 창문 속 카메라 뒤에 가려진 얼굴뿐이다.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은 것은 순전히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 탓이라거나 여타 예술가와 같이 신비주의자의 길을 걷고자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더욱 가치 있는 것이 존재한다 믿었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이들을, 일상의 소중함을, 곧 사라져버릴 순간들을 잡아두는 데 전력을 다하는 편이 더욱 좋았기 때문이었다. 자기 자신을 넘어 우선순위에 놓여야만 하는 대상이 많았을 뿐이다.
‘신비로운 일들은 익숙한 장소에서 벌어진다. 늘 지구 반대편으로 떠날 필요는 없다.’라는 그의 말이 어쩌면 사진의 특별함을 설명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움을 발견할 기회를 미루어둔다. 너무 빠르게 지겨워지고 너무 섣불리 귀찮아져서는 매번 하던 방식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주어진 세상을 보았지만 더 깊이, 더 오래, 더 정성들여 ‘바라’ 보았다. 깨끗하게 닦인 구두가 아닌 구두닦이공의 신발에 주목한 사진, ‘구두닦이의 신발’에서는 익숙한 일상을 뒤집어 볼 수 있었던 그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 상업성이 짙은 잡지 사진을 찍어야 했을 때마저도 정형적인 촬영 방식에서 벗어나 모델과 의상의 분위기를, 대상의 고유한 미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세상 곳곳에는 발견되지 못한 아름다움이 기다리고 있다 믿었던 그는 그런 보석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에는 차마 끝마치지 못한 문장이 담겨 있다. 내가 모르는 사이 흘러가버린 이야기처럼, 어딘가에 감추어진 실오라기를 잡아당기기만 하면 서서히 풀려 나올 것 같다. 눈치 채지 못한 어느 시점부터 이미 시작되어버린 영화가 멈추지 않고 상영되는 듯. 사진 너머에는 분명 어느 날, 어느 누군가가 느꼈을 감정이 존재하리라 확신에 가까운 믿음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의 사진이 담고 있는 것은 난생 처음 보는 대상도, 놀라운 장면도 아니지만 사람들이 그저 넋을 놓고 쳐다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별 것 아닌 것을 별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진에 담긴 ‘사람’이다.
물론, 사람들을 찍은 사진이기에 당연한 말처럼 들릴 테지만 사울 레이터의 사진에는 분명 ‘사람’이 존재한다.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감정이 짙게 묻어난다. 그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나는 겪어본 적도 없는 그 시절의 뉴욕에 주체할 수 없는 향수를 느낀다. 나의 것이 아닌 삶의 생경한 촉감에도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순식간에. 슬픈 마음이 되어 수십 년의 시간을 헤치고 사진으로 빠져든다.
그의 사진은 하고 싶은 말이 분명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없이 모호하기만 하다. 나름대로의 이유를 떠올려 보니, 아마 그가 확고한 주제를 던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 싶었다. 사실 주제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푸른색 구두를 찍었고, 빗방울이 맺힌 카페의 유리창을 찍었고, 지나가는 자동차에 비친 하늘을 찍었다. 시선이 머물렀던 대상, 자신이 느끼는 바를 담아냈지만 그것은 누군가를 위한 교훈도, 감성적 호소나 깨우침을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순간을 살아내며 보고, 느끼고, 얻어낸 감정을 붙잡아 온전히 넣어둔 것 뿐.
그렇기에 레이터의 사진은 분명하고 강렬한 동시에 언제나 그 의미와 내용이 모호하다. 그가 포착한 삶의 조각으로 인해 한동안은 쉬이 잊을 수 없을 만큼 짙은 자국이 남더라도,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을 말로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의 사진 앞에서는 논리적인 단어로 이성적인 문장을 만들어 보려는 시도마저도 우스운 낱말의 나열 수준으로 바뀌어 버리는 걸 보며 그저 느끼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 존재함을 되새기게 된다.
