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고 자가격리 중이다. 첫날에는 목이 칼칼한 증세와 함께 두통이 있었고, 둘째 날에는 근육통과 인후통이 있었다. 셋째 날에는 인후염 약이 효과가 있었는지 인후통이 한결 나아졌다. 오늘은 넷째 날이다. 눈 뜨자마자 마른입에 약을 털어놓고 컵라면에 물을 받은 뒤 넷플릭스를 틀었는데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수원에서 급히 목포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할머니께서 코로나 확진됐다는 소식을 어제 들었는데 너무 황망했다.
작년부터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연세에 비해 활기차고, 생기가 넘치던 분이 최근 몇 년 사이 근육과 살이 쪽 빠지고 눈빛과 목소리에 힘도 사라져 갔다. 1년에 한 번씩 찾아뵐 때마다 할머니는 눈에 띄게 연로해지고 계셨다. 할머니의 생명력이 서서히 꺼져가는 모습을 보는 건 슬픔이었다. 할머니가 지닌 불꽃이 화려하고 영원할 거라 생각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예쁜 옷 입는 걸 좋아했고, 스몰토크도 좋아했고, 맛있는 걸 먹는 것도, 챙겨주는 것도 좋아했고, 술도 좋아했고, 욕도 잘했다. 웃음소리도 호탕했다. 나는 할머니와 있으면 많이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뉴스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보고, 같은 오 씨라 정이 간다는 할머니 말에 뒤집어졌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동네 인싸였던 것 같다. 정정하셨을 때 할머니 손을 잡고 병원을 가면 누구나 다 할머니를 알아봤다.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 할머니가 먼저 스몰토크를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내 소개도 이어졌다. "우리 손년데, 할머니 보고 싶다고 방학 때 수원에서 여까지 왔어." "아유 좋겠네요 어르신" 나는 옆에서 어색하게 웃었다. 할머니랑 집 앞 슈퍼도 자주 갔는데, 갈 때마다 할머니와 나만의 비밀이 생겼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건강을 염려해서 맥주를 못 마시게 했는데, 나와 마트를 가면 할머니는 장바구니에 피쳐 두 개를 담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다. 내가 계산을 하는 동안 할머니는 마트 한편에서 직원이 건네준 종이컵에 맥주를 콸콸콸 부어 꿀꺽꿀꺽 마셨다.(할머니는 가게의 오랜 단골손님이었다.) "할아버지한테 말하지 마라잉." 나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남은 맥주 피쳐는 몰래 들여와 음식 저장고에 소중히 넣어놨다. 맥주 피쳐 몇 개가 이미 놓여 있었던 게 기억난다. 엄마가 사준 게 분명했다. 엄마에 의하면 할머니는 음주가무를 정말 좋아하셨다고 했다. 엄마가 어렸을 때 학교에 다녀오면 할머니가 거실에서 동네 아줌마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춤추는 모습을 자주 봤는데 엄마는 그게 정말 싫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이야기 속 할머니가 너무 좋았다. 할머니 댁에 가면 할머니는 tv로 트로트 프로그램을 봤고 나는 mp3로 아이돌 음악을 들었다. 스마트폰으로 백세 인생을 틀어드리면 할머니는 박수를 치고 따라 불렀다. 40년 전 그 자리에서 동네 아줌마들과 노래 부르며 지르박을 추던 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동생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끊고, 라면을 후후 불어먹었다. 사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침 어제 봤던 영화가 만추였다. 영화 속에서 현빈과 탕웨이의 인연은 현빈이 시간을 상징하는 시계를 탕웨이에게 맡기면서 시작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나의 시간을 맡기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할머니를 최근 몇 년간 사랑하지 않았다. 전화도 거의 드리지 않았고, 바쁘고 거리가 멀다는 핑계로, 코로나 핑계로 거의 찾아뵙지도 않았다. 할머니의 생로병사를 보는 게 두렵기도 했다. 할머니의 앙상한 다리와 힘없는 표정을 보면 마음이 저려왔다.
3일장을 치르는 동안 사람들은 고인을 사랑하게 된다. 살아생전 고인에게 맡기지 못했던 시간을 온전히 고인만을 위해 쓰며 망자가 가는 길에 사랑을 마음껏 표현한다. 외롭지 마시라고, 당신을 많이 사랑한다고.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이 글은 내가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치르는 작은 장례식이다. 빈소도 찾아뵙지 못하는 못난 손녀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할머니가 내게 남기고 간 것을 생각해본다. 할머니 이름으로 남겨진 재산은 거의 없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재산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잘은 모르지만 할머니는 한평생 본인 명의로 된 재산을 크게 가져본 적이 없을 것이다. 자녀들의 성(姓)조차 할머니의 것이 아니었다. 보물 찾기를 하는 심정으로 할머니와의 기억을 뒤져보았다. 곧 '환대'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할머니와의 기억은 대부분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었다. 5살 때 경기도로 올라온 이후로 할머니와 나는 만남과 헤어짐을 1년에 한 번꼴로 반복했다. 5시간 동안 차를 타고 오면 할머니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 따뜻한 목소리로 "오메, 우리 애기 많이 큰 거 보소. 오느라 고생 많았네."라며 사랑방 사탕 뚜껑을 열어 입 안에 쏙 넣어주었다. 새벽에 도착할 때도 있었고, 눈이 많이 올 때 도착할 때도 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그때까지 늘 깨어계셨다. 지팡이를 들고 나와 우리를 늘 기다리고 계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지금껏 내가 받은 가장 큰 환대는 바로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받은 첫 환대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로부터 왔을 것이다. 지금 슬프지 않지만 자꾸 눈물이 흐른다. 그렇게 따뜻한 환대를 또 누구에게 받을 수 있을까, 그분들이 내게 보여준 환대를 내가 누군가에게 똑같이 줄 수 있을까.
할머니의 발인이 끝나면, 할머니는 이제 세상에 있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있지 않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내 기억 속에서, 내가 쓰는 단어들 속에서, 시간이 가면 늘어갈 주름 속에서 할머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죽기 전에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할머니가 감독한 마지막 영화에 나도 출연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나는 할머니가 내게 보여준 사랑만큼 표현해드리지 못했다. 환송도 해드리지 못했으니까... 훗날 내가 눈을 감을 때 마지막 엔딩 크레딧은 정해져 있는 것 같다. 바로 할머니의 따뜻한 환대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오느라 고생 많았다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할머니 사랑합니다. 가시는 길 편안하시고, 건강하셨을 때처럼 유쾌하고 즐겁고 활기차게 지내세요. 할머니가 주신 환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