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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한수 Nov 28. 2020

감정노동

알고보니 나도 감정노동을 하고 있다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하고 있는 일들의 80%는 들어오기 전에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예결산을 내 손으로 다 처리해야 하는 것도 사실 잘 몰랐고, 평생 연관이 없을 것 같았던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챙기는 일, 온갖 민원성 요구와 각종 업체를 상대하는 일, 그리고 갑질. 약 10여 년간 해외에서 자유를 누리고, 원하는 공부와 연구를 하면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그런 현실이었다.


하루하루 지내고 돌아오면 녹초가 되고,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독립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손도 대지 못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는데, 올초에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해져서 상담선생님을 찾아갔다. 그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받은 트라우마 때문에 상담을 받았던 분이었는데, 새로 직장을 구하면서 많은 것을 정리했다는 기분에 상담을 종료한 지 약 1년여 만에 다시 연락을 하게 되었다.


그때 거의 1주일 상간에 사기꾼 같은 이들을 상대하면서 마치 내 인생이 변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여서, 만나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한참 설명하고, 너무 지쳐서 힘들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누구랑 나눠야 하는지도 몰라서 난감하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니, 선생님께서는 감정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소개해줄 수도 있다고 하셨다.


감정노동?


나는 깜짝 놀랐다. 한 번도 내가 감정노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새삼 정말 그렇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내가 느끼는 괴로움을 객관적으로 해부하는 느낌도 들었다.


수화기 너머로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과 통화를 마치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 적도 있었고, 업무요청이라는 이름 하에 협박처럼 들렸던 요구를 받았던 적도 많았고, 협업을 하는 사람인지 사기꾼인지 구분되지 않는 상대의 모든 말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때도 부지기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문서처리나 행정이라고 보이는 일들이 사실은 감정노동, 아니 더 나아가 내 정신을 갉아먹는 일이었다.


다들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주변에 많이 있었다. 너만 그런게 아니라고. 그런데 또 다른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서 사람이 그렇게 자신을 갈아 넣으면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은 일이 아니라고 똑바로 말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면 그만둬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고발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또 내 마음 한 켠에는 그래도 일이 되게 해야 하지 않은지, 다들 망치고 있다고 나도 나몰라라 할 것이 아니라 그래도 풀어봐야 하는 것이 아닌지, 그런 미련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다가 마음이 갉아 먹히고, 어느새 평소에는 만져지지 않던 뼈가 만져질 정도로 몸도 갉아 먹힌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감정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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