사울 레이터는 어딘가에 투영된 대상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라는 이번 전시의 제목처럼, ‘창문’과도 같은 하나의 막을 통해 ‘어렴풋’하고 ‘희미’하게. 그의 사진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설명할 때면 언제나 ‘대상을 흐리게 숨기거나 모호하게 만든다’라는 설명이 뒤따르곤 한다. 하지만 그는 숨길 것은 분명히 숨기면서도 드러내야 할 것은 고스란히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흔들리는 차 안, 희뿌연 안개 속, 복잡한 거리 행인들의 움직임 너머에서도 자신이 포착한 것은 작은 것이더라도 선명하게 담아냈다.
누군가는 사울 레이터의 사진을 가리켜 순 엉터리라 할 수도 있을 듯싶다. 흔들린 사진이 반 이상,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뿌옇고 희미한 사진도 수두룩하다. 그나마 잘 찍힌 사진이라 해도 프레임 끄트머리에 겨우 걸쳐진 쓸모없는 작은 신발 한 짝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식이다. 하지만 그 흔들림은 마치 다가오는 운명처럼 눈앞의 무언가를 목도한 순간 같다. 꼭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주변 모든 것들은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고, 오직 눈앞의 대상만으로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순간. 흔들리고 포커스가 맞지 않는 사진임에도 그의 작품들이 하나같이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흔들림 너머에 내가 바라는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하는 마음이 담겨 있기에 오히려 어렴풋한 주변이 불필요한 세상을 지워내는 장치로 사용된 것이라 여겨졌다.
그 생각이 처음 떠오른 건 ‘신발’이라는 사진을 보았을 때였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지나가는 기차 때문에 온통 흐려진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는 제목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한참을 헤매다 발견한 신발 한 짝. 그는 처음 카메라를 든 순간부터, 기차가 시야를 가리기 전부터 이미 그 신발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소하고 작은 것 하나에 오롯이 집중된 시선은 그 대상이 다른 이들의 말처럼 그저 사소하고 작기만 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조용히 말해주는 듯하다. 하찮고 별 볼 일 없는 것들이 초점을 차지해버리도록 내버려둔 사진을 통해 특별함을 결정짓는 세상의 기준을 잊을 수 있게 만들어준다. 사진에서 드러나는 기다림, 그 정성스런 시간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순간에 머물러 있는 사진을 보는 이도 오지 않을 다음을 끊임없이 기대하고 기다리게 만든다.
나에게 사울 레이터의 사진은 ‘다음을 기다리게 만드는 사진’이었다. 그의 내면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는 필름에서 사람들은 감추어진 서사를 읽어내고, 말로 설명하지 못할 농밀한 감정이 자아내는 분위기에 휩쓸려 속절없이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개인적이고 내밀한 감정을 담아낸 카메라의 시선 덕분에 순식간에 그와 친밀해져버린다. 찰나에 불과한 사진 한 장에 사로잡힌 관객은 그 조각의 원형, 온전한 서사를 원하게 된다. 하지만 한없이 깊어지고 침묵하며 배경이 되기만을 자처하는 사진은 도무지 다음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점점 더 레이터의 사진에 빠져드는 게 아닐까. 가려진 대상에 대한 궁금증, 눈치 채지 못해 순식간처럼 느껴지는 대상의 변화, 사색적인 분위기와 서정적인 색감, 기다려도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사진의 고요함, 다음 없음.
사진 속의 서사에 마음을 빼앗긴 감상자는 결국 겪어 보지 않은 시간을 그리워하면서 그 사진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의 사진은 어떠한 메시지나 특정한 주제의식을 담으려하지 않았기에 보는 이들의 감상이 들어설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사진에서 편안함 혹은 그리움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건 아마 작가 자신이 큰 목소리로 설명하기보다는 한발 물러서서 감상자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내어 주길 택했기 때문일 테다. 그로 인해 감상자는 마치 기억나지 않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생경한 감촉의 그리움을 느끼며, 앞뒤를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상상하게 된다.
