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한수 Dec 09. 2019

보일러 기사님의 결혼기념일

- 그 날은 결혼기념일인데......


- 헐 그럼 오지 마세요. 어차피 다음날 출장 가니까 그냥 견뎌볼게요.


라고 했지만. 기사님은 굳이 오시겠다고 하셨고, 집주인의 동파 걱정 때문에 나 역시 더는 말리지는 못했다.


오래된 보일러와 씨름한지는 벌써 한참 되었다. 날씨가 이렇게 추워지기 전에는 고장 난 상태로 그냥 버텼다. 그러다가 10월의 내 생일날 집에 내려가기 전에 큰 맘을 먹고 기사님을 모시고 수리를 했는데 그게 또 고장이 난 거다. 정말 다시 수리할 시간이 없어 밤중에 아는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오기도 하고, 공중목욕탕에 들렸다 출퇴근도 했다. 나중에는 뭐랄까, 수리하는 것이 그냥 귀찮기도 했다.


그러다가 영하의 추위가 닥치면서 이제는 샤워할 물이 아니라 냉기가 가득한 방바닥이 걱정이었다. 연이은 출장과 귀향 등으로 집에 붙어있을 날이 없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하지만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 주인에게 부탁했다. 11월 말의 어느 날 주인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주려고 근무를 하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그걸 순간적으로 까맣게 잊고 회의에 들어갔다. 나오니까 전화가 여러 통 와있었는데, 급히 전화하니 이미 기사님은 떠나셨다고.


나보다 나이 어린 주인도 내가 답답한 눈치였는데, 일에 정신 팔려 만사를 놓치고 사는 전형적인 독신자로 보이는 것에 묘한 부끄러움이 느껴져서 그냥 내가 알아서 수리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사님과 도무지 스케줄이 안 맞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합의한 날은 기사님의 결혼기념일.


수리를 위해 시간을 맞춰서 판교역에서 홍제역까지 부리나케 전철을 타고, 집으로 들이닥쳤다. 혹시나 기사님 놓칠까 봐 전화를 했더니 동네 어귀에서 결혼기념일인데 오뎅 하나 먹고 계신 기사님을 뭔가 재촉한 기분이다.


한참을 뚝딱거리는 기사님의 전화가 연신 울려댄다. 미안한 마음에 뭐라도 사 온다는 것이 미친 듯이 뛰어오느라 그것도 잊었구나, 싶었다.


그렇게 수리를 마치고 나는 뜨끈한 방바닥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또 미친 듯이 짐을 싸서 출장을 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급지 선정을 잘못해서 출장비가 모자란다는 착각으로 업무장소에서 멀고 또 작은 호텔을 예약했는데. 방문을 여니 어디 가방을 펼 곳도 없이 작은 방에 침대만 꽉꽉 들어가 있다. 침대는 어떻게 넣은 것일까. 혹시 침대를 먼저 넣고 방문을 달았을까. 머리맡 창문의 외풍은 또 왜 이렇게 센 걸까. 큼직한 배게로 창가를 막으니 좀 낫다. 그렇게 추운 호텔 방에서 기사님이 결혼기념일을 무릅쓰고 수리해주신 보일러로 이제는 따뜻해진 나의 작은 원룸이 묘하게 그립다.


(주변 가까운 사람들은 알 텐데 나는 평소 좁고 캄캄한 내 원룸을 무지하게 싫어하며 그저 전세계약이 끝나는 3월을 목 빼고 기다리는 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국언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