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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빈 Aug 20. 2021

성실함은 때로 예술이 된다

다큐멘터리 영화 '암살자들'

먼저 '김정남 암살 사건'과 관련해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 만한 팩트 두 가지. 하나는 2017년 2월 여성 두 명이 김정일의 장남이자 김정은의 이복 형 김정남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독극물로 살해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 용의자 두 명이 인도네시아 여성 시티 아이샤와 베트남 여성 도안 티 흐엉이라는 점이다. 이번엔 아마도 많은 이들이 모를 만한 팩트 한 가지. 시티와 도안은 2019년 무혐의로 풀려나 집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암살자들'(감독 라이언 화이트)은 이 세 가지 팩트 사이의 빈 곳을 추적한다. 시티와 도안은 누구인가. 북한 공작원인가, 아니면 북한이 고용한 청부살인업자인가. 둘 다 아니라면 두 사람은 김정남을 왜 죽였는가. 그들이 이 암살을 은밀히 수행하지 않고, 공공장소에서 보란 듯이 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데 그들은 무슨 이유로 석방됐는가.


'암살자들'이 다큐멘터리로서 창의적인 형식을 보여준다거나 어떤 영화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내 관객이라면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숱하게 봐온 스릴러 형태 구성을 군더더기 없이 풀어나갈 뿐이고, 이 작품이 풀어내는 이야기라는 것도 인내심을 가지고 검색만 몇 번 해보면 알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암살자들'은 무가치한 작품인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다큐멘터리의 가장 큰 미덕은 이 희대의 살인 사건에 관한 방대한 양의 정보를 시간을 들여 직접 확인한 뒤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시해낸다는 점이며, 그것을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영화를 통해 알기 쉽게 풀어내 관객에게 소개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암살자들'은 누구도 하지 않은 일을 해 기록으로 남긴다. 어떤 작품은 이렇게 그 시도와 성실함, 존재 자체만으로 예술이 된다.


라이언 화이트가 내세운 가설은 이것이다. ①시티와 도안은 평범한 여성이다. ②돈을 벌기 위해 쿠알라룸푸르에 왔다. ③북한 공작원들은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한 뒤 두 사람에게 접근했다. ④그들은 시티와 도안에게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유행하던 몰래카메라를 찍는 데 참여하면 돈을 주겠다고 했다. ⑤두 여성은 수개월에 걸쳐 이 비디오 촬영에 참여하다가 북한 공작원의 최종 목표인 김정남에게까지 장난을 치기에 이른다. ⑥그렇게 시티와 도안은 1급 살인 용의자로 체포됐고, 북한 공작원들은 출국하거나 자취를 감췄다. 정리하면 '시티와 도안은 북한 공작원에 의해 이용당했고, 그들은 김정남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조차 몰랐다.'


'암살자들'의 궁극적 목표는 이 사건에 개입한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 정권이 암살을 기획·실행하면서 벌인 반인륜적 행태를 고발하는 것이다. 다만 '암살자들'은 이 만행의 기원을 향해 파 들어가기보다는 이 사건이 드러내 보인 갖가지 상황을 놓치지 않고 훑는다. 사건의 진실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는 것과 함께 이 암살을 가능하게 한 주변 상황을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깊게 파기보다는 넓게 판다. 구심(求心)보다는 원심(遠心)을 지향하는 연출이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북한 공작원이 이처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김정남을 죽일 수 있었던 배경엔 돈만 주면 쉽게 접근 가능한 동남아시아의 취약한 여성 인권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 또 북한 용의자들이 단 한 명도 말레이시아 수사 당국에 잡히지 않은 건 당시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정치적 상황과 관계가 있다는 것. 또 시티와 도안의 무죄를 방증하는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2년 넘게 구금돼 있을 수밖에 없던 정치적 이유와 반대로 이들이 풀려나게 된 정치·외교적 상황의 변화, 그리고 소셜미디어와 김정은의 국제 정치 데뷔 등이다. 라이언 화이트 감독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김정남을 죽인 것이 반인륜적이라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암살을 위해 그들이 판을 깔고 이 사건에서 빠져나오는 방식 역시 최악이었다.'


(글) 손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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