좋아하는 것에 논리적인 이유를 찾기보다 좋아하는 것 그 자체로 내버려두는 자연스럽고 당당한 마음이 멋졌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세상의 일면을 단순하게 정의내리지 않고 마음에 담아 두고 표현했다는 것이 대단했다. 존재감 없이 흐릿한 것들 사이에서도 분명한 것을 잡아내는 재능이라니.
‘도시의 풍경에 스며들어 말없이 관조하기’를 즐겼던 사울 레이터는 자신의 애호가 분명했기에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었을 테다. 성공이나 유명세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삶을 우선시했던 그에게 ‘관조’란 좋아하는 것을 보고, 소중히 담아낼 줄 아는 애호의 선명함이 담긴 행동의 방향성 혹은 삶의 태도 같은 것이겠지. 자기가 좋아하는 게 확실하니 말없이 지켜보고픈 대상이 있었던 것이지 않을까. 자기 자신에게는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일찍이 깨달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신이 바라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을 살아도 되겠다는, 삶의 방향과 인생의 우선순위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노년에 접어든 사울 레이터와의 대화를 담은 다큐멘터리 ‘In No Great Hurry’에서 그는 컬러 사진이 인정받지 못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풀어놓는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그의 작업실 곳곳을 비추는 다큐멘터리 덕분에 그가 수십 년 동안 보관해 온 슬라이드와 작은 필름 조각, 컬러 사진 작업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당대의 많은 이들이 그의 사진을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는 말과 함께 내비친 그의 속마음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난 좋았는데. 사진도 마음에 들었고요.”
작품 하나하나 애정 어린 눈빛으로 소개하는 모습.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을 만큼의 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는 자신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자신이 너무나도 단단한 인간이었기에 주변인들에게는 전혀 이방인처럼 여겨질 수 없었을 거라는 사실이다. 물론 자신의 삶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들을 일찌감치 찾아내는 데 성공한, 주인공이었을 것이다. 나도 사울 레이터만큼이나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요란한 웃음을 터뜨리며 함께 웃다가도 조용하게 스스로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래도록 바라보는 방법을 아는, 그래서 말없는 애정을 나누어 줄줄 아는 사람. 그리고 세상의 참견에 뜻을 굽히거나 크게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다른 누군가를 탓하며 항상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요즘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의 모습과는 정반대에 서 있는 듯하다. 제대로 된 뿌리가 없어서 주변의 말들에 마음을 쉽게 바꾸었고 세상에 떠도는 수많은 이야기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가진 걸 소중히 하기보다 가지지 못한 것들을 떠올리며 나를 미워했다. 모든 걸 뒤로 하고 떠나야만 한다고, 그래야 나도 바뀔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번 전시를 보고 난 후,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을 제대로 발견해준 적이 없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나는 너무나도 속상하고, 쓸데없이 불평이 많고, 얄팍하고 줏대 없는 미약한 사람일 뿐이었다. 나는 내가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가진 것에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심정. 비교나 의심 없이 나의 길을 갈 수 있는 자신감.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쏟을 줄 아는 용기와 오롯하게 나를 내어주는 순수한 맹목성을 가지고 싶다. 그런 강인함과 단단함을 가지고 싶다. 진심으로 가득한 사람이 되고 싶다. 누가 보아도 사랑으로 가득한, 의심도 불신도 미움도 소용없는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사울 레이터는 사랑의 기쁨과 사랑받는 일의 기쁨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위에서 보이는 것처럼, 사울 레이터는 인쇄된 사진을 작은 크기로 찢어 만든 조각들을 ‘스니펫’이라고 부르며 매우 아꼈다고 한다. 가족이나 연인, 이웃 등 가까운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스니펫에서는 다른 사진들에 비해서 더욱 느긋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날 수 있다. 엽서 크기부터 명함 크기, 손톱만큼이나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사진들에는 진심어린 애정에서 비롯된 빛나는 순간이 포착되어 있다.
편한 사이에서만 나올 수 있는 표정과 몸짓으로 가득한 스니펫에는 무방비 상태로 해맑게 웃는 사람들, 한껏 늘어지고 긴장이 풀어진 사람들이 찍혀 있다. 얼룩덜룩하게 빛이 바래고, 군데군데 모서리가 찢어지고 구겨졌지만 그렇기에 더욱 아름답다. 꼭 매일같이 주머니에 넣어 다니면서 그리워질 때면 언제고 꺼내어보았을 것만 같다. 그들의 미소가, 그 순간의 행복이 눈에 선연히 보이는 듯 스니펫은 아름답고 따뜻한 삶의 축소판처럼 느껴졌다.
사랑이 담긴 사진은 티가 난다고들 한다. 찍는 이의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에 피사체가 있기 때문이다. ‘레미’라는 사진의 네모난 프레임 속에는 스니펫 못지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요정처럼 나풀거리는 옷을 입은 레미가 다리 한쪽을 살며시 든 채 폴짝 뛰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다. 한 장의 사진으로 레미의 성격은 물론 그녀를 아끼는 레이터 자신의 마음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사랑하기에 그 사람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알고 사랑하기에 그 사람의 매력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는 것. 보는 사람까지 행복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그의 사진에는 부끄러움 없이 드러낸 사랑이 느껴진다.
이번 전시가 좋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한도 끝도 없이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에 어울리는 차분한 분위기를 위해 사진 촬영을 최소한으로 제한한 관람 환경에서는 전시 주최 측의 배려가 느껴졌다. 덕분에 관람 내내 사진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전시장 내부의 조도, 창문처럼 유리로 세워둔 가벽, 4층까지 이어지는 전시의 흐름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필름 영사기를 위해 마련된 2층의 전시공간은 잊을 수 없다. 영사기에서 나온 빛으로 가득 찬 흰 벽, 일정한 금속 마찰음을 내며 돌아가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끊기듯 넘어가는 사진, 액자에 담긴 사진들보다 노이즈가 많지만 오히려 제 모습 그대로를 만나는 듯한 기분.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사진들을 보고 있으니 조금은 새로운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전체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적인 친절에 얽매이기보다 내가 보고 있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야지 사진을 통해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는 것. 또 사진의 중간을 가리면 한 장의 사진으로 두 개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과 가렸을 때 더 선명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번 전시에는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컬러 슬라이드까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게 행복할 따름이었다. 필름이 세 바퀴를 돌아갈 동안 간이의자에 앉아 소리 없이 감탄하며, 그렇게 한참을 보고 또 보았다.
김이 서린 창에 흘러내리는 물방울, 그 무늬를 통해 바라본 왜곡되고 변형된 세상은 더욱 선명하게 감정을 담아낸다. 혼란하고 불안한 도시의 일상을 틀에서 벗어난 구도로 기록해 낸 사울 레이터는 회색의 뉴욕에 당혹스러울 만큼 아름답고 선연한 색채를 선물했다. 흑백의 세상에서 보석처럼 생동하는 빛깔을 발견해낸 그에게 컬러 사진의 선구자라는 이름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검은 벽에 반쯤 가려진 거리의 모습, 물 얼룩이 잔뜩 져있는 흐린 유리 창문, 흔들리는 자동차와 반짝이는 크롬. 사진 속의 멋진 풍경을 유심히 바라보면 사진기를 들고 있는 그가 비쳐 보인다. 어렴풋한 사진 뒤에는 그의 수줍은 진심이 자리하고 있다. 진심과 진실 위로 수 겹의 레이어가 겹쳐져 한 꺼풀씩 들추어볼 시간을 내지 않고서는 그 안을 들여다볼 수도, 그 깊이를 알 수도 없다.
사울 레이터는 오랜 시간을 들여 조용한 진심을 전하는 작가다. 그의 진심은 벽 너머에, 유리 창문 너머에 가려져 있다. 보여주고 싶은 것은 보려는 사람을 위해 언제나 그 너머에 있다. 그는 보이는 것 그 자체가 아닌, 일상을 다르게 보는 눈으로 평범함 